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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unjung Kim Sep 21. 2024

당신이 생각하는 장애는 어떤 단어인가요

자랑할 것도 없지만, 부끄러워할 것도 없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단어를 기억하는 주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본디 그 의미와 다르게 그 단어가 경험에 의해 각인되면 쉽게 그 선입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나는 10대 때에는 비가 너무 싫었다. 비가 오는 날, 내 몫의 제대로 된 예쁜 우산이 없어서 속상했고, 하나밖에 없는 운동화가 쫄딱 젖어서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신발에 신문지를 잔뜩 넣어 말리는 게 귀찮고 처량했던 것 같다. 그래서 비는 사전적 의미와 연강수량이 삶에 미치는 영향에 상관없이, 그저 나를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일 뿐이었다. 이러한 부정적인 의미는 성인이 되어 내 몫의 튼튼하고 예쁜 우산을, 갈아 신을 여벌의 운동화를 가졌어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비는 어쩐지 불편하다는 인식이 좀처럼 지워지지 않았는데 우산 없이 쏟아지는 비를 피할 겨를 없이 온전히 다 맞아보고서야, 내 몸에 더 이상 마른 곳이 없다는 것을 경험해 보고서야 비에 젖는 것이 불편하지 않다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경험에 의해 각인된 부정적인 인식이, 더 가까운 경험에 의해  긍정으로 덮어졌다고 할까.


장애인.

생각해 보면 어릴 때부터 내 주변에는 장애인이 많았다. 가깝게는 이모가 후천적 하반신 마비로 걷지 못하셨고, 외할머니댁에 가면 정신지체를 가지신 속된 말로 '동네 바보형'라고 불렸던 아저씨들도 많았다.

중학교 때 우리 반에 뇌성마비 장애를 가진 친구가 있었고 심지어 나와 짝도 몇 번했었다. 말도 어눌하고 지금생각하니 나와 눈 맞춤도 제대로 못했고 연필을 제대로 쥘 수 없을 정도로 손이 비틀어져있었는데도 일반학급에서 수업을 받았고 내 기억으로는 공부도 꽤 잘했다. 아이들이 그 친구를 놀렸지만 그 친구는  '그러지 마' 하며 눈물을 그렁그렁하면서도 절대 기죽지 않고 느릿느릿 강단 있게 할 말을 다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비장애인이면서도 정신이 유약하고 미개했던  다른 아이들보다 몸이 불편하지만 강철 멘털을 가지고 있던 그 친구가 진정한 승자였다.

그래서 장애인, 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그다지 부정적이지 않았다. 장애인들도 그들의 삶을 강단 있게 살아내는 것을 보면서 존경스러운 마음이 들었고 필요하면 얼마든지 도울 수 있다고 여겼던, 연민의 단어가 바로 장애인이었다.


그런데 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주변에만 맴돌던 그 단어가 살아서 내 삶에 직구를 던졌을 때 나는 깨달았다.

내가 얼마나 위선적이고 악한지를.


내 아이가 장애진단을 받고 장애인 복지카드를 받은 날, 나는 세상 서럽게 울었다.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슬프게, 가슴을 찢어놓은 단어라는 것을 온몸이 알아버린 날이었다.

누구에게나 선천적으로든 후천적으로든 장애가 찾아올 수 있다고 장애에 대해 남의 일처럼 떠들어 대던 이전의 나와, 이제 내 인생에 장애인의 부모의 낙인이 찍혔다고,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악을 쓰는 나와 무엇이 다른 걸까.

달라진 것은 장애를 삶으로 살아내고 있다는 것, 그래서 장애가 주는 불편함과 불의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어서 장애라는 단어에 굵게 밑줄 그은 삶을 살고 있다는 것.


얼마 전에 막내딸이 하원 후 놀이터에서 놀던 날에, 나무그늘에 삼삼오오 모여있던 다른 엄마들의 대화에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애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얼굴을 한, 한 엄마가 발달장애가 있는 아이들이 자꾸 우리 원에 오는 게 못마땅하다는 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병설 유치원이라 초등입학을 염두하고 오는 아이들이 많은데, 일반 유치원에서 적응이 힘든 친구들이 꽤 온다며 자꾸 학교 질이 떨어진다는 둥, 그 아이 엄마는 왜 자기 아이가 발달장애라는 것을 모르냐는 둥, 아이가 장애가 있으면 특수학교를 보내던지, 활동보조 선생을 붙여서 따로 케어를 하라는 둥.

옆에서 듣고 있는데 뭐라고 한 마디 하기도 전에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잠자코 이야기가 마무리가 되기를 기다렸다.

그 엄마에게 직접 이야기하지 않고, 옆에 앉아있던 다른 엄마에게 크게 이야기를 했다.


" 저도 장애아이를 키우는 입장이라, 그 아이 엄마도 자기 아이가 발달지연인지, 아니면 발달장애인지 모르지 않을 거예요. 아니, 그 엄마도 분명히 알아요. 당장 받아들이기 힘들어서 그렇지 그 엄마도 알 거예요. 그저 더 늦기 전에 일반 유치원에서 다른 아이들과 평범하게 지내게 해주고 싶은 엄마의 마지막 바람일 거예요. 장애가 어디 떠벌리며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그게 부끄러워하고 남들에게 죄송할 일은 아니잖아요."



이 말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이의 예상치 못한 돌발행동들이 다른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불편하게 할 수도 있어 늘 저자세로 죄송합니다를 달고 살아야 하는데, 단지 불편하게 했다는 이유로 장애인들을 어떤 특수한 영역으로 몰아간다면, 머지않아 이 세계가 반반으로 나뉘게 될 것이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구역으로.


우리 아이도 장애라는 특수영역에서, 한 달에 한 번~두 번 정도 유치원에 등원하여 통합반 수업을 받는다. 다른 아이들이 의자에 앉아서 활동하거나, 자유놀이를 할 때, 선생님과 함께 그 공간에 함께 있어보는 것만으로도 우리 아이게는 큰 도전이고 경험이다. 혹여 우리 아이가 통합반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해할 학부모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그들의 경험 영역의 한계일 테니 그것까지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그러나 가끔 들려오는 말들이 때로는 나를, 또 장애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에게 비수가 되어 꽂힌다.

그럴 때마다 독한 말로, 너도 한 번 당해봐라..  못되게 말해주고 싶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소용 있을까.

얼마 전에 본 독립영화 '그녀에게'에서 마지막에 나왔던 말을 그들에게 전하고 싶다.

영화 '그녀에게'


이 글을 읽는 독자님들에게 장애는 어떤 범주에, 어떤 색깔로 지정된 단어인가요?


장애는 불편하지만 부끄럽지는 않다는 부분에 밑줄 한 번 넣어서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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