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울 대한민국 부역 서사-
숲이 반제국주의 통일전선 주축이다86
경복궁(청와대)은 흉지인가?
다음 주간 읽을 책을 사기 위해 일정 들머리에 광화문 교보를 놓는다. 무슨 책을 읽는다는 계획은 세우지 않는다. 늘 하던 대로 과학 신간에서 출발한다. 더는 읽을 책이 없지만 혹시 놓친 책이 있나 싶어 식물 분야로 간다. 이어서 인문 신간으로 간다. 『그들은 왜 주술에 빠졌나?』가 눈길을 끈다. 저자 김두규가 기억 속에 있다. 사육신 묘역 걷고 글 쓸 때, 그가 쓴 글을 인용했기 때문이다. 풍수가가 주술 이야기를 한다? 호기심에 책을 집어 든다. 재빨리 일별하는데 두 가지 주장이 마음을 붙잡는다. “도선은 실존 인물이 아니다.” “풍수는 비보(裨補)와 다르다.” 경복궁(청와대)은 흉지인가, 기어이 이런 말이 튀어나온다. 책 읽기 전에 내 몸 느낌 먼저 살펴야겠다. 그래. 오늘은 경복궁 걷기다.
경복궁은 조선 정궁(법궁)이다. 건국 직후부터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 긴 세월에 걸쳐 증축되어 5,000칸에 이르렀다. 고종 때 중건한 경복궁은 7,500칸이나 되는 거대한 건물군이었다. 대한제국 말부터 조금씩 훼손되었고, 일제강점기에 들어 총독부가 악의로 철거·매각하거나 다른 건물을 신축하면서 대부분 파괴됐다. 심지어 해방 후 대한민국 정부조차 파괴를 계속했다. 복원 사업 직전에는 본디 규모 7%만 남은 상태였다. 본디 모습은 영원히 되찾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식민지와 부역 허울 국가를 거치면서 처참하게 능멸당한 600년 역사를 1990년대부터 복원해 그나마 오늘 모습을 갖추었다. 광대함과 육중함을 빼앗겼으나, 600년 기억 소환에 오늘 우리 경복궁은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밀교 주술이 젖줄인 비보에 경도된 고려와 달리 조선은 유학(성리학)이 인정한 객관 풍수에 근거해 도읍을 정하고 궁궐을 세웠다. 그렇게 정해진 경복궁 땅이 흉하다는 주장은 당연히 풍수 아닌 비보 전승에 속했던 최양선이라는 사람에게서 비롯했다. 논파 당한 이후 조선이 멸망하기 전까지 재등장한 적도 없다. 현대에 들어와 이병주, 최창조, 특히 유홍준이 거론하면서 정치판을 크게 한 번 뒤흔들었다. 급기야 명태균 비보 주술에 걸린 김명신이가 경복궁(청와대)을 버리고 천문학 규모 세금을 때려 부으며 진짜 흉지인 가짜 용산, 그러니까 정말 죽을 자리로 기어들어 갔다. 이런 내용을 전한 풍수 전문가 김두규 저자는 그 책 맺음말 제목을 이와 같이 붙여 놓았다: 주술로 흥한 자, 주술로 망한다.
나는 비보는커녕 풍수도 알지 못한다. 풍수 이론에 따라 경복궁은 길지고 가짜 용산은 흉지다, 이런 이야기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주술로서 비보야 언급할 필요도 없지만 주술을 배격한 객관 풍수가 과학을 진리로 믿는 시대에 과연 무엇일까, 생각할 필요는 분명히 있다고 본다. 김두규와 달리 나는 주술을 둘로 나눈다. 인류학 수준 주술은 개인 이득을 위해 가짜 인과 법칙을 동원하는 속임수다. “범주 인류학” 차원 주술은 공동체 안녕을 위해 인과 법칙을 관통하는 네트워킹이다. “범주 인류학” 차원 주술은 기존 주술 개념을 깨뜨리고 새로운 차원을 획득한 인식·실천 패러다임이다. 이런 차원 풍수 패러다임도 일급 지성계 담론으로 올릴 수 있는 적기가 지금이 아닐까.
경복궁을 걸으며 나는 엄연한 사실 하나 들어 길지라는 내 판단을 확정한다. 인류 역사상 한 왕조가 500년 넘게 이어진 예가 조선 말고 얼마나 더 있는가. 명목상은 더러 있을 테지만 실질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나라 도읍과 궁궐을 흉지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런 한양과 경복궁을 풍수가 찾아냈다면, 비과학이며 심지어 미신이라 규정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풍수란 무엇인가. 필경 이런 답이 돌아오리라: 조선이 500년 견딘 힘과 도읍·궁궐 사이에는 인과 관계가 없다. 나는 버트런드 러셀이 한 이 말로 되돌려준다: 모든 (상호) 관계 중 인과 관계는 20% 미만이다. 오래도록 경복궁에 머무르며 거의 모든 경계와 내부를 돌아본다. 몸 느낌에 유념한다. 600년 긴 숨을 쉰다.
오늘따라 봄바람이 무겁고 사납다. 그 바람 속에서 허리·다리가 아플 만큼 걸었으나 몸 전체는 가볍고 잔잔하다. 비보가 뭐라든 풍수가 뭐라든, 내 몸은 백악산과 경복궁을 거룩해하며 즐거워한다. 식민 저주를 관통해 세운 새 나라가 한양을 다시 도읍으로 삼아서 여기까지 왔고, 그 속에 내가 태어나 살아왔으니, 여기가 길지 맞다. 죽은 자 기운 받아 영구 집권하겠다며 천공이 올라탄 왜놈 주술 따라 가짜 용산 공동묘지 터로 들어간 연놈들 멱 따려고 이 앞에 앉아 단식하며 농성하는 의인들이 있으니, 여기가 길지 맞다. 광화문 들어올 때 듬성듬성하던 자리가 응원하는 사람들로 꽉 차 있으니, 여기가 길지 맞다. 여전히 바람은 무겁고 사납지만 봄은 봄이다. 내가 이 봄을 어찌 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