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 죽음(잃어버린 빛)
겨울 방학 동안 화술학원까지 다니며 혹독한 훈련을 했던 나는 새로운 삶을 살리라 다짐했다. 새벽에 일어나는 즐거움, 언제 어디서든 훈련하겠다는 마음가짐, 더 이상은 두려울 게 없다는 자신감으로 열심히 훈련하고 실천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화술학원에서 알게 된 형, 누나들이 알려준, ‘나는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고 당당하게 살아가기로 했다.
드디어 겨울 방학이 끝나고 개학날이 되어 전산실을 찾았다. 전산부 친구들은 나의 변화된 모습을 보고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선배들 역시 서클 회원들이 모여서 회의를 할 때면 나에게 대답할 기회를 더 주기도 했다. 이젠 재발 없이 내 마음껏 감정을 표현하면서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특히 동기 장(長) 창호는 내가 계속적으로 용기를 낼 수 있도록 곁에서 나를 살뜰히 챙기고 신경 써주었다. 창호는 1학년 동기들을 대표하는 부장이다. 그는 나를 처음부터 다른 친구들과 똑같이 대했고, 우리 집 가정형편이 어렵다는 것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챘다. 그래서 아침에 신문 배달을 하느라 서클 회의에 늦어도 적극적으로 나를 감싸고 도와주었다. 그 덕분에 나는 사회불안증 재발에서 벗어나 조금씩 학교생활에 적응하고 있었다.
2월의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어느 날, 전산부 서클 친구에게서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나에게 천군만마와도 같던 창호가 오토바이를 타고 신문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것이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아니다. 아닐 거다. 내 두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나는 그럴 리가 없다고 소리쳤다. 그길로 창호가 있다는 장례식장으로 미친 듯이 달려갔다. 그러곤 내 두 눈으로 확인했다. 빈소에 쓰여 있는 그의 이름 석 자를….
창호야, 네가 부러웠어. 너의 커뮤니케이션 능력, 밝은 미소, 사람을 이끄는 리더십…. 나는 정말 너의 많은 것을 배우고 싶었어. 너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자 동경의 대상이었어. 그런 너를 친구로 둘 수 있어서 나는 참 행운이었어. 네 덕분에 나는 많이 웃고 용기 낼 수 있었어. 그래서 너에게 나의 변화된 모습을 오랫동안 보여 주고 싶었는데…. 네 곁에서 나도 너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이제 내가 갚을 차례인데… 넌 어디 있는 거니. 내가 너를 이토록 애타게 찾고 있는데… 대체 어딜 간 거야.
그 후로 나는 슬픈 감정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하루, 일주일, 한 달… 2학년이 시작되어서도 여전히 그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전산실에 가면 창호가 늘 웃으며 나를 맞이해 주었는데, 전산실에 가도 창호가 없자 더 이상 가고 싶지 않아졌다. 만사가 귀찮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우울증에 빠졌다.
선배들은 나를 호출하여 주의를 주었다. 단체생활에 임하지 않을 거면 탈퇴하라고 압박을 주기도 했다. 동기들과도 마찰이 고조되었다. 제발 예전의 남호로 돌아오라고 눈물로 호소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말 한마디조차 내뱉지 못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전산부 서클을 탈퇴할 용기도 없었다. 나도 나를 어쩌지 못했다.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나의 트라우마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한 적이 없다. 이 일로 인해 친누나들과의 약속도 지키지 못했다. 하지만 여전히 내 가슴속에서는 변화의 욕구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으로 너무 슬픈데, 내 자신은 여전히 변화하길 바란다고? 내 모습이 가식적으로 느껴져서 괴로웠다. 그래서 더욱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반년의 시간이 지나 가을이 왔다. 무기력한 나는 내 방에 앉아 노만 빈센트의 《적극적 사고방식》을 읽고 있었다.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러다가 나도 모르는 새에 자기최면의 지문을 습관처럼 소리 내어 읽었다. 갑자기 가슴이 요동치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운명이 너무 야속하게 느껴져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운명아! 너는 도대체 뭐야! 대체 네가 뭔데 나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내가 그토록이나 노력했는데, 내가 그렇게나 간절히 원하는데! 대체 왜 자꾸 나를 막아서는 거야! 너라는 존재는 정말 못됐구나! 운명아! 이젠 내 곁에서 떠나라. 나는 너를 가만두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