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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Jul 21. 2023

4. 첫 번째 봄(下)

우리가 대학로에서 처음 밥을 먹었던 날을 떠올린다.

 우리가 대학로에서 처음 밥을 먹었던 날을 떠올린다. 그때의 나와 쌤은 한껏 긴장하고 있었고, 말 한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내뱉으며 지극히 계산된 제스처를 취했다. 그러나 시간은 흘렀고, 옷은 점점 짧아지며 해는 길어졌다. 우리는 그때와는 다른 가게에 자리를 잡고 아침 댓바람부터 콩나물국밥을 먹고 있다. 하지만 전화와 달리 우리는 모두 말이 없다. 단지 종종 사라지는 콩나물무침과 겉절이가 묵묵히 우리의 당혹감을 받아내고 있을 뿐이다.
  “전화를 왜 하냐? 무슨 말 했는지는 기억해?”
  쌤은 정적을 깨고 싶었다는 듯 홀로 입꼬리를 실실 올리고 있다. 이 긴장은 필요한 긴장이었을까, 아니면 형식상의 긴장이었을까. 나는 쌤의 시선을 피한 채 애꿎은 콩나물국밥만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은 기억나요. 전화를 걸고, 보라색 이야기를 했던 것 같고……. 울지는 않았어요. 그냥 질문 몇 가지를 했어요.”
  쌤이 웃는다.
  “무슨 질문”
  나는 애꿎은 콩나물을 숟가락으로 가볍게 내리친다.
  “기억 안 나요.”
  그 순간 쌤이 피식 웃었다. 이 순간에도 웃는 쌤을 보니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나 난 그만큼 심술이 나 있었기 때문에 괜히 입을 다물었다.
  “그래, 말해줄게. 첫 번째 질문은 ‘왜 물병 청소 솔을 사비로, 그것도 제가 좋아하는 색으로 샀다고 말씀하셨어요?’, 두 번째 질문은 ‘왜 학원의 모든 사람과 연락을 끊었으면서 저와는 만나시는 이유가 뭐예요?’, 세 번째 질문은…….”
  그러더니 쌤은 최대한 웃음을 숨기고 미소를 띤 채 나의 얼굴을 쳐다봤다.
  “지금 너를 존중하기 때문에 최대한 웃음을 지우는 거야. ‘쌤 저 좋아하세요?’가 세 번째 질문이었어. 잠깐 혼자 있을 시간을 줄까? 화장실 다녀올게.”
  쌤이 의자에서 일어난 순간 나는 돌덩이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하니 식탁 위 반찬을 쳐다보고 있었다. 반찬의 가짓수도, 맛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지금, 나는 쌤이 말한 세 가지 질문을 곱씹어보았다. 정신이 없던 과거의 난 무의식 속의 질문을 쌤에게 꺼냈다. 물론 반응을 보아하니 쌤은 충격보다 웃음이 앞선 것 같았다. 차라리 다행이었다. 내가 가장 걱정하던 부분은 좋아하고 말고의 부끄러움이 아니었다. 나는 선생님이 내게 주는 사랑의 모양을 고작 하나의 모양으로 단정 지은 것만 같아 죄책감이 들었다. 물론 사랑의 모양에 순위를 매길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는 거대한 사랑을 단순한 말로 요약하려 드는 행위는 실례가 된다. 나는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무의식 속에는 아직도 지우지 못한 첫사랑의 흔적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것을 보아 나는 아직도 내면의 갈등을 해결하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쌤이 나를 굳이 아침에 불러낸 이유는 이 양가적인 감정을 인식시키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고작 좋아하니 마니 하며 내뱉는 말다툼이 아니라 감정을 인정하고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지우는 연습을 위해 나를 불러낸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내게 주어진 혼자의 시간 동안 충실히 나의 감정을 인식했다. 나는 감정을 손으로 만져 다룰 수 있다면 첫사랑의 감정을 없애기 전 존경과 첫사랑의 감정을 저울에 달아보고 싶었다. 나는 지금 어떤 감정을 우선순위로 쌤을 대하고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나는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나의 내면이 죽도록 원망스러웠다.
  “이제 괜찮아?”
  쌤은 어느새 자리로 돌아와 다 식은 콩나물국밥을 휘젓고 있다. 우선 나는 쌤에게 던져야 할 질문이 두 가지 있다.
  “첫 번째 질문이요. 쌤은 그 전화를 받고 괜찮으셨나요?”
  “음……. 아무래도 새벽에 온 전화니까 처음에는 좀 당황스러웠어. 혹시라도 네가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혼자 추측은 해봤지만 진짜일지는 몰랐거든.
  쌤은 말을 꺼내는 동시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콩나물국밥을 마구 휘젓는 태도는 어느새 내게 엉겨 붙었다. 나는 먹지도 않을 밥을 천천히 휘저으며 두 번째 질문을 던졌다.
  ”저를 이 아침에 불러낸 건 제 감정을 인식시키기 위해서인가요?“
  ”예를 들면?“
  ”존경의 감정과 사랑의 감정이라든지.“
  쌤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본다. 어떤 관계에서 나는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권위 아래에 있다. 나는 어른이라는 사람 앞에서 묵묵히 나의 패를 보인다. 상대는 금방이라도 딜러가 된 것처럼 나의 카드를 세어 숫자를 합한다. 어떤 사람은 숫자를 합산하여 이십 일을 넘길 분위기를 형성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충분히 숙고할 기회를 주고 HIT or STAND를 외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는 이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인가. 아니, 애초에 사람이 두 갈래로 나뉠 수가 있던가. 하지만 굳이 선택하자면 아마도 눈앞의 이 사람은 내게 숙고할 기회를 주는 사람일 것이다. 나는 쌤이 생각을 이어가는 동안 홀로 부정확한 결론을 내린다. 그러니까 이 결론은 블랙잭과 같은 하나의 도박인 것이다. 인간관계에 거는 도박. 나이 차를 뛰어넘었다는 이 신기한 관계와 우정을 빌미로 이어 나가는 독단적인 나의 감정, 그리고 딜러의 패와 같은 쌤의 심정. 나는 어른이라는 저 사람의 인간성에 대해 갑자기 도박을 시작한 것이다.
  ”그걸 인식하길 바란 것도 맞고, 가능한 네가 연애 감정은 버리길 바란 것도 맞고.“
  나는 쌤의 패를 모른다. 저 사람의 패를 모르기 때문에 이 관계를 지속시키고 싶은 나는 두 번째 답변을 믿어야 한다.
  ”만약 내 심정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직접 선생님의 위치에 가보는 건 어때?“
  갑작스러운 해장을 위해 뚝배기에 나온 콩나물국밥은 이미 식은 지 오래다. 쓸쓸한 밥과 반찬은 이미 뒷전이다. 나는 쌤의 말을 재차 곱씹었다.
  ”생각해 볼게요.“
  아마도 지금은 가방을 정리하고 일어설 때다. 쌤도 슬슬 가방을 정리한다. 내 밥값만을 계산하고 가게 문을 나선 나는 여전히 미심쩍다. 삐걱삐걱 발걸음을 옮기는 나는 어쩌다가 아침에 국밥집에 자리하게 됐는지 상황을 돌이켜본다.
  아무튼 시작은 나의 지대한 실수에서 기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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