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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Aug 08. 2022

3. 첫 번째 봄(上)

방은 징그럽게 어지러웠다.


  방은 징그럽게 어지러웠다. 눈이 따갑게 저며오는 오전 여섯 시의 햇빛은 멀미 나게 눈부셨다. 통제되지 않은 지난 밤의 흔적은 대충 옆으로 치워둔 접이식 책상 위에 늘어져 있었다. 다행히 창문은 열어둔 채 잠든 탓인지 방에서는 상쾌한 아침 냄새만 줄기차게 흘렀다.
  나는 무얼 위해 이렇게까지 증류된 액체를 들이켜고 있었던 것일까? 일렁이는 위액에 찬물을 들이붓는 일은 내 일상을 영위하기 위한 최소의 몸부림이다. 그렇다면, 어젯밤의 나는 최소한의 일상을 영위하지 못할 정도로 다음날의 나를 혹사하고 싶었던 걸까? 결국 나는 나를 증류시키려 애썼단 말인가. 무심코 기억을 더듬었다. 어제의 내가 과거의 장면과 생각만을 떠올리며 간신히 잠에 들었던가? 그게 아니라면 나를 증류시키다 못해 체면까지 증류시킨 게 아니었을까? 다급히 휴대폰을 꺼내 든다. 다른 한 손에는 들이켜다 말은 찬물이 덩그러니 쥐여있다. 최근 전화 기록, 전화 기록을 찾아야 한다. 혹시라도 밤중에 자다 일어나 쌤에게 전화를 걸지는 않았을지 그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부재중 전화 한 통. 그 이전에 쌓인 두 통의 발신 전화. 물론 발신은 내 쪽에서 건 발신이다.
  자, 이제 절망하자. 지난밤의 나는 생각을 꺼내다 못해 내 체면까지 꺼내어 화형식을 치렀다. 내가 건 최초의 전화는 새벽 세 시에 발신됐다. 그러나 새벽 세 시는 한밤중이고, 대다수가 잠에 든 야심한 시각이기 때문에 쌤도 나의 전화를 받지는 못했다. 이성을 잃고 체면을 몰랐던 나는 그렇게 두 번째 시도를 한다. 나는 새벽 세 시 오 분, 두 번째 전화를 건다. 아마도 첫 번째 전화와 두 번째 전화 사이에 몇 분간의 틈이 있는 것을 보니 새벽의 나는 아주 양심적이게도 일말의 고민은 해본 것이 틀림없다. 그런 고민 끝에 걸린 두 번째 전화는 결국 수신된다. 쌤은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우리는 무려 한 시간 동안 통화를 했다. 그리고는 전화가 끝났다. 다시 곧바로 쌤이 전화를 걸었으나 나는 받지 않은 채 잠들었다. 기억이 흐릿한 간밤에 나는 대형 사고를 친 것이 분명하다.

  오전 여섯 시, 아직 쌤은 일어나지 않았을 시간이다. 오전 여덟 시에 일어나 휴대폰을 가장 먼저 확인하는 쌤은 내가 새벽 세 시에 난리를 쳤어도 꼭 같이 여덟 시에 일어날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남은 두 시간 동안 내가 해야 할 일은 온갖 술로 뒤집어진 나의 속을 달래고, 어제 못다 한 일상을 마무리 짓고, 그동안 간밤에 건 전화에서 무슨 내용을 발설했는지 떠올리는 것이었다. 할 일이 많았다. 아마도 이 일들은 고작 두 시간 이내에 완결될 일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인간은 데드라인 앞에서 항상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되고, 그럴 때면 나는 떠오르는 장면에 기겁하며 홀로 악을 쓰게 되는 것이다.
  시작은 밀린 설거지를 하기 위해 꾸물거릴 때였다. 난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물통을 닦으려 텀블러 전용 설거지 솔을 꺼내 들었다. 자취방의 텀블러 솔은 이른 아침에도 멍청하게 바래있다. 흰색의 텀블러 솔은 햇빛에 바래도 흰색인데, 어디선가 자꾸만 내가 보라색 솔을 찾으며 낑낑댔던 기억이 떠오른다. 보라색 솔은 색깔로 기억에 남은 과거의 잔재다. 내 자취방에 없는 보라색 솔은 학원에서 쌤이 학생들을 위해 사비로 사 왔던 우리 반 전용 설거지 솔이었다. 쌤은 언젠가 내게 그런 말을 했다. 네가 보라색 좋아하길래. 결국 기억 속의 나는 웅얼대는 말을 쌤에게 쏟아낸다. 나는 장면 몇 개를 나열한다. 결국 나는 결론 짓는다.
  그러니까 쌤, 왜 그랬어요.
  쌤은 대답한다.
  반은 맞고 반은 틀렸어. 네가 반타작을 하다니 웬일이야. 이렇게 술 취해서 전화 건 것도 내 예상을 완전히 깬 시작이고. 범생이 이제 벗어나기로 한 건가?
  나의 손에 힘이 풀리면서 스테인리스 싱크대 속으로 물병과 솔이 추락한다. 물통이 통통 튀고 덜컹대는 소리는 아침 여섯 시를 메우기에 제법 큰 소리다. 아마도 나는 그 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었던 것 같다. 찬물이 속을 깨우고 미세하게 이어지는 기억들이 싱크대에 떨어진 물통과 솔을 방치한다. 언젠가 휴대폰에 쌤의 전화가 걸려 왔었다. 그 순간 나는 보리 맛이 일품인 편의점 산 맥주를 들이켜고 휴대폰을 내려놓았다. 끝이었다. 이 이상 이어질 기억은 없었다. 나는 시계가 일곱 시를 달려가는 와중에 다급히 문자를 보냈다. 쌤,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저희 잠깐 만날까요? 어제 일에 대해 해명하겠습니다. 나는 문자를 보내며 아이러니한 상황에 웃는다. 학원에서의 쌤은 내가 술에 취해 전 남자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일 따위는 하지도 않을 학생인 것 같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오늘의 충격은 우스갯소리로 넘겼던 말들이 거꾸로 뒤집혀 돌아온 결과다.
  나는 겨우 물통과 솔을 추스르고 차가운 수돗물을 틀어둔 채 생각을 다듬는다. 사람은 이성을 잃고 감정만이 속에 가득찰 때, 진정으로 보고 싶었던 사람을 찾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감정은 성애적 감정인가? 하지만 나는 쌤에 대한 사랑을 존경이라고 이미 정의했는데 마음속에서 알 수 없이 꿈틀대는 이 느낌은 흡사 내가 쌤을 연애 대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지 질문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랑은 정상적이지 못한 사랑이었던 것일까? 아니 애초에, 이 감정은 일방적인 나의 감정이라고 해도 쌤은, 쌤은 도대체 어떤 감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내가 선반에 머리를 톡톡 치며 찬물에 정념을 씻기고 있을 때, 간만에 소리로 켜둔 휴대폰에서 알림이 울리는 소리가 났다.
  익숙지 않은 소리는 사람의 반응속도를 늦추고 영원할 것 같던 일상은 순식간에 깨져 사건이 된다. 알림은 계속되었고 휴대폰은 몸을 부르르 떨며 노래를 불렀다. 나는 또렷한 정신으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며 부드러운 발걸음으로 걸었다. 그렇지, 이건 유예일지도 모른다. 아주 살포시, 그것도 천천히 걷는 이 걸음은 진심을 담아 툭 튀어나오는 목소리들을 막기 위한 유예일지도 몰랐다. 나는 전화를 빨리 받아야 한다는 마음 반, 차라리 전화가 끊기고 몇 자 되지 않는 텍스트가 날아왔으면 좋겠다는 마음 반으로 마룻바닥의 금을 하나하나 밟는다. 어리석은 선택은 시간을 길게 늘어뜨리고 소리는 지나치게 낮아진다. 그러나 탁자 위의 휴대폰은 여전히 몸을 떨며 왕왕 울어대고 있고 발은 어느덧 똑바로 선 나무 탁자에 닿았다. 결국 나는 얼른 휴대폰을 집어 들어 초록색 수신 버튼을 누른다.
  “…….”
  나는 방금까지만 해도 시간을 늘리려 악을 썼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피곤함에 절은 목소리로 전화를 건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쌤이 먼저 소리내기 전까지 조용히 휴대폰을 붙잡은 채 탁자 다리를 엄지발가락으로 꾸욱 눌렀다. 일 초, 이 초, 발가락은 타들어 가는 나의 심정을 대변하듯 천천히 접혔고 심지어 탁자 다리와 접목된 부분은 피가 통하지 않는지 하얗게 짓눌렸다. 나는 하얗게 부서져 내릴 것만 같은 발가락을 쳐다보며 쌤도 나처럼 하얗게 질려있을지, 아니면 질려있는 대상이 사건이 아니라 나일지 곰곰이 생각했다. 자기자신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사실이 아닌 감정이었으며, 내가 생각하고 고민하는 말들은 사실을 둘러싼 감정이 대다수였다.
  “오후에 너네 지역에서 미팅이 있어. 업무 관련 미팅이야. 넌 내가 처자식 없는 사람이라 다행인 줄 알아. 혼내려던 건 아니지만 야밤에 그런 전화는 오해받기 십상인 거 알지?”
  나는 여전히 발가락을 짓누른 채 조용히 쌤의 말을 마음에 받아적었다. 정말이지 이 상황은 악재였지만 한편으로는 운이 따른 인재이기도 했다.
  “밤새운 거야, 일어난 거야? 난 일찍 깼어.”
  “일찍 깼어요…….”
  쌤은 말이 없다. 나는 곰곰이 전화기 너머의 얕은 숨소리를 쪼개보았다. 아마도 내가 타인의 숨소리를 함부로 분석하듯 쌤도 나의 숨소리를 마구 쪼개 관찰하고 있을 것이었다. 우리의 감사한 선생님은 제자가 정말 일찍 깼는지, 그게 아니라면 걱정이 많은 선생님을 안심시켜 내뱉는 거짓말인지 말투를 곱씹고 계신다. 그런 의도가 아니라면 이 아침부터 겨우 이어가는 전화가 이렇게 어색한 침묵을 바탕으로 전개될 리 없다.
  “목소리가 가라앉은 거 보니 잠을 자긴 잤나 보네. 세 시에 미팅이라서 조금 뒤에 씻고 출발하려고 해. 아침으로 너 좋아하는 콩나물국밥이나 먹자. 아홉 시 반에 늘 보던 곳에서. 나올래?”
  만약 내 눈앞에 쌤이 있었다면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쌤을 바라봤을 것이다. 그러나 쌤은 내 눈앞에 존재하지 않으며 목소리로만 존재한다. 나는 최대한 숙고의 목소리로 긍정의 표시를 보였다. 짧은 긍정은 늘 그렇듯이 무기이자 방패가 되곤 한다. 오늘도 한 글자의 대답은 간신히 나의 의사를 전달해주었다.
  쌤과의 약속 장소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단 한 곳의 장소다. 처음으로 쌤과 학원 바깥에서 만나 지금처럼 간신히 긍정의 대답을 보인 곳. 별별 사람이 다 모이고 지나다니는 대학로의 지하철 역사 앞에서 우리는 만날 것이었다. 대학로의 첫 만남 이후로 우리는 자주 만나 산책을 즐겼고, 종종 대학로의 맛집을 탐방하기도 했다. 이따금 우리는 기회가 되면 서울 외곽 지역까지 놀러 나갔다가, 돌아올 때는 항상 서점의 문학 코너를 들렸다. 그러니 지금은 오래된 우리의 유희가 콩나물국밥과 해장으로 연장된 것이었다.
  아침부터 묘한 규칙이 존재하는 약속이 잡혔으므로 나는 사용 가능한 시간을 계산했다. 자취방에서 혜화역까지는 십 분 거리다. 그러나 쌤이 오기 편한 곳으로 출구를 정할 것이기 때문에 십오 분은 일찍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늘 그렇듯이 먼저 도착한 사람이 출구의 번호를 골라서 보내고 다른 한 사람이 연이어 도착하는 것으로 약속을 시작할 것이다. 아마도 이번에는 내가 먼저 문자를 보내는 사람이 될 것 같았다. 그렇다면 당연히 먼저 준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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