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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Jul 21. 2023

2. 첫 번째 겨울(下)

그렇다면 이제는 쌤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그렇다면 이제는 쌤이 아닌 나의 이야기를 할 차례다. 나는 애초에 학원의 정의를 삐뚤빼뚤하게 내렸다. 내게 학원은 공부하러 가는 곳이지, 사람을 사귀러 가는 곳이 아니었다. 덕분에 재수를 시작하자마자 모든 인간관계를 끊어버린 난, 사람을 대할 때만 최소한의 예의를 덧붙였으며, 대답은 가능한 짧게 발음했다. 내게 있어 일 년간 대화는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발음하는 것이었다. 난 최적의 발음 방법을 찾고 최소한의 에너지로 사람을 대해야지만 학원에서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아주 이기적이고도 고집불통인 방식이었다.
  그런 학원 생활 중 가장 많은 말을 했던 시간은 다름 아닌 상담 시간이었다. 첫 상담을 앞둔 어느 날, 다른 학생들은 못해도 사십 분에서 한 시간씩 상담을 하고 돌아왔지만 나는 달랐다. 나는 정확히 필요한 말만 애써 발음하며 십오 분의 상담을 끝마쳤다. 특이사항이나 필요한 말들은 쌤이 이전에 나눠준 유인물에 옮겨적었고, 덕분에 나는 상담 시간 동안 앞으로의 공부 계획을 세우는 방법에 대해서만 들은 뒤 자리로 돌아왔다. 다른 학생들과 나는 쌤을 반대로 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실패작이 된 날, 내게 있어 쌤은 의지할 대상이 아닌 부가가치 따위의 대상이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었다. 다른 학생들은 아니었다. 부모님보다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는 쌤은 열아홉 명의 학생에게 부모의 역할을 자처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쌤의 맞춤형 인간관계가 드러나기 전까지의 이야기였다. 덕분에 날이 갈수록 줄어드는 다른 학생들의 상담 시간과 내 상담 시간은 정확히 반비례 관계였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를 아껴 번 시간을 쌤에게 사용하면서 쌤과 나의 대화는 점점 깊어졌고, 어느 순간 우리는 이 차가운 학원의 밑바닥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쌤의 주장은 이랬다. 온갖 결여와 거짓, 그리고 자기합리화가 난무하는 재수학원이 바로 ‘실패작’들이 모인 곳이라는 말이었다. 실패로 인해 금이 간 학생들은 자기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하며 대개 하급반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다는 것, 정말 진실한 이야기는 오로지 자기 스스로와의 대화이며 타인에게 보이는 대화는 모두 결여로 가득 찬 자기변호일 뿐이라는 것. 그러니 우리는 실패작으로 자신을 정의하며 변명만을 늘어놓는 비겁한 사람들이라고 쌤은 줄곧 내게 말했었다.
  항상 상담을 하면 그랬다.
  “쌤, 이상하게 이곳은 미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요”
  “그래? 어느 면에서?”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폐쇄적인 공간, 성장과 경쟁을 동의어로 보게 된 우리, 그리고 패배감…….
  “낙오되었다는 점에서요.”
  쌤은 웃었다. 그러더니 저번 시간에 끊긴―상담을 하다 쉬는 시간 종이 쳐버렸기 때문이었다―주장을 이어 말하기 시작했다.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비겁한 사람들, 결여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사람들, 그러니 학원은 실패작으로 가득 찬 오물 덩어리였다. 물론 그중에서도 결여를 인정하고 진실하게 나아가는 사람들은 분명 있었으나 그들은 소수였다. 결국 ‘실패작’에서 벗어나기까지 자기변호를 멈추는 사람은 드물다는 것이 쌤의 주장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다음, 쌤은 내게 하나의 증언을 더 했다. 쌤도, 자기변명과 변호에서 벗어나지 못한 실패작이라는 사실이었다. 쌤은 학원이 아주 잠시 머무는 곳이며, 원래의 본업은 따로 있다고 했다. 나는 그 순간 쌤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쌤과 했던 발음 놀이가 아니라 쌤의 이야기를 대화를 통해 처음 들었던 것이다.
  실패작 이야기를 시작으로 나는 쌤과 여러 잡다한 이야기를 나눴다. 쌤은 학생들에 따라 성격을 바꾸고 말투를 바꾸는 조금 특이한 사람이었지만, 여느 사람과 다를 것 없이 취미와 기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쌤은 어느 상담 시간에 문학을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특히 소설을 좋아하며 주로 찾는 장르는 로맨스라고까지 덧붙였다. 쌤의 행동에 소름이 돋는다던 학생들의 평가와 다르게 나는 그날 이후로 쌤을 ‘홀로 낭만에 빠진 사람’이라고 정의했다.

  어느 날은 쌤이 내게 와 말했다. 한창 우리의 문학 이야기가 진행되던 와중이었다. 우리는 모두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이라며, 지금은 지도도 없이 길을 막무가내로 찾아가는 중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나도 길을 잃었다며 대답했다. 동지를 만난 것 같았다. 그건 정말 깜깜한 어둠에서 길을 찾은 것과 같았다.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다는 건 너무 전형적인 이야기지만, 그 순간 내게 쌤은 빛이었다.

  어떤 존경은 봄날의 봄바람처럼 한순간에 불어오곤 한다. 그래서 어린 날의 존경은 쉽다. 쉽게 사람을 동경하고, 단면으로도 어른을 존경할 수 있다. 특히나 내가 홀로 고립된 환경에서는 모든 존경이 쉬워진다. 고작 빛을 찾은 기분 아래서 꼭 내가 누군가를 존경하는 일이 어른이 된 것만 같아 괜시리 설렐 때, 내가 누군가의 가치관을 인정하고 좇는 일이 왠지 존중이라는 미덕의 선두 주자가 된 것만 같을 때, 그런 어린 날의 존경과 이상은 한순간의 봄바람처럼 따뜻하게 불어온다. 덕분이었을까, 이미 사람들과의 발음 놀이에 지쳐있던 나는 고립된 환경에서 한순간의 봄바람을 맛봤다. 사람이 왜 사회적 동물인지도 깨달았다. 복잡한 깨달음이었다.

  수능이 점점 가까워질 무렵, 쌤은 내게 책을 선물했다. 이별을 앞두고 내게 건넨 선물이었다. 쌤이 가장 힘들 때 읽었던 책이라면서, 책 앞장에 붙어있던 포스트잇과 함께 내 책상 위에 책을 올려두고 사라진 쌤은 하필 그날 휴가를 썼다. 나는 재수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진실한 미소를 지었다. 사람 때문에 짓는 이 웃음은 그다지 헛된 것 같지 않았다. 다른 학생들에게 들키지 않으려 문제집으로 책을 가린 나는 포스트잇에 적힌 편지를 천천히 읽었다. 수능이 끝나면 밥을 사줄 테니 번호를 차단하지 말라는 메모가 남겨져 있었다.

  그러니 누군가는 의문을 품는다.
  단순한 호의에도 설명이 필요한 나는 조건 없는 사랑을 거북해했다. 세상 만물이 나를 위해 예비 되었다는 고리타분한 논리는 지겹도록 어색했다. 나는 나의 쓰임을 매번 의심하고 나를 북돋우는 자들에 경의를 표했다.
  생각해 보면 스승의 사랑이라는 것은 한없이 멀게만 느껴진다. 특히나 쌤의 경우가 더더욱 그랬다. 계산해보면 스승과 제자의 나이 차는 최소 열 살,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경우 대개 스물, 많게는 사십까지도 웃돈다. 몇십 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한 사람을 이해한다는 것은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것도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일 년간 진실한 목표를 향해 지내왔던 내게는 쌤과의 관계와 그 이해가 너무나도 벅찼다. 복잡한 관계였다. 특히 나의 감정 때문이었다. 이 감정은 흔한 중고등학교 학생들의 ‘선생님 첫사랑’ 같은 의미일지도 몰랐다.
  그렇듯 제자도 스승을 사랑하곤 한다. 물론 그 마음은 성애적 감정이 아닌, 존경과 감사의 마음으로 보내는 사랑이었다. 그러니 고작 스물이 보내는 존경의 마음은 아주 순수한 것이다. 아주 무모하게 순수한 마음이며 존경의 뜻도 제대로 모른 채 품는 어린 마음이다. 그러므로 무모하고, 아주 어린 마음은 테두리 바깥으로 나아가 밟혀야 한다. 밟히고 깎여 가장 뚜렷한 속 알맹이만 남아야 한다.
  그런 알맹이만 남기 위해서는 우선 내가 쌤을 만나야 했다. 포스트잇에 적혀있던 약속처럼 수능이 끝난 이후에도 난 쌤을 차단하지 않았고, 결국 우리는 대화를 끊지 않은 채 십이월의 겨울날 각자의 개성을 드러낸 차림으로 만났다.
  “앞으로 계속 쌤이라고 불러드려도 될까요? 선생님이라는 말은 오히려 더 어색해요.”
  쌤은 그러라며 조심스럽게 끄덕였다. 결국 학원을 퇴사하고 모든 학부모와 학생들과의 연락을 끊은 쌤은 유일하게 나와의 연락만을 지속했다. 그리고 특이한 우리는 별별 사람이 다 모이는 대학로의 브런치 가게로 첫 나들이를 왔다.
  주변이 보기에 우리는 상당히 불편한 관계였다. 서로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이 모습은 충분히 오해를 살 만했다. 결국 우리는 길을 잃은 나의 재수가 끝나고서야 이 관계를 정의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너랑, 전화도 하고 문자도 하면서 친구처럼 지내고 싶어. 책 이야기하는 친구처럼. 어른이 되면 다들 경제나 주식 책만 잔뜩 읽어대느라 문학은 쳐다보지도 않더라고. 종종 메일로 이야기하면 어때? 답장은 편할 때 하는 걸로.”
  쌤은 그렇게 말했다. 쌤의 발화와 동시에 고즈넉한 대학로의 브런치 가게에 햇빛이 스민다. 다행히 우리는 햇빛이 들지 않는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사람들이 소소하게 오가고 부엌에선 그릇 닦는 소리가 달그락거린다. 우리는 아직 식전 옥수수 수프를 먹고 있다. 수프는 간간하다. 상아색 바다 위에는 종종 옥수수 알갱이도 보인다. 옥수수 알갱이는 바다 위를 떠다니다가 얼마 있지 않아 쨍한 햇빛을 튕겨낸다. 쌤의 세계를 닮은 아름다운 순간에 나는 신을 찾는다. 동시에 반사된 햇볕이 내 눈에 닿지 않기를 기도한다. 혹여 햇빛 때문에 눈을 찡그려 상대방이 나의 의사를 거절로 오해하지 않도록 간절히 바란다. 만약 내 눈꺼풀이 감기더라도 살포시, 아주 보드랍게 감기기를 나는 신에게 기도하며 간절히 소망한다.
  한편 내가 신의 영역에 기도드리는 동안 쌤도 한껏 긴장하고 있었다. 스승과 제자의 성별이 다르다는 사실은 종종 주변인에게 오해로 번지기 일쑤다. 게다가 그런 스승과 제자가 친구만큼 자주 만난다는 사실은 씹히기 딱 좋은 가십거리다. 쌤은 그 순간을 조심하고 있다. 쌤의 동공은 나를 또렷이 응시하지만, 눈가는 살며시 떨린다. 갈색에서 검은색으로 다시 염색한 머리칼은 드문드문 빠졌고 손에는 굳은살과 주름살이 제법 많다. 내가 모르는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는 내가 모르는 시간 속에 살았으며, 나는 그의 모든 면을 이해할 수 없다. 그렇지만 그는 내게 친구가 되자며 이야기한다.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살짝 웃어 보이면서 눈꺼풀은 아래로 내리깐다. 나는 흔들림 없는 그의 동공과 마주칠 자신이 없다. 이건 아마도 무모한, 그것도 아주 대책 없는 뒤틀림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에게 스물의 시간을 넘어 친구가 되자고 약속했다.

  그리고 그날, 나는 홀로 방바닥을 뒹굴었다. 한기가 도는 방구석에서 오묘한 겨울 냄새가 풍겼다. 번뜩 몸을 일으켜 방구석에 가까이 다가갔다. 내딛는 발걸음마다 발바닥이 시렸다. 몸을 일으키자마자 하는 일은 언제나 한 가지였다. 가장 구석진 곳에 곰팡이가 피지 않았는지 확인하는 일이었다. 어쩌면 이 오묘한 겨울 냄새는 곰팡이 내가 아니었을까. 외벽으로 지어진 허름한 원룸은 겨울이 되면 종종 곰팡이가 핀다고 했다.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보증금이 괜찮았기 때문이었다.
  발바닥은 폭신폭신하고 감각조차 없는 밤. 여전히 이불 속은 따뜻하지만, 외벽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가 이불 밖의 폭신한 발을 찔러대는 밤. 최대한 난방이 잘 되는 따뜻한 아랫목에서 자야 입이 돌아가지 않을 텐데 나는 그럴 겨를도, 생각도 없다. 이건 꿈일까? 석양이 지던 하늘은 어느새 칙칙한 먹물이 흩어지고 순식간에 별이 떴다. 어쩌면 저 언덕은 본가가 위치한 언덕 같기도 하다. 언덕 위에는 별이 하나 떠 있다. 먹물은 기억을 잠식하는 속도가 제법 빠르다. 순식간에 평지를 먹고 언덕까지 삼킨 먹물은 나의 본가도 삼켰다. 저 검은 물에 홀로 떠 있는 것은 별 하나뿐이다. 언제부터 먹물이 깨끗한 물에 떨어졌는지 모르겠다. 나는 붓에 검은 꿈을 한 번 찍어 꿈 너머의 현실까지 먹을 칠한다. 제법 흡족하다. 아주 잘 그려진 수묵화다.
  나는 금세 눈을 떴다. 내 두 팔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곧 다리도 사라지고 내 몸뚱이만 원룸에 덜렁 남은 느낌이었다. 온전치 못한 머리는 필사적으로 이성을 되찾으려 눈을 껌벅였다. 스승과 제자의 만남은 종종 오해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나는 아주 짧은 순간의 첫사랑을 잊고 그의 문학 친구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내 마음은 단순한 존경이었고, 이것은 스승에 대한 사랑일 뿐이었다. 이건 아주 비겁한 자기합리화다. 어쩌면 학원에 있을 때부터 이어진 결여의 연장선일지도 모른다. 나는 수십 번을 되뇐다. 사랑은 배워가는 것이며 그 종류는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으리라고. 그리고 나는 학원을 빠져나온 뒤에도 아직 길을 잃은 채 헤매는 중이라고.
  어디선가 머리를 스치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머릿속에 붕붕 떠다니는 목소리를 지운다. 방에 곰팡내인지 겨울 냄새인지 모를 습기가 진동하자 몸을 빠져나가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몇 번을 웃었다. 안팎으로 나를 비웃었다. 한기가 도는 방, 바람이 살결을 베는 이 방은 아주 차가운 수묵화와 같다. 이제는 이기적인 인간관계에서 빠져나와 나름의 밭을 일구어가야 하는 한 여행객은 그저 기억을 지우고, 살리고, 지우고, 살리기를 반복한다. 언젠가 이 감정을 정의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불에 덮인 나는 또다시 어떤 장면을 떠올린다. 난방도 제대로 되지 않아 냉기가 밑도는 교실에는 스무 명의 학생들이 긴장한 채 앉아 있다. 네 줄로 정렬된 아이들은 꼭 바둑판 같다. 바둑판 속 어떤 아이는 제 앞의 책상을 눈으로 쓸고 어떤 아이는 의자를 툭툭 발로 건드린다. 솜털 같은 소음이 교실을 울리는 가운데 단상에는 선생님이 올라서 있다. 선생님은 아이들을 바라본다. 나는 이 장면 속 내가 어느 위치에 있었는지를 되뇐다. 나는 왼쪽 가장자리, 앞에서 두 번째 자리에 발을 딛고 선생님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시험 결과 총평에 잔뜩 긴장한 학생들은 멍하니 선생님을 응시했지만, 곧 쌤은 단상 아래로 내려와 반별 성적표를 살포시 찢어버렸다.
  '퍼포먼스야. 한 장 더 있으니까 놀라지 말고. 모의고사는 정말 이름대로 시험 삼아 보는 거야. 그냥 잊고 미리 말해뒀던 총평이나 들어봐,'
  그 말은 산통을 깨는 한 마디였다. 우리는 의자에 납작하게 달라붙어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쌤이 우리의 첫 모의고사가 끝난 뒤 각종 대형학원의 모의고사 총평을 알려주겠다며 우리를 불러 모았기 때문이었다. 눌어붙은 아이들은 시험 때문에 잔뜩 긴장된 상태에서 눈과 발을 굴려댔고 종종 강아지 깽깽대듯 헛기침 소리도 냈다. 그러나 선생님의 한마디에 또르르 굴러가던 우리의 생각은 토막 나고 말았다.
  '지금 모의고사 총평이 문제가 아니야. 너희가 제출한 플래너 검사가 끝났는데,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어. 난 너희의 언어에 익숙하지 않아. 사람이 각자 쓰는 언어를 내게 설명해줘야 내가 알아들어.'
  예상치 못한 첫 마디에 나는 되려 얼어붙었다. 다른 학생들은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쌤의 말에 팡 웃음을 터뜨리곤 쌤은 어떻게 사람 말도 모르냐며 장난을 퍼부었다. 그러나 나는 아니었다. 언어를 묻는 쌤이 경쟁에 미쳐있는 우리를 하나의 사람으로 대해주는 것 같아 나는 되려 얼어붙었다. 종종 감화된 사람은 말끔히 녹아버린 상태를 아직도 얼어있다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므로 언어에는 기억이 담긴다. 그래서 어떤 언어를 쓸 때면 나는 과거에 잠긴다. 과거는 훌륭한 해결책이자 동시에 나를 옭아매는 쇠사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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