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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원 Aug 08. 2022

5. 첫 번째 여름(上)

냉기가 바닥부터 올라오는 복도는 사뭇 조용하다.


  냉기가 바닥부터 올라오는 복도는 사뭇 조용하다. 센터장이 지나간 뒤로 이곳에 묵직한 발걸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시퍼런 복도를 조심스레 스친다. 급격히 온도가 달라지는 날에는 감기에 걸릴 수 있다. 봄날의 일교차가 그렇듯이.
  “선생님, 여기 이 아이 맡아주시면 돼요.”
  나는 수많은 고민 끝에 길을 잃고 푹신한 발바닥의 밤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쌤의 감정을 이해하기 위해 한 복지센터에 들렀다. 제자가 선생님의 심정을 궁금해한다면, 역지사지로 선생님이 되어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판단 아래서였다.
  그러나 아이들을 돌보는 멘토링 활동은 이미 중고등학생 때 이후로 손을 뗀 지 오래고, 이 더운 여름날 무작정 시작한 멘토링 봉사활동은 덩달아 긴장을 불러왔다. 타인의 무한한 사랑에 의구심을 품는 이유는 사람의 곁에 머무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고, 누군가의 시간에 머문다는 사실이 뜻깊은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의미 있는 순간에 베푸는 한계 없는 사랑을 나는 아직 완벽히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 오후 일곱 시까지 여섯 시간 맡아주시면 됩니다.”
  내게 간단한 안내를 마친 뒤 문을 닫고 복도로 나선 센터장은 묵직한 발걸음으로 사라졌다. 거대한 어른이 사라지자 내 앞에는 고작 예닐곱 살의 여자아이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서로를 낯설어하던 우리는 센터장의 멀어지는 발걸음을 새겨들었다. 소리가 사라져갈 때 즈음 나는 아이에게 이름을 물었다
  “친구는 이름이 어떻게 돼?”
  그 순간 아이의 입이 귀까지 걸렸다. 그리고는 색연필 하나를 꺼내어 종이에 세 글자를 쓰는 동시에 당찬 목소리로 소리를 지른다.
  “안주현!”
  머리를 양 갈래로 땋고, 얼굴은 까무잡잡한 여자아이가 신이 나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나는 속으로 안주현, 안주현, 그 이름을 몇 번이나 반복했다. 혹여라도 ‘안주연’이나 ‘안수현’으로 이름을 잘못 부르는 순간 아이는 참 속상해할 것 같은 느낌이 저 밑바닥에서부터 엄습해왔다. 나는 몇 번이나 속으로 이름을 되뇌며 아이의 모습을 천천히 훑어봤다. 주현이의 연필에는 한글 이름과 베트남어 이름이 나란히 쓰여 있었다. 나는 적어도 베트남어의 생김새는 기억하고 있는 나 자신이 너무나도 감사해 눈으로 베트남어를 골똘히 쳐다보았다. 동시에 신이 나서 방방 뛰던 주현이를 달래 의자에 앉혔다.
  “선생님은요? 쌤은요? 쌤은 이름이 뭐예요?”
  내가 생각에 잠긴 사이, 주현이는 나의 이름을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 나는 주현이의 쾌활함에 덩달아 웃으며 내 이름을 알려준다. 아이는 앉던 자리에서 총알처럼 튀어 나가 칠판에 이름을 쓰기 시작한다. 이름 옆에는 하얀 분필과 분홍 분필을 섞어 그림까지 그린다. 그리고 아이의 모국어로도 글씨를 쓴다. 씬-짜오.
  나는 겨우 읽을 줄 아는 베트남어를 더듬더듬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긴다. 사랑스러움은 언제까지 살아있는 걸까.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면, 화목한 가정이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들어 사회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그 아이는 언제까지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걸까. 그렇게 사랑받은 사람들만이 무한한 사랑을 돌려줄 수 있는 걸까?
  “주현아 이름 적어줘서 고마워. 이제 앉을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현이는 자리에 쪼르르 앉아 펜을 든다. 그렇지만 펜을 언제 들었냐는 듯 다시 털썩 내려놓는다. 나는 당황하여 잠시 주현이를 쳐다보지만 주현이는 문제집의 페이지 수를 일일이 세고 있다. 손으로 한 장, 두 장…… 어느덧 열 장까지 넘기던 주현이는 문제집을 내려친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웃음이 터진다.
  “주현아, 혹시 네 문제집 내가 잠깐만 봐도 될까?”
  끄덕끄덕, 주현이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나는 살포시 문제집을 들어올려 목차를 훑는다. 주현이가 반년 동안 풀어내야 할 책은 국어의 자음과 모음을 공부하는 일 학년 국어 문제집이다. 내가 문제집을 넘기며 읽자 주현이는 오늘 세 장만 풀면 된다며 손으로 숫자 삼을 만들어 보인다. 나는 알겠다며 다시 문제집을 내려놓았다.
  아이는 머리를 땋았다. 글씨를 쓸 때마다 흔들리는 양 갈래는 시계추만큼 안정적이다. 신 짜오. 주현이는 칠판에 나를 그리면서 옆에 ‘씬-짜오’라는 말을 새겨놓았다.
  어떤 형상은 지나치게 아름답다. 마치 인간이어서는 안 되는 사람이 인간의 얼굴을 가진 것처럼. 똑딱똑딱 시간이 흐르고 주현이의 머리카락이 일정하게 움직인다. 그 순간 나는 아이가 바라보는 세계를 잠시 침범한다. 나는 주현이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신-짜오’라는 글씨를 베트남어로 그려본다. 저 아이는 문제를 읽고 저절로 튀어나오는 베트남어를 삼키고 있을까, 아니면 한글이 베트남어만큼 익숙할까?
  나는 다시 주현이를 본다. 어떤 형상은, 그러니까 한없이 아름다운 이 형상은 세상을 빼닮은 얼굴이다. 살아 숨 쉬고, 박동하는 이 순간을 조각해낸 얼굴이다. 아프로디테나 아이돌처럼 멋들게 예쁜 얼굴은 아니지만, 이 얼굴은, 자기 스스로가 세상에 발을 딛고 살아가고 있노라 선언하는 얼굴이다.
  “쌤! 이제 채점! 채점! 볼펜으로 하기로 했던 거! 순서 맞춰서!”
  나는 주현이와 모종의 계약을 했다. 문제를 풀기 싫어하는 주현이에게 문제를 맞힐 때마다 빨강, 파랑, 보라, 검정 순서대로 동그라미를 그려주기로 했다. 순서가 정확한 색깔 놀이가 주현이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주현이는 눈 깜짝할 새에 세 장을 다 풀어냈다.
  내가 필통에서 네 가지 볼펜을 꺼내는 동안 주현이는 첫 페이지로 되돌아가고 있다. 어느덧 문제집은 내 손에 닿았다. 나는 맨들맨들한 문제집을 손으로 비빈다. 간단한 자음과 모음이니 한국인이라면 모두 순식간에 풀 수 있는 문제다. 그러니 나는 주현이의 흔적을, 아이의 세상이 글씨로 옮겨지는 과정을 샅샅이 훑는다. 만점이다. 틀린 부분이 하나도 없다. 문제 수에 맞춰 각각 9개의 색깔 동그라미가 그려졌다. 주현이는 눈이 동그랗게 커지더니 어느새 벌떡 일어나서 허리를 숙이며 내게 외친다.
  “Xin chào!”
  나는 자리에 앉아 주현이에게 목례한다.
  “씬-짜오.”
  그렇게 우리는 한동안 ‘안녕하세요.’ 놀이를 했다. 문제집을 다 푼 후에는 잠시 간식을 가지러 갔다가 독서 활동을 시작했다. 내가 지켜본 주현이는 베트남어보다 한글을 더 익숙해했다. 그러나 그 아이는 두 개의 언어를 가지고 사고를 하고, 두 개의 언어로 세상을 바라본다. 이질적인 언어를 사람들은 배척하지만 주현이는 꿋꿋이 두 개의 언어를 쓴다. 주현이는 내게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다만 피가 섞인 혼혈의 아이는 쏘아진 언어와 되돌아오는 반응을 잘 안다.
  나의 세계는 어느덧 타인과 긴밀히 섞여있다. 그것은 자의도 타의도 아닌 순리에 의한 어떤 것이다. 내게 내재한 기묘한 본능은 사람 곁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덕분에 주현이에게도 내재한 기묘한 본능은 친구를 그리워하게 만든다. 어느덧 주현이는 독서 활동과 문제집 풀이를 모두 끝낸 뒤 친구와 문밖을 나서고 있다. 저녁 식사 시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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