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태어난 곳으로(4)
우연은 산등성이 같은 오르막을 올라 자취방 문 앞에 선다.
우연은 산등성이 같은 오르막을 올라 자취방 문 앞에 선다. 혜정은 분명 우연이 낙원이라고 했었다. 우연은 그 말에 입꼬리를 싱긋 올렸다. 오르막을 오르는데 부슬부슬 비가 떨어지더니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연은 등허리에 매달려있던 가방을 앞으로 빼고 지퍼를 열어 가방 안을 뒤졌다. 우산을 어디에 뒀던가. 우산이 어디에 있었지. 그제야 우연은 강의실 책상 아래에 우산을 두고 온 것을 기억해냈다. 오늘의 비로부터 우연을 보호해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버티는 것뿐이었다.
나는 살아가는 것도 벅차.
혜정이 말했던 중압감은 쏟아지는 장대비에 우산도 없는 이 순간을 말한 것이었을까? 우연은 생각했다. 모든 사건이 우연으로부터 발생했다. 교회를 나온 것도, 다니던 학원에서 혜정을 만난 것도, 아무 생각 없이 가입한 동아리에서 결국 그 아이를, 그토록 쫓아 헤맸던 허상을 다시 만났던 것도 모두 우연 때문이었다.
우연은 가방을 잠그고 머리 위에 올리려다가 금세 그만뒀다. 그래, 그 장대비 같은 중압감이란 뭔지 한 번 맞아보자. 혜정이 사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던 그 말이 뭔지 한 번 알아보자. 어차피 가방 안에 특별히 간수해야 할 책도 없으니까. 전공책은 냉장고에 넣어서 말리면 그만이니까. 월세방까지의 거리는 고작 십 분이었고 혜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십 분도 부족할 테니 우연은 비를 맞으며 그냥 걸었다. 비가 왔다. 그것도 아주 많이. 그 때 우연은 어릴 적 여름성경학교에서 혜정과 꼭 붙어 앉아 외우던 십계명을 생각했다.
언제나 수요일 수업이 끝나면 오후 여섯 시부터 동아리 활동이 시작됐다. 남자 동아리원들은 참여율이 제법 괜찮았으나 우연은 괜히 혜정을 바라보면 심란했다. 혜정은 언제나 성실하고 똑똑했으나 한순간 건드리면 모든 삶을 포기해버릴 듯이 위태했다. 우연은 그런 혜정이 안쓰러웠다. 가끔은 이 안쓰러운 감정이 혜정보다 나은 처지이기 때문에 드는 동정심일까 의심했다. 매일이 의심이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혜정 쪽만 주구장창 바라보던 와중 혜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희 안락한 집에 대해 발표할까요. 그 외 볼노브라는 학자가 있잖아요. 물리적 공간만이 안락한 공간이 아니라 진실로 자기의 삶을 안주할 수 있는 그런 집이 인간에게는 꼭 필요하다고요.
남자 셋이 침묵했다. 그들은 항상 그랬다. 혜정이 입을 열면 침묵했고, 혜정이 침묵하면 입을 열었다. 대부분 쓸데없는 말뿐이었다. 혜정이 이어서 말했다.
자취하는 사람도 많고 이사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월세, 전세 문제와 함께 엮어서 사회적 현상으로 발표해도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마지막에 결론을 볼노브의 주장으로 엮어보죠. 다들 어떤가요? 마땅한 아이디어가 없어서 저도 이 정도만 생각해왔는데.
혜정이 입을 닫자 남자들이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좋은 것 같아요. 어떻게 딱 사회 이슈인 걸 생각해오셨대. 오늘부터 자료조사 들어가도 괜찮겠는데요? 남자 셋이 연달아 헤정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우연의 속은 뒤집힐 것 같았다. 자꾸만 누가 삽으로 위장을 파내서 다시 목구멍으로 처넣는 느낌이었다. 결국 우연은 가만 있지 못했다. 결국 한 마디를 내뱉었다.
저는 오히려 청년의 주거 문제가 너무 식상하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종교와 평화에 대해 이야기해보는 건 어떤가요? 한스 큉이라는 사람의 주장을 빌려서 종교의 자유나 화합 등을 고려해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종교로 전쟁이 나고, 때로는 인간이 종교에 삶을 의탁하기도 하는데 종교만큼 사람의 인생에 중요한 게 어디 있겠어요? 너무 다양한 종교를 발표하려 들지는 말고 초반에 간단히 대표적인 종교의 역사를 소개하다가 종교 간의 갈등과 해소 방법 위주로 발표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우연의 말이 끝나자마자 남자 셋은 벙쪘다. 솔직히 우연이 의견을 낼 리는 없으리라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우연은 그 표정을 보고 있자니 괜히 고소했다. 그러나 문제는 혜정이었다. 기껏 준비해온 발표 소재를 우연이 반박했으니 기분이 상할 만도 했다. 물론 혜정의 답변은 의외였다.
좋아요, 그렇게 해보는 건 어떨가요?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청년 주거 문제는 다른 팀도 발표할 가능성이 있어서 겹칠 확률이 높아요. 괜히 겹칠 경우에는 발표 집중도도 낮아지고 사람들의 주목도 덜 받게 돼요. 무엇보다 내용보다는 피피티 디자인과 발표력이 더 중점적으로 평가되겠죠. 애초에 저희의 목적은 사람들에게 발표 내용을 집중시키는 거였잖아요? 저는 제 의견을 철회하고 우연 씨의 의견에 보태겠습니다.
그러자 남자 셋이 어버버하며 우연의 의견에 동의했다. 우연을 씁쓸한 눈으로 쳐다봤다. 쟤네, 애초에 놀러 동아리에 들어온 거였구만. 그러다가 혜정이 딱 걸렸는데 내가 주구장창 혜정이 옆에 붙어있으니 놀아먹지도 못하고 시시해서 의견도 안 내고. 초등학생이야 뭐야. 그렇게 생각하던 우연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우연은 죄송하다는 듯 고개를 한 번 숙이고 나서 카카오톡을 켰다. 혜정이 삼십 초 전에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 있었다.
오늘은 너네 자취방 좀 가자. 하루만 자고 가도 돼? 별 일 없을 테니까.
순간 우연은 머리를 한 대 얻어 맞은 것 같았다. 하루만 자고 가도 되냐고? 미친 거 아냐? 우연은 그대로 휴대폰을 덮어놓았다. 괜히 상기된 볼이 혜정에 대한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 같았다. 곁눈질로 혜정을 바라보니 혜정은 폭탄선언을 한 것으로도 모자라 우연의 마음을 프라이팬 뒤집듯 뒤집어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사람처럼 평온하게 앉아 있었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눈빛. 가식적인 웃음. 눈꼬리를 반달 모양으로 접고 남자 셋에게 거는 식상한 말들. 오늘 학식은 메뉴가 별로였어요. 그렇죠? 얼굴이 반반한 혜정이 놀러 들어온 남자 셋에게 그런 말을 지껄이면 어떤 남자는 수긍을 하다가 다른 애 팔을 툭툭 치며 이야기 좀 더 이어가 보라고 다그쳤다. 우연은 그 상황이 싫었다. 싫고 웃겼다. 무엇보다 혜정과 이야기하고 싶었다. 저 가식적인 웃음 좀 어떻게 해봐.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서글서글한 푸른 웃음이지만 네가 짓는 웃음은 어릴 적 짓던 순수한 웃음이 아냐. 우연은 괜히 웃음이 나왔다. 우리는 모두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는 것만 같았다.
동아리가 끝나자마자 사람들은 흩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저녁을 먹으러 간다고 했고, 어떤 모임은 상의할 게 다 끝났으니 술이나 먹으러 간다고 했다. 남자 셋도 우연과 혜정에게 술 마실 생각이 있냐며 물어왔으나 둘 다 단칼에 거절한 탓에 남자 셋은 무안해했다. 그들이 먼저 정문으로 빠져나가자 우연은 혜정과 함께 학교 후문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우연이 먼저 입을 뗐다.
종교 이야기 가져올 줄 알았더니 집은 웬 집?
혜정이 맞받아쳤다.
괜히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 하나 탈출해서 방황하고 있다고 쇼할 일 있어? 네가 하겠다고 하니까 장단 맞춰준 거지 동의하는 건 아냐. 정말 이론적으로만 발표할 거야. 우리 이야기 꺼낼 생각은 하지도 마.
그런 생각은 나도 안 해.
잠시 정적이 흘렀다. 우연은 머리를 한 번 쓸어 넘겼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던 게 아닌데. 왜 우리집에서 자고 가려는 거냐고 물어보려던 건데. 우연은 복잡한 머리로 혜정을 자꾸 곁눈질했다. 그 모습을 눈치챘는지 혜정이 반응했다.
볼 거면 대놓고 봐야지 뭘 흘끔흘끔 쳐다봐. 왜 너네 집에서 자고 가는지 궁금해서 그래?
우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궁금해. 너무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그런 말을 속으로 하면서도 최대한 고개는 느리게 한 번 끄덕였다. 고작 그뿐이었다. 혜정은 의외로 쉽게 말을 이었다.
너는 독립해서 살아서 모르겠지만 나는 아직도 방황에 시달리고 있어. 그러니까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종교 탈출했다고 아직까지 욕설 들으면서 맞고 산다는 말이지. 오늘 더운 여름에 내가 괜히 긴바지에 가디건까지 걸쳤겠어? 다리에 멍이 났어. 아버지가 발로 한 대 차셨거든. 물건도 좀 던지시고. 그게 다였어. 근데 오늘은 왠지 집에 들어가기 싫더라. 나 외박하면 죽는데 그냥 오늘은 해보려고. 그것도 남자 집에서. 뭐 어때. 네가 날 어떻게 할 것도 아니고. 너 겁쟁이라서 나한테 손도 못 대는 거 알아. 그래서 부탁한 거야. 승낙해줘서 고맙다는 생각뿐이고. 됐어?
혜정은 우연이 궁금했던 부분을 우다다 쏟아냈다. 개중에는 우연이 예상치 못한 탈출기도 있었다. 우연도 마찬가지였다. 애초에 성인이 되자마자 집을 나온 이유는 종교 강요를 받고 싶지 않아서였다. 힘이 들었다. 집만 오면 따뜻한 인사가 아닌 사탄에 병들었다며 뒤로 날아오는 욕설이 지독하게 피곤했다. 다른 집 고삼 애들은 약도 달여주고 밥도 잘 차려주면서 부모님이 자식 눈치 본다던데. 우연은 그렇지 않았다. 혜정도 그렇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어릴 적부터 둘은 비슷한 부모님 성격을 서로 뒷담화하곤 했다. 그러면 불순한 효도의 길을 걷어차는 것 같으면서도 부모에게 할 도리를 저버렸다는 짜릿함이 몰려왔다. 한순간의 봄바람이었다. 그 짜릿함은 우연이 갑자기 교회를 박차고 나갈 때까지 계속됐다. 그리고 그 후 혜정은 미쳐버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너네 집 가서 해. 여기 아직 학교고 후문도 안 나갔고. 지나가다가 과 사람이나 동아리 사람 만날 확률도 적겠지만 혹시라도 만나게 되면 괜히 어색해지니까.
혜정은 그 부분을 걱정하고 있었다. 우연도 그 부분이 걱정스러웠다. 둘은 후문을 지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모든 말은 언덕을 오르면서 쏟아낼 것이다. 힘겨운 발걸음만이 과거를 보장해줄 수 있다는 것처럼 혜정과 우연은 되도 않는 합리화를 했다. 힘겹게 걸어야 해, 우리가 살아온 것보다 더 힘겹게. 그런 마음으로 그들은 후문을 나섰다. 조금 있으면 언덕이 나올 것이었다.
너는 안 맞았어?
혜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교회 나오고 나서부터 안 맞았냐구.
혜정의 부연 설명은 같았다. 우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맞았지. 몸에 사탄이 들어갔으니까.
그러고 둘은 마구 웃었다. 그래, 너도 맞고 나도 맞고 우리는 맞을 운명인가 보다. 원래 탈출에는 언제나 폭력이 존재하는 법이지. 편하게 도망치면 그게 해방이지 탈출이냐. 혜정은 그런 말을 내뱉으면서 우연의 얼굴을 한 번 쳐다봤다.
근데 너는 똑같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나는 웃는 법부터 고쳤는데. 너도 느꼈지?
응, 너 진짜 가식적이야. 왜 그렇게 변했는지는 묻지 않을게. 그래도 너는 내 낙원이야.
왜?
같은 아픔을 공유하니까.
그게 다야?
아니, 왠지 너는 내 세상을 이해해줄 것 같으니까. 내 세상을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너뿐일 것 같으니까.
그 말에 혜정은 웃었다. 우연은 그 웃음이 꼭 이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잠자코 죽음만을 기다리는 석상 같아서 혜정의 웃음이 괜히 불쾌해졌다. 그리고 무서웠다. 혜정은 언제든 죽을 것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혜정의 옷에서 나는 섬유유연제 냄새는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 같았고, 혜정이 즐겨 입는 형형색색의 가디건도 죽을 때까지 헤지지 않고 혜정의 몸 위에 걸쳐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우연은 이상하리만큼 혜정이 점점 흐려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근데 혜정아.
왜.
너는 자꾸 투명해지고 있어. 모든 걸 포기하고 떠나도 괜찮다는 사람처럼.
…….
혜정은 조용했다. 우연도 조용했다. 둘은 자취방을 올라가는 길 내내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신발을 쳐다봤다가 진흙이 묻은 자기의 신발을 쳐다봤다. 그게 다였다. 혜정은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우연은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근데 너 갈아입을 옷은 가지고 왔냐. 나 내일 오후 수업만 있어서 오전에는 시간 괜찮아.
나 내일 공강이라 상관은 없는데. 옷은 가지고 왔지. 아마 집에다가 쪽지 써두고 왔으니 실종신고까지는 안 하겠지. 휴대폰만 꺼두면 될 거야, 뭐.
혜정이 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연은 혜정의 목소리가 꼭 세상이 무너져도 괜찮다는 사람처럼 느껴져서 괜시리 마음이 저릿했다. 우연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먼저 씻을게, 넌 짐 정리부터 하고 있어.
혜정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무덤덤한 끄덕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