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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작북작 Oct 20. 2023

#6. 회색 안개 안에서 헛바퀴질

엄마는 어릴 때 나쁜 아이였어


“학생, 학생은 어떤 음악 좋아해?”

“네? 음악요? 음... 클래식 음악 주로 들어요. 글렌 굴드가 연주한 바흐의 골드 베르크 같은 거요.”

“다양한 음악가의 골드 베르크를 들어봐.”


대학시절 지도 교수님과 의례적으로 하는 상담 중이었다. 교수님은 창밖의 산을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이 다가오는 계절이라 산은 주황과 노랑, 그리고 초록으로 알록달록했다. 지도 교수님은 뜬금없이 무슨 음악을 좋아하느냐고 물으셨다. 그러고는 다양한 음악가의 연주를 들어보라고 하셨다. 교수님은 수학 교수님이고, 선형대수와 복소수를 강의하는 분이셨다. 

‘수학 선생님이 음악을 왜 물으시지?’ 그때는 교수님이 뜬금없는 말을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거의 20년이 지난 지금, 교수님이 그 말을 왜 하셨는지 확실히 이해가 된다. 인생을 살아갈 때 자신이 뭘 좋아하는지 잘 아는 것, 다양한 경험을 통해 자신을 더 자세히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충고를 하신 거다.





나의 20대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어둡고 뿌연 안갯속 눈밭. 자동차가 앞으로 나가려고 애를 쓴다. 액셀을 밟아보고 핸들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며 다시 액셀을 밟아본다. 하지만 자동차는 눈 위에서 움직이지 않는다. 바퀴는 눈에 미끄러져 헛바퀴를 돌뿐이다. 나는 20대를 눈 위에서 헛바퀴질 하는 자동차처럼 지낸 것 같다. 현재를 벗어나려 애쓰지만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


나는 의약계열 대학에 진학하고 싶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돈도 잘 벌 것 같았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사춘기를 겪으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아 의약계열에 진학하지 못했다. 목표한 것을 이루지 못한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패배감을 갖고 20대를 시작했고, 20대 내내 그 패배감을 이겨내고 싶었다.


수학과에 들어갔다. 고등학교 때 가장 못한 과목이 수학이었는데 말이다. 아빠는 수학과를 나오면 수학 과외를 할 수 있으니 정말 좋고, 수학은 이론이 변하는 게 아니라서 공부해서 잘 알아두면 평생 써먹으니 정말 좋다고 했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아빠 말대로 수학과에 진학했다. 


'나는 수학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고 잘하지도 않아. 하지만 내가 노력해서 수학을 잘하게 되면 뭐든 다 잘할 수 있을 거야’라는 생각으로 학교를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열심히 공부하지 않은 것을 수학으로 만회하고 싶었다. 하지만 수학과 친해보려고 애를 써봐도 수학은 별로 재미있지 않았다. 


수학과에서 배우는 것은 대부분 증명이다. 그런데 창의적으로 증명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시험을 칠 때면 수업 필기와 과제를 무작정 외웠다. 외우고 까먹고 외우고 까먹는 걸 학기마다 반복했다. 내 사고력은 확장되지 않았고, 단지 엡실론 델타, 감마, 람다 같은 몇 그리스문자가 익숙해졌을 뿐이었다. 이걸 안다고 내 삶이 나아질 것 같은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학교를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만두고 나서의 대안이 전혀 생각나지 않아서 그만둘 수도 없었다.


학교에 다니는 의미를 찾기 위해서 다른 과 수업을 들었다. 

영어를 잘하면 취직을 잘할 수 있다니까 영문학과 수업을 들었다. 영작문 수업과,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 어차피 외국 경험도 없고, 집중적으로 영어를 공부해 본 적도 없었기 때문에 학점 욕심은 내지 않았다. 그냥 ‘영문학과 애들은 이런 걸 배우는군’ 하고 감상하는 마음으로 수업을 들었다. 


심리학 수업도 들었다. 심리학은 꽤 재미있었다. 인간에 대해 다양한 가정을 하고 실험을 설계해서 의미 있는 결론 도출을 하는 과정이 재미있었다. (그때 국문. 철학. 법학. 음악 등 더 다양한 과목을 들어보지 못해서 아쉽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잘하는 것을 찾고 싶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어떤 음악을 들으면 대충 비슷하게 피아노나 바이올린으로 연주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음악에 재능이 있는 건 아닌가 뒤늦게 희망을 가졌다. 연주 쪽으로는 이미 늦은 것 같으니, 연주가 아닌 길을 찾아봤다.


어떤 음악이 좋은 음악인지 확실하게 구분할 수 있는 사람, 다양한 음악을 알고 소개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시간만 나면 KBS1FM(클래식 음악 라디오 방송)을 들었고, 음악회를 찾았다. KBS1FM의 방송작가나 객석(클래식 음악 잡지)의 기자가 되면 얼마나 멋질까 생각했다. 하지만 음악을 어떻게 해야 잘 알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긴 어려웠다. (지금이라면 음악 커뮤니티를 알아보고,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며 공부를 했을 텐데, 그때에는 너무 소심해서 누구를 만나 볼 생각을 못 했다) 그래서 음악 쪽으로 진로를 정하는 것은 포기했다. 


약대 편입 학원에도 잠시 다녔었다. 생물은 꽤 재미있었지만 화학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게다가 집에서 공부를 하는데, 언니가 만날 친구를 집에 데려와서 공부를 방해했다.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면 될 텐데, 집에 누가 온다는 것에 한껏 예민해져서 공부를 하지 못했다. 결국 두 달 만에 학원을 그만두고, 약대 편입도 포기했다.


졸업이 다가왔는데 나는 아무 대책이 없었다. 취업 원서도 하나도 쓰지 않았고 대학원 원서도 쓰지 않았다. 그냥 이 세상은 나 같은 인간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만 했다. 왜냐하면 나는 스스로를 ‘수학을 극복하지 못한 패배자’, ‘잘하는 것 하나 없는 패배자’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언니가 편입을 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했다. 내가 가고 싶었던 대학의 경영학과에 원서를 써 봤다. 경영학과를 졸업하면 취직이 잘 된다니까 경영학과가 제일 좋을 것 같았다. 되면 가고 안 되면 말고 하는 마음으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봤는데 합격했다. 대학 생활이 2년 유예되었다. 합격이 되지 않았다면 나는 은둔형 외톨이가 되었을 것이다. 


취직이 잘 된다는 경영학과 수업을 듣다 보면 답답했다. 내가 처음 들어보는 기업을 다른 학생들이 속속들이 잘 알고 분석을 해내는 걸 보면 좌절스러웠다. 기업 재무는 미래의 재무 상태를 예측하여 현재가(現在價)를 계산한다는데, 현재가 계산이야 한다지만 미래 예측을 내가 회사에 가면 할 수 있겠나 싶었다. 마케팅은 결국은 사람의 니즈를 미리 파악해서 상품을 제공하거나 새로운 혁신을 보여줌으로써 구매 욕구를 이끌어야 한다는데 내가 무슨 수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싶었다. 내가 이 일들을 하기에는 너무 능력이 부족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관심이 있던 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다 보면 나 자신을 조금 더 잘 알게 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이해하는 폭이 조금 더 넓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심리학은 재미있고 나에게 유용했다. 심리학을 더 공부해 보고 싶기도 했지만 대학원에 또 다니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보다 2년이나 대학 생활을 더 했는데 대학원까지 다니면 부모님께 부담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대학원도 다녀볼 걸 후회하고 있다) 


두 번째 대학에서는 멋진 친구들이 정말 많았다. 어려운 자격증 시험을 공부하면서도 학점도 놓치지 않는 친구, 영어로 진행하는 수업에서 원어민 못지않은 실력을 보이는 친구, 광고 공모전에서 입상하기 위해 밤낮 애쓰는 친구, 일 년에 책을 200권씩 읽는 친구, 봉사활동을 다니는 친구......

친구들이 가진 열정이 정말 부러웠다. 무슨 동기로 저렇게 열심히 사는 걸까 궁금했다. 나 자신에게 뭘 하고 싶은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할 때 동기가 생기는지 스스로 묻지 않고 그냥 친구들을 따라 했다. 


친구를 따라 책을 읽었고,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미드를 보고, 읽은 책을 싸이월드에 기록하고 봉사활동을 하는 순간은 내가 친구들처럼 근사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내가 친구들보다 못하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나는 뭔가를 하고 있기는 하지만 내 삶을 잘 사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학 생활 내내 뭔가를 하기는 했다. 하면 좋다는 것들을 했다. 영문학과 수업, 약대 편입 준비, 경영학과 편입.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찾아보긴 했지만 몰입하지는 못했다.(그때 심리학과 음악에 몰입해 봤어야 했다) 

내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지 않고 남이 가진 것만 부러워했다. 그러다 보니 애만 쓰고 제자리인 것 같은 느낌으로 살았던 것 같다. 나 자신에 대해서 잘 모르니 안개가 걷히지 않았던 것 같다. 


지도 교수님의 말씀대로 내가 뭘 좋아하는지 알아보고, 다양한 경험을 해보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앞뒤 재지 않고 도전해 봤으면 어땠을까. 후회가 줄어들지 않았을까. 내 20대를 자랑스럽게 생각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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