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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윤구 Oct 18. 2022

동절(東庵)

동암(東庵), 아니 동절 – 예나 지금이나 근동 사람들은 누구 할 것 없이 동절로 알고 있고, 그리 부르고 있다 –에 다녀왔다. 도비산에 터를 잡은 예닐곱 사찰 중 산 동남쪽 높은 곳에 자리한 동절은 서쪽에 터를 잡은 부석사와 서산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보고 앉은 북쪽 석천암 등과 함께 오래도록 도비산을 대표하는 절이다.     

 

시골집에서 십여 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데다, 오가는 도로에서도 멀지 않아 한 번쯤 들려봄 직도 하건만 좀체 인연이 닿지 않은 곳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이지만 여태껏 그리 안 한 것은 어쩌면 아껴두고 궁금해하고 내 맘대로 그려볼 수 있는 마음속 샹그릴라 한 곳쯤 남겨두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엊그제 시골집에 간 김에 저녁 무렵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나들이 삼아 도비산에 오른 김에 드디어 마음으로만 그리던 샹그릴라를 들러보게 되었다.     

 

동절은 부석사 일주문을 기점으로 도비산 임도를 시계방향으로 돌아 차로 10여 분 남짓한 거리에 있다.

절도 절이지만, 임도에 올라서자 일제히 여문 벼들로 온통 금빛 물든 서산간척지 A, B 지구의 너른 들녘이 마치 도비산의 좌우 날개인 양, 저 푸른 해원(海原)을 향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인 양 노랗게 펄럭이고 있었다. 지척에 두고도 때맞춰 간척지의 금빛 들녘을 내려다보는 것이 처음이라는 부모님은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좋다, 참 좋다’를 연발하신다.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부석사와 달리 동절로 들어가는 길은 인적은 고사하고 해 질 녘의 어스름에 일찍 온 추위까지 더해져 을씨년스럽기까지 하였다. 특히, 절을 감싸고 있는 못 돼도 이삼백 살은 훌쩍 넘은 듯 위풍당당한 수십 그루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팽나무들은 눈 부릅뜬 채 창칼 치켜들고 마귀를 밟고 서 있는 사천왕(四天王)보다도 위압적이고 서슬 퍼렇게 느껴졌다.      


동남쪽을 바라보는 세 칸 반 법당과 북동쪽을 등지고 있는 세 칸 요사채가 처마를 맞대고 기역 자를 이룬 암자는 기둥의 붉은 칠과 서까래의 푸른 단청과 ‘東庵’(동암)이라고 쓰인 빛바랜 편액이 없으면 그저 산중의 가난한 오막살이일 뿐 부처님을 모신 곳이라고 하기에는 쓸쓸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하였다.    

     

연조(年條)가 적어도 400년은 넘었을 것이라는데, 석탑이나 돌부처는 고사하고 그 흔한 주련과 풍경(風磬)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열린 문틈으로 얼핏 비친 법당 안에는 두 살짜리 아기만 한 석가모니불이 그림 속 산신(山神)과 신장(神將)들의 호위 아래 촛불조차 밝히지 않은 채 가부좌로 앉아 적멸에 잠겨 있었다.     


다 저녁 뜻밖의 인기척에 오십 후반쯤으로 보이는 스님은 엉거주춤 불청객들을 맞았다.

오랜만에 사람을 보는 듯, 아니면 천성이 그러한 듯 접객이 어설프기만 하였다. 그나마 맑은 얼굴과 엷은 미소가 어설픈 접객을 덮어주었다. 어색한 침묵을 깨뜨려볼 요량으로 절집 풍경을 화제 삼아 말을 걸었다.     

 

“주련도, 풍경도 하나 찾아볼 수가 없네요?” 묻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무엇이든 걸 수 있다는 것이기도 하니 그도 괜찮습니다” 우문에 선문답 같은 현답이 돌아온다.      


“혼자 지내시나 보네요?” 다시 묻는다. “네, 혼자입니다. 이곳은 수덕사의 말사(末寺)인데, 누구나 가고 싶다고는 하지만 와서 살라 하면 아무도 오려하지 않는 곳이지요” 묻지 않은 사정까지 더한 답이다.      


“이곳에서 지내신 지는 오래되셨어요? 찾아오는 이들이 많지 않은 듯한데, 적적하시겠어요?” 또 묻는다. “오래지 않습니다. 찾는 이 없으니 공부하기에는 제격인 곳이지요.” 천상 수도승의 답이다.   

  

문답 도중에 절에 가시면 무엇이라도 빌고 싶어 하시는 어머니께 부처님을 뵙고 오라며 지폐 한 장을 건네드렸다. 스님은 뜻밖이라는 듯 “부처님을 뵈시게요?” 되물으며 법당 낡은 미닫이 유리문을 열어주었다.     

 

어머니는 적멸 삼매의 부처님을 향해 삼배를 올리셨다. 무슨 바람을 빌었는지, 부처님이 그 원을 들었는지 알지 못한다. 우연히라도 한 번 누군가의 간절함이 이루어진 적이 있다면 이미 영험의 소문이 산 아래에 자자했을 텐데, 아직 그런 풍문이 떠돈 적 없는 것을 보면 여간한 절과 정성으로 이곳 부처님의 적멸을 깨우기 어림없는 것 같다.          


나의 샹그릴라 동절(東庵)은 그런 곳이었다. 풍경 소리조차 범접할 수 없는 고요와 적막만 있는 곳, 누구나 가고 싶다고 하지만 아무도 오겠다는 이 없는 곳, 영락한 법당과 외로운 스님이 있는 곳. 좀처럼 깨우기 어려운 적멸의 부처님이 계신 곳, 한 번 가봐야지 하면서 마음으로만 그리는 곳......     


애초 가난하였는지, 어느 때쯤부터인가 쇠락을 한 것인지 스님도 나도 알지 못한다. 다만 지금은 여래와 불법의 위엄을 드러낼 법당도, 기물도, 불상조차도 변변치 않은 곳일 뿐이다.    

  

쓸쓸함 한편으로는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비밀스럽고 아련한 샹그릴라로 사람들 마음속에 오래 기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는 날에는 텅 빈 붉은 기둥에 저 외로운 스님의 가려 쓴 주련이 몇 개 걸리고, 헛헛한 처마에는 소리 맑은 풍경 하나쯤 걸려있기를 소망해 보았다.   

   

해가 태안반도 너머 먼바다에 잘 익은 홍시빛으로 저물어갈 때쯤 나는 내 마음속 상그릴라의 문 없는 문을 걸어 잠그고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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