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얼마 만이냐? 잘 지냈고? 이런 데서 이렇게 만나네.
동기들이랑 스크린 골프 한 판 치고 소주 한잔하러 왔다.
근데, 미안해서 어쩌지, 우린 만나면 무조건 1/n이다. 퇴직하고 나니까 어쩔 수가 없네.
먼저 가볼 테니까 맛있게들 먹고 즐거운 시간 보내.”
30여 년을 알고 지낸 데다 2, 3년간은 한 부서에서 호형호제하며 지냈던 선배가 식사를 끝내고 일행들과 함께 나가다가 나와 얼굴이 마주치자 민망하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몇 마디 던지고는 황망하게 돌아서서 나갔다. 한때는 일 잘하고 밥 잘 사고 성격까지 호탕한 그야말로 ‘잘 나가는’ 선배였는데, 총총히 멀어지는 뒷모습이 무척 여위고 가벼워 보였다.
주니어시절 과장님으로 모셨던 대선배님과 아직 현직인 동기 한 명, 몇 년을 한 사무실에서 동고동락한 K형, 그리고 얼마 전 퇴직 후 재취업한 후배 두 명 등 총 여섯 이서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시간이 흐르고 시끌벅적하던 주변의 테이블이 하나둘 비어갈수록 내 마음은 점점 좌불안석이 되어갔다. ‘음식값에 술값까지 적어도 30만 원은 나올 텐데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난번에는 K 형이 계산을 했었는데 오늘은 내가 내야 하지 않을까......’
딱 한 잔씩만 더 하자는 누군가의 고집으로 기어이 소주 한 병이 더 들어오는 것을 보면서 지갑을 꺼내 들고 슬며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밥값 한 번 낸다고 당장 굶게 되는 것도 아니잖아, 너무 쪼잔해지지 말자’고 이미 쪼잔해진 나를 다독이면서 계산대로 갔다.
“자리가 어디시죠? 아, 그쪽 테이블은 저기 저분이 계산을 하셨습니다.
추가 주문한 소주 한 병값 5천 원만 더 주시면 됩니다.”
어느새 C 후배가 계산을 해버렸네! 독주(毒酒) 한 모금을 마신 듯 뜨뜻한 안도감이 온몸으로 퍼지는 것을 느끼면서 5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주인에게 건네고는 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다 이렇게 좀스러워졌나. 내 모습도 누군가에게는 작고 여위어 보이겠지.......’
퇴직 후 열 달, 밥값과 술값 때문에 전전긍긍했던 것들을 비롯해 그전에는 생각할 필요가 없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되고, 겪지 못했던 것들을 경험하고 있다. 즐겁고 좋은 일들도 있지만, 자존심에 크고 작은 스크레치가 난 적도 적지 않다. 그것들 대부분은 남이 아니라 나 자신의 자격지심 때문이었다.
그런 시간들을 보내면서 생각이 든 것이, 그 선배가 그러하듯 누구에게나 호기(豪氣)를 접어야 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치사하게 보이더라도 참을걸’, ‘내가 왜 그랬을까?’, ‘이걸 어떻게 메꾸나?’ 등등 좀스러운 고민에 빠지는 상황이 되풀이된다면 그 선배처럼 차라리 커밍아웃을 하는 게 훨씬 당당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도 과부 사정 모르는 홀아비가 있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고......
나도 오늘 용기 내어 밝힌다. “여러분, 혹시라도 내가 밥자리 술자리에서 끝까지 뭉개고 앉아있거나, 신발 끈을 매고 있어도 욕하거나 비웃지 마시고 너그러이 이해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