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넘어가 이제 10살이 되었지만, 어쨌든 계속되는 이야기.
하이가 3살이 되었을 때 시어머니는 암진단을 받으셨다.
당시 남편은 자영업, 나는 전업. 그리고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었으니 서울에 있는 대학병원에 어머니를 모시고 다니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게 당연하게 됐다. 거의 내 전담이긴 했지만.
2주에 한 번. 2박 3일 항암으로 입원하시는 어머니를 병원에 모시고 다녔다.
와이퍼가 움직여도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쏟아지는 엄청난 폭우로 고속도로에서 시속 10km를 겨우 달릴 정도인 날에도 나는 하이와 어머니를 태우고 운전을 했다.
그러다 힘에 부쳐 결국 하이는 어린이집 입소를 결정했고,
병원에 가는 날엔 하원이 늦어져 친정엄마에게 부탁을 하곤 했다.
어머니의 투병기간 동안 나는 왜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이 나왔는지 절절하게 깨닫는다.
항암으로 체력이 많이 떨어지신 어머니를 위해 나는 2주에 한번 꼴로 어머니가 그나마 좋아하시고 잘 드시는 오리백숙을 끓였다.
어느 한 날. 엄마가 요즘 전복이 너무 좋다고 한 박스를 보내줘서 몸보신 좀 하셨으면 하는 마음에 삼계탕을 한가득 끓였다. 통 못 드시니 좀 드시고 기운 차리셨으면 하는 마음이었는데.
어머니는 본인 자식들을 불러다 그걸 다 먹여 보내셨다. 본인 드시라고 해 놓은 음식인데 부르는 어머니나, 좋다고 본인 자식에, 배우자까지 다 데려와 먹는 사람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무시하나? 안 그래도 엄마가 때마다 생선이랑 고기를 선물로 보내는데 그냥 고맙다 전해드려라. 하면 되는 걸 뭐 이런 걸 보내시냐? 하는 말에 속상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소화기 쪽 질환이라 자극적이지 않은 음식이 좋을 것 같아서 소화가 잘 되고 간이 세지 않은 반찬들도 만들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집에 계시는 동안엔 자식들 앞에서 내가 내놓는 음식들을 두고 병원밥도 맛없어 죽겠는데 집에서도 이런 맛대가리 없는 걸 먹어야겠냐고 짜증을 내셨다.
고마움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니었다.
같이 살고 있고 내 남편의 부모, 하이의 할머니니까.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고마움 정도는 느끼는 줄 알았다.
항암을 하고 오시면 다녀가는 어머니의 자식들은 누구 하나 내게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넨 적이 없다. 그저 아픈 내 부모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게 애틋하면 붙어서 병원 모시고 다니고 식사나 챙기지.
엄연히 따지면 남인 내가 왜? 하고 고약한 마음과 미움만 쌓이는 거다.
올해 검진을 앞두고 남편은 톡을 하다 버럭 짜증을 냈다.
나만 자식이야?
검진 날이 가까워 알았다. 또 다 못 간다고 했구나.
일 때문에 가족 상이 아니면 연차를 쓸 수 없는 주간이라 남편은 골머리를 썩었다. 미안하니까 내겐 차마 부탁을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게 눈에 보였다.
내 연차와 돈은 이 집의 공공재구나.
나는 다시 한번 더 남편은 사랑해도 남편의 부모와 형제까진 품을 수 없다고 생각하며 내가 가겠다고 했다. 뭐 기대도 안 했지만, 역시나 고생한다는 일 말의 말 한마디는 당사자인 어머니나 어머니의 다른 자식들에게 듣지 못했다.
시댁일로 불평할 때면 엄마는 넌 그냥 네 할 도리만 하면 되는 거야. 하고 나를 달랬다.
대체 그 도리라는 건 뭘까. 따지면 나는 생판 남인데.
어머니를 모시고 검진을 다녀오자 미안하고 너무 고맙다고 표현하는 남편에게 나는 그저
우리 부모님한테도 이렇게 해줄거지?
하고 물어 공증도 안 되는 약속을 받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얄팍하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