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을 통한 편안함
나는 나를 갈아 넣는 육아를 선택했다.
'나를 갈아 넣는다.' 어쩐지 안타깝고 무서운 말이다.
십여년 전,
결혼을 하기 전,
아이를 낳기는 더더욱 전이었던 그 때,
친구들과 이런 약속을 했었던 것 같다.
우리는 나중에 절.대.로 남편과 아이 이야기만 하는 아줌마는 되지 말자고.
추석이었는지 설을 지나고 였는지..
대학생이었던 우리는 용돈을 두둑히 받아 그 기념으로 마셔라 부어라
술을 한잔 하며 했던 말이었던 것 같다.
명절 내내 요리를 하며 나누는 어른들의 대화는 주로 남편과 자식 이야기였다고.
어쩜 그렇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 거냐고.
우린 절대 그러지 말자고..
우리는 마치 독립된 여성인 듯 그런 결심을 했었다.
그랬던 내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보니
절대로 되지 말자고 결심했던 그들과
별 다를 바가 없는,
자식과 남편 이야기를 빼면 딱히 할 말이 없는
그때의 그 아줌마가 되었다.
게다가 무려 아이들을 키우는 것에 나를 '갈아 넣자'는 결심까지 하다니.
처음부터 내가 이런 결심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릴 때야 물론,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아이를 케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큰 아이가 7살, 8살 즈음이 되었을 때
'이제 너는 많이 컸으니 스스로 할 것들은 스스로 하고 너도 세상에 대해 좀 배워야 한다.'
는 마음을 먹었었다.
첫째가 자신이 원하는 '그' 치과에 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했을 때,
이제 너도 컸으니 꼭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이를 뽑는 일로 멀고 먼 어린이 치과까지 둘째를 데리고 다닐 수 없으니
집 앞 일반 치과에서 이 정도는 뽑을 수 있는 것 아니냐고.
나도 내 주장을 좀 펴보자는 생각으로 첫째와 고집 싸움을 했고,
결과는 내가 졌지만
다음엔 꼭 엄마인 내 말대로 할거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었다.
학원 보강 시간에는 낯설어서 가지 못한다고 하는 첫째에게
할 건 해야된다는 명목과
세상일은 너가 하고픈 대로만 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걸 가르치려고
억지로 학원 앞까지 끌고 간 적도 있었다.
결과는 내가 졌지만
다음엔 꼭 너 말을 다 들어줄 수는 없다는 말을 또 남기기도 했었다.
이런 일들을 여러번 겪으며 드디어 깨닫게 되었다.
결과는 늘 내가 진다는 것과
다음엔 어찌 할거라는 경고는 그닥 소용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이런 일련의 일들,
예를 들면 너가 절대로(사실은 아직은) 못할 것 같은 일들을
세상을 (더 빨리) 배우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내가 해아한다고 하는 것들은
아이의 예민함을 자극하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돌고 돌아 내 발등을 내가 찍은 듯
나를 더 힘겨운 육아의 세계로 빠져들게 한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내가 편하려면 나를 갈아넣듯 아이를 살피고 연구할 것을.
지금 아이가 어떤 기분인지,
불안한지 편안한지
나는 지금 어떤 말로 아이를 달래는 것이 좀 더 현명한지.
어떤 긴장의 순간이 오면
엄마의 최선의 힘을 발휘해서 머리를 굴리고 적절한 말을 찾아내고
아이를 빨리 편안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로.
그것이 아이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결국은 돌고 돌아 나를 위한 것이라는 걸 깨닳았다.
나를 갈아넣는 육아를 통해 더 편안해짐을 택했다.
뭔가 모순되는 것 처럼 보이지만 이것 외에는 절적한 표현이 떠오르질 않는다.
나는 오늘도 나를 갈아넣었고 내 아이는 더 편안하다.
그리고 그것은 또 돌고 돌아 나를 편안하게 만들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