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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반짝그녀 Jan 10. 2024

등산 학대 아닙니다

경주 남산과 아이 동반 등산 예찬

"아니 이거 학대 아니에요?" 우리를 스치는 한 등산객 아저씨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아이들에게 짓궂게 물었다. "엄마, 아빠가 억지로 오게 했지?" 2시간 남짓 올라온 산 정상 부근에서 꼬맹이 둘을 만난 것이 무척이나 신기하다는 투였다. 난 아이들과 산타기를 좋아한다. 남한산성 둘레길처럼 1~2시간 코스는 둘째 3살 때 다녔고 이듬해인 첫째 6살, 둘째 4살에는 괴산 산막이옛길, 인제 자작나무 숲 등 4~5시간 코스도 걸었다. 아이들과의 등산은 혼자보다 1.5배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물 주고, 어르고 달래고, 간식도 먹이고 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이다. 풍경은 가끔 뒤돌아보며 감탄하는 정도다. 연신 아이 발 밑을 보며 잘 딛고 가는지 확인한다. 그럼에도 난 아이들과 함께 산에 오르는 것이 좋다.


둘째 네 살, 4시간 30분 등산 기록





남산은 경주시의 남쪽에 솟은 산으로 신라인들의 신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 금오봉(468m)과 고위봉(494m)의 두 봉우리에서 흘러내리는 40여 개의 계곡과 산줄기들로 이루어진 남산은 남북 8km, 동서 4km로 남북으로 길게 뻗어 내린 타원형이면서 약간 남쪽으로 치우쳐 정상을 이룬 직삼각형 모습을 취하고 있다. 100여 곳의 절터, 80여 구의 석불, 60여 기의 석탑이 산재해 있는 남산은 노천박물관이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경주 남산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한 달 살기를 계획하며 빼놓지 않고 넣은 것이 등산이다. 특히 경주의 남산은 '산 자체가 박물관'이라는 별명이라는 점에서 호기심을 간질였다. 산 타는 것 자체도 좋은 데 가는 길 틈틈이 볼거리가 넘친다니 일석이조 아닌가. 절벽 아래 벽면을 캔버스 삼아 그림 그린 듯 새겨 놓은 거대한 부조, 등산로에서 시선을 들어 올려 저 멀리 언덕 뒤에 놓인 반가상, 산 정상에서 만나는 삼층석탑 등 산과 어우러진 조각들이 사진 만으로 내게 속삭였다. '이건 꼭 보러 와야 해!' 암! 가야지! "얘들아, 우리 등산 갈 거야!" 하니 시크한 아홉 살은 "꼭 가야 해요?" 한다. 나도 이십 대 넘어 산이 좋아졌으니 이런 반응은 당연하다.



절벽 아래로 거대하게 자리 잡은 부조, 남산은 이런 재미!



민원 접수와도 같은 불평을 들으면서도 아이들과 산을 타을 타는 이유는 여럿이다. 가장 좋은 점은 힘든 순간을 함께 이기는 '한 팀으로서의 가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소 아이들이 스스로를 가족이라는 팀의 일원으로 느끼고 가정에 기여할 일은 많지 않다.(밥상에 숟가락 놓기 정도?) 함께 하는 등산에서는 산에 발을 디딘 이상 올라야 할 공동의 목표가 생긴다. 도달 과정에서 겪는 위기에 서로를 도울 것은 가족이다. 둘째가 "그만 갈래"하며 철퍼덕 앉을 때 "마이쭈 줄까? 오빠가 퀴즈 내준대!" 하며 온 가족이 어르고 달랜다. 평소 루틴한 일상을 서로 해치우느라 정신없던 구 남자 친구가 가파른 구간에서 건네는 손도 새삼 듬직하다. 그렇게 서로의 존재를 느끼며 단단한 가정이 되어 간다.  




또 아이들과의 산은 '사서 고생'을 선물할 수 있게 한다. 한 발짝도 더 딛기 싫을 때 그 마음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인내와 마인드 컨트롤을 배운다. 일상에서 아이들은 크게 힘들 일이 없다. 기껏해야 놀다가 다치거나 하기 싫은 사칙연산과 씨름하는 정도다. 라떼도 윗세대들이 보기엔 온실 속의 화초였는데, 지금의 아이들은 멸균 상태로 가고 있다. 이렇게라도 고생시키는 것이 나쁘지 않다. 산을 타보면 더 이상 가기 싫은 순간이 온다. 그런데 그 순간을 잘 넘기면 또 한참을 잘 걷는다. 때로는 칭찬으로, 노래로, 등산 후 보상을 담보로 그 순간을 넘길 방법을 모색하는 것 자체가 경험이다.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달래고 상황과 타협하는 법을 배운다. '욜로, 한 번 사는 인생 즐기자' 하는 생각이 익숙한 시대다. 하지만 아이들이 고생이 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 있다면 기꺼이 직면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 좋겠다. 아이들이 "왜 해야 해요?"라 물으면 "뿌듯하잖아. 이런 우리가 멋지잖아. 너희들이 자랑스러워"한다. 이런 이유만으로도 사서 고생하면 좋겠다.



아이들이 산을 힘들게만 기억하지 않는 것은 세 번째 이유인 '자부심' 때문이다. 등산이 끝나고 지면에 땅을 딛는 순간 폭풍 칭찬 세례를 아끼지 않는다. "엄마는 너희들이 못할 줄 알았어. 아까 그렇게 다리 아프다고 하더니 결국 해냈네! 너희 나이에 이건 정말 대단한 거야!" 이뿐이랴. 엄마니까 칭찬하겠지 생각하던 아이들에게 모르던 어른들이 칭찬하니 효과가 배가된다. 산에 오르다 보면 등산객들을 종종 마주친다. 등산하는 사람들은 알겠지만 서로 모르는 사이더라도 마주치면 "수고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며 으레 인사를 나눈다. 특히 아이들과 함께 오니 대부분 "이야! 여기까지 올라왔어? 대단하다" "너희 같이 어린아이들을 여기에서 본 건 처음이다." 하며 감탄한다. 이때 아이들의 어깨는 하늘로 솟는다. 축 처진 발걸음이 다시 살아난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성취로 인한 자기 효능감은 중요하다. 산을 통해 스스로도 어려워 보였던 과제를 해보니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경험이 쌓인다. 칭찬은 아이를 산 타게 한다.


정상 도달! 5분 전에 주저앉아 있던 둘째가 마이쭈 먹고 살아났다



마지막으로 산은 아이를 깊이 이해하기에 좋은 도구다. 산에 오르기 시작하면 첫째는 초반에 툴툴댄다. "다리가 아픈 것 같은데, 천천히 가면 안 돼요?" 한다. 불안이 높은 편이고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아이기에 뭐든 시작할 때 부정적인 부분을 먼저 본다. 하지만 이제 안다. 저 마음을 달래주면 나보다 산을 더 잘 탄다는 것을. "힘들어? 그렇지. 그런데 우린 알잖아! 올라가다 보면 좋은 거! 저 앞에 조각상 곧 나올걸!" 둘째는 처음엔 마냥 긍정적이고 해맑다. 하지만 스스로 힘들다고 느끼는 순간 에너지가 뚝 떨어져 포기하려 한다. "엄마, 집에 가고 싶어요." 이번에도 정상 직전에서 다시 돌아 내려가고 싶다고 한다. 정상이고 뭐고 턱 주저앉아버린다. 이때 간식, 이야기 들려주기 등 타협이 성사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컨디션이 좋아진다. 아이마다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타이밍과 방법이 다르다. 아이 스스로뿐 아니라 부모도 내 아이가 어떤 상황에 부정적 감정을 꺼내는지, 해소 방법은 무엇인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산은 막막함, 체력적 고갈, 지루함 등 부정적 감정을 마주할 요인이 많다. 이것이 아이를 이해하고 감정을 함께 다룰 기회다.





산에서 뜻밖의 추억을 만들어주신 아주머니


경주 남산은 듣던 대로 박물관 같았다. 등산로에서 조금 떨어져 나와 있는 조각 작품 앞에서 김밥을 먹으며 쉬고 있는데 한 아주머니께서 아이들의 뛰노는 모습을 예쁘게 바라보셨다. 어떻게 애들을 데려왔냐며 아이들과 가기에 적당한 등산로도 추천해 주시며 같이 가자고 하셨다. '같이 간다고? 아이들과 속도 맞추시기 힘드실 텐데. 중간중간 쉬면서 가고 싶은데, 처음 보는데 함께 가도 괜찮을까?' 낯선 이의 제안이 달갑지 않았다. 아이들은 달랐다. 신나 하며 아주머니 손까지 잡았다. 얼떨결에 우리 부부도 뒤를 따랐다. 한 걸음씩 오를 때마다 서로에 대한 이야기가 쌓였다. 아주머니는 이 산을 100번도 넘게 올랐고, 시를 쓰시며 등단까지 하신 분이었다. 헤어질 때는 내 첫 마음이 부끄러울 정도로 '남산의 추억'이 되었다. 둘째는 아주머니 가시는 손에 마지막 남은 젤리 봉투를 건넸다. 헤어진 이후 여운이 짙었다. 새로운 지역을 온몸으로 느끼고 싶어서 온 한 달 살기인데 정작 이곳 사람들과 마음을 나눌 준비를 안 했던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른인 우리도 산을 통해 배운다. 이 날 저녁 경주 남산이 준 뜻밖의 추억을 아이들과 함께 곱씹으며 다음 산을 기약했다. 이쯤이면 학대라는 표현에 대한 항변이 되었을까?



둘째의 남산 그림일기, 산에서 만난 할머니를 그려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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