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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비리그 Oct 18. 2024

감동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5가지 증거

우리가 매일하고 있는 이것들은 당연한 게 아니다 

사고에 머리를 크게 부딪혀 뇌에 핏줄이 터져 피가 찼다. 전문용어로 외상성 경막하 출혈이 일어났다. 나는 이틀 동안 혼수상태였고 뇌가 피를 흡수하지 않으면 혈전이 생겨 뇌졸중이 올 수 있는 위험한 순간이 내게 닥쳤다. 뇌가 피를 흡수하지 않으면 뇌를 열어 수술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외상성 경막하 출혈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교통사고와 같은 외부 충격으로 인해 뇌를 둘러싸고 있는 경막 안쪽 뇌혈관이 터지면서 뇌와 뇌의 바깥쪽 경막 사이에 피가 고이는 질환을 의미한다. 

경막하 혈종은 뇌를 압박할 수 있기 때문에 매우 긴급한 상황에 해당되고 조치가 늦어지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고 한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는 머리가 깨질듯한 고통에 정신을 못 차렸다. 

한국에 있어야 할 아빠와 여동생이 내 앞에 있는 것을 보고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다. 

머리가 너무 아파 나의 든든한 기둥이고 안식처인 약혼자인 케니를 찾고 또 찾았다. 

애타게 불렀지만 케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내 앞에서 분주하게 왔다 갔다 하고 내게 말을 걸었지만 나는 말을 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 나는 당연히 꿈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정신을 잃었고 몇 시간이 흘렀는지 모르겠다. 

눈을 떴다. 골반과 다리에 끊어질듯한 고통이 뒤따랐다. 

누군가가 내 허리를 갈겨 찢는 듯한 고통에 다시 케니를 다급히 찾았다. 

내 동생이 나의 정신없고 다급한 모습에 안 되겠다 싶었는지 내게 조용히 와 케니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사실을 전했다.


'이건 꿈일 거야.'라고 강하게 부정하며 눈을 질끈 감고 이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내 몸에 투여되고 있는 여러 가지 약물들이 나를 억지로 깊은 잠에 빠트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 채 다시 정신이 들었다.

내 허리 쪽에 묵직한 돌이 얹어져 있는 느낌이어서 뭔가 싶어서 만졌는데 철판 같은 게 허리에 고정되어 있었다.

알고 보니 내 골반이 두 동강이로 부러져 그것을 붙여서 철심으로 고정해 박아 놓은 것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목이랑 어깨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아팠다. 

알고 보니 갈비뼈, 발목, 쇄골뼈, 목뼈가 부러져서 더 이상 손상이 가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을 해 놓았다.

의사는 사고가 날 당시 척추가 부러지지 않고 신경을 건드리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하셨다.

여전히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영어는 전혀 기억이 안 났고 한국말도 머리로는 이 문장을 말해야지 하고 말하려고 했지만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내 입과 혀는 통 말을 듣지 않았다. 


누군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듯했다. 

내 마음대로 입이 움직여지지 않았고 모든 것이 10배 느려졌다. 

머릿속에는 뿌옇게 안개가 꼈다. 

지금 닥친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파악하려고 뇌를 쓰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멍한 상태에서 아무런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이대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말을 못 하게 되면 어떻게 살아가야 하지? 

케니랑 빨리 만나서 이 얘기를 다 해줘야 하는데 지금 내 몸이 말을 안 듣는다고 말해야 하는데 항상 내 옆에서 나를 지켜줬던 케니가 없었다. 


설마 케니가 사망했다고 꿈에서 들었었는데 사실인 걸까? 

나는 사실일까 봐 무서워서 케니가 어디 있냐고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수천 가지의 궁금한 점들이 목까지 차올랐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사망했다는 얘기가 현실임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다. 케니도 나처럼 다쳐서 수술받고 잘 회복하고 있을 거라고 믿었다.

몸이 갈기갈기 찢는 듯한 고통에 케니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냥 고통을 잊기 위해 깊은 잠에 들고 싶었다.

깨어 있을 때면 간호사에게 진통제를 달라고 울부짖었다.

진통제를 맞고 깊은 잠에 들었을 때 내 뇌는 다행히 머릿속에 고여있던 피를 흡수하는 기적을 일으켰다.

피를 흡수하지 않았으면 혈전이 생겨 뇌졸중으로 얼굴이 마비가 될 수 있는 긴급한 상황을 모면했다.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통보다 더 현실적인 괴로운 것들이 내게 닥쳐왔다. 

대, 소변이 내게 큰 시련을 준 적이 없어 대, 소변을 문제없이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함인지 몰랐었다.

소변줄을 달고 소변을 배출시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소변이 배출되는 느낌은커녕 항상 방광에 뭐가 차있는 듯해서 항상 소변이 마려운 느낌이 들었다. 

오줌이 잘 빠져나가고 있는지 확인하지 않으면 방광이 터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간호사 호출 버튼을 30분마다 누르며 간호사에게 내 소변이 잘 배출되고 있는지 물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24시간 내내 이 느낌을 가져야 한다니 차라리 깊은 잠에 빠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대변이 더 큰 문제였다.


화장실에 갈 수 없어 기저귀를 했지만 기저귀에 대변을 본다는 자체가 너무 어색하고 창피했다. 

다행히 속이 메스꺼워 밥맛이 없어 식욕이 전혀 없어 대변 만드는 일을 늦출 수 있었다. 

수액으로 영양분을 섭취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소화계가 작동하기를 멈췄는지 3일이 지나고 4일이 지나도 대변은 감감무소식이었다. 

의사는 이를 위험하다고 판단해 설사로 대변이 배출될 수 있도록 돕는 약을 내게 먹였다. 

먹고 얼마 있지 않아 고장 난 줄만 알았던 내 대장은 마치 물고기가 물 밖에 나와 팔딱이는 것처럼 장이 꿀렁꿀렁 팔딱거렸다. 그리고 내가 항문을 조절할 시간도 없이 항문에서 따뜻한 물질들이 주르륵 나왔다.

배에서 무언가가 비워지는 시원함과 동시에 이 대변을 갈아줄 간호사님에게 죄송하다는 마음, 부끄러운 마음에 어쩔 줄 몰랐다.

대, 소변을 스스로 처리할 수 있다는 일이 대단하고 감사한 일일지 알게 되는 첫 순간이었다. 

어릴 때부터 대, 소변보는 것을 서른 중반인 지금까지 빠짐없이 해왔기 때문에 매일 해야 하는 것 중 하나라고만 여겼는데 자신의 몸을 병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먹고 싸는 일이 인간의 인생에 있어 제일 중요한 일임을 알았다. 

자신이 이루고 싶은 목표가 있어도 매일 대, 소변을 스스로 처리하지 못한다면 삶의 목표고 뭐고 매일 이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감에 하고 싶은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대, 소변과 싸워야 하는 힘든 나날을 보낼 것이다.

 

여동생은 나를 집중적으로 케어해 주기 시작했다. 

먹지 않는 나를 위해 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집에서 직접 요리해 가져와 나를 먹였다. 

누워서 음식을 먹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고생하고 있는 동생과 아빠를 보며 조금씩 먹기 시작했다. 

몸이 한국의 맛을 기억이라도 하는 듯 닫혔던 문을 조금씩 열기 시작해 음식을 받아들였다.

선생님인 여동생은 다행히 방학기간이었고 사고가 난 나를 위해 캐나다까지 와서 병간호를 했다.   


하루 이틀이 지날수록 일상생활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먹을 음식을 만들며 먹으면서 대화를 하는 그 순간이 값진 시간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무엇을 위해 그렇게 바쁘게 살았을까, 매일 우리에게 주어지는 식사시간을 행복한 시선으로 보지 못했을까 그저 끼니를 때우는 한 행위로만 생각했을까,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식사 준비를 하는 그 순간이 매일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감사한 시간임을 이제야 알았다.

같이 요리를 하면서 식재료에 대한 감사함 그리고 요리에 대한 재미를 느낄 수 있다. 

완성된 요리를 맛보며 어떤 점이 부족한지 개선하면서 요리실력도 키울 수 있다. 

무언가를 같이 완성했다는 것에 뿌듯함과 성취감도 느낄 수 있다. 

맛있는 요리를 먹으면서 나누는 얘기를 통해 서로가 가지고 있는 생각, 고민등 서로에 대해 더 깊이 알 수 있는 시간을 만들 수 있다.

케니와 같이 요리했던 적이 거의 없었다. 

요리를 해도 내가 요리를 하고 그가 설거지를 했다. 

바쁜 직장일에 치여 간단히 먹는 것을 선호했고 나가서 사 먹는 게 더 편했다. 

요리를 한 번 시작하면 재료를 씻고 썰고 요리하고 설거지하는 과정이 길다고 생각했고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었다.

그와 밥을 먹을 때도 대화는 했지만 시간이 지나 관계가 편안해진 후로부터는 같이 드라마를 보면서 밥을 먹는 날이 더 많아져 자연스럽게 대화의 시간이 줄어들었다.

그 당시는 나는 '케니와는 평생 같이 살 거니까 대화할 시간이 많을 거야.'라며 먹는 데에 집중하고 눈은 TV를 향했었다.

바쁜 하루 중 유일하게 마주 앉아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에 어떤 얘기든 서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더 알아가려고 했었으면 하는 후회가 들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매일하고 있는 것들에서 그냥 해야 하니까 별생각 없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를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소중함과 감사함을 잘 알지 못한다. 

나 역시 병원에서 생활을 하면서 아프지 않고 별일 없이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이 대단하고 기특한 것임을 알았다.


병원 생활을 하면 상황에 따라 대, 소변배출부터 샤워, 머리 감기, 먹고 싶은 음식 먹기, 하고 싶은 것을 하며 휴식취하 기를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몸이 불편한 정도에 따라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도 많다.

병원에 있으면서 나는 샤워를 단 한 번도 못했다. 

일회용 비누 타워로 몸을 닦을 수 있는 정도였다.

머리도 못 감아 머리카락이 비듬과 함께 떡져있었고 물 없이 감을 수 있는 샴푸로 감아봤지만 물로 샴푸를 헹궈낸 것이 아니어서 그런지 샴푸찌꺼기와 비듬이 결합해 더 찝찝했다.

나 스스로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할 수 있음이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대견한 일인지 알았다.

병원에 입원한 지 한 달이 넘었을 때 나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간호사에게 머리 감고 샤워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한국에서는 목욕탕에 가서 남의 벌거벗은 것도 보고 내 벌거벗은 것도 보여주는데 이걸 여기서 못할 리가 뭐가 있겠는가.

물론 나만 벌거벗어야 하지만 간호사라는 직업을 가졌고 모르는 사람이고 같은 여자라고 생각하니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때는 부끄러운 것이고 뭐고 그냥 이 몸뚱이를 깨끗하고 흐르는 물로 씻고 싶었다.

간호사가 머리를 감겨주고 물로 비듬이 섞인 떡진 머리를 손으로 조물조물하며 샴푸로 거품낼 때의 시원함은 감격스러웠다. 

샤워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이렇게도 행복한 일이었다니.. 

물을 아껴서 지구가 깨끗한 물을 오래 보존할 수 있도록 앞으로 환경도 잘 보전해야겠다는 마음마저 들었다.

따뜻한 물로 몸을 적시니 따뜻한 토닥임에 소름이 돋았다.

나 혼자 샤워를 하게 된다면 어떤 더 큰 감격을 느낄까 생각을 하던 참에 어느새 간호사는 샤워를 마무리하고 있어다.

양치질, 샤워, 머리 감기는 매일 하는 당연함이어서 아무 도움 없이 혼자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함을 우리는 잊고 산다.

일에 치여 피곤해 씻기가 귀찮음에 누가 씻겨 줬으면 하는 마음도 들 때도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시선으로 일상생활을 바라본다면 매일 소소한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비누, 샴푸, 바디워시, 로션, 치약향을 내가 좋아하는 취향으로 바꿔 내가 좋아하는 향을 맡으며 스트레스를 풀 수도 있다. 이 시간만큼은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는 시간으로 생각을 한다면 오히려 이 시간이 기다려질 수 있다.

 

2주가 지나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내 몸뚱이를 일으킬 수 있었다.

갈비뼈, 목, 골반, 발목부상으로 걷기가 힘들어 하루종일 누워있거나 누군가가 나를 휠체어를 태우고 방문 밖으로 데려나가야 했다.

바깥활동을 좋아하는 나는 스스로 걷지 못하고 밖으로 나가고 싶으면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너무 답답했다.

누구의 도움 없이 가고 싶을 때 어디든 스스로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돈으로 절대 살 수 없는 감사함이었다.

어느 장소에 가고 싶을 때 언제든 갈 수 없고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면 인간이 갈망하는 기본적인 자유의지가 박탈되어 많은 시련을 겪게 된다.


내가 머물었던 재활병원에는 다리가 없는 사람들, 하반신 마비가 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나는 다리는 멀쩡히 잘 붙어 있었고 신경도 마비가 되지 않아서 재활치료만 잘 받으면 나중에는 일반 사람처럼 잘 걸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감사했다.

사람은 어쩔 수 없이 자기보다 더 악조건에 있는 사람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나와 비교를 해 감사함을 느끼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되었다.


내 몸에 붙어있고 자유롭게 쓸 수 있었어서 그저 별생각 없이 막 다뤘던 팔, 다리, 장기들에게 미안했고 앞으로 하나하나의 쓰임새에 감사함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는 내 몸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음식을 넣고 싶지 않았다. 

좀 더 건강한 식재료들을 내 장기들에게 공급해 몸이 자기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협조를 할 생각이었다.

내 몸에 대한 감사함을 하나하나 깨달으면서 감사함의 영향이 내 몸에 미쳤는지 혼미했던 내 정신도 조금씩 차려졌다.


내가 30년 넘게 감사함을 잊고 목표를 위해서라면 소중하게 여겨야 할 가치들을 무시하며 앞만 보고 달려왔던 것이 큰 실 수였음을 너무 늦게서야 알았다.

내가 깨어있는 지금 이 현실에서 행복을 찾으려고 생각하지 않고 미래의 나만 보며 조금만 더 고생하자 하면 편하게 케니와 살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했었던 것이 예측불허한 삶에서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목숨을 잃을뻔한 사고를 당하고서야 알았다.

 

케니가 더 이상 내 옆에 없다는 사실을 직면하기가 두려워 그의 얘기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고 피했었다.

병원에 입원하고 누워서 그의 장례식을 보면서 말도 안 되는 현실에 울부짖으면서도 이건 꿈일 거야라고만 생각하고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또 부정했었다.

몸이 찢어지는 고통을 방패로 삼고 케니의 죽음을 직면하는 것을 계속 피했었다.


참고 참아왔던 보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던 것이 터져버렸다. 

사고에 대한, 케니에 대한 수천 가지의 질문들이 목에 꽉 차 토하기 직전이었는데 마침내 주체할 수 없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골반이 찢어질듯한 고통보다 더 잔인한 고통이 내게 찾아오는 중이었다.

잔인한 고통을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한 번 더 강조하고 싶다.

어릴 때부터 매일 지속됐기 때문에 당연한 건 줄로만 알았던 말하기, 먹기, 배변하기, 잠자기, 목욕하기, 걷기는 당연한 것이 아닌 일상에서의 감사와 감격의 연속이다. 


나는 결국 사고가 남으로써 비극적이고 잔인하게 이 사실을 알았지만,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은 간접적으로나마 나의 경험을 통해 매일 우리가 대견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감동으로 매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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