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이비리그 Oct 16. 2024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죄책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하는 착각에서 저지르는 실수

2024년 1월, 구름이 껴서 흐렸지만 토론토 겨울치고는 많이 춥지는 않았던 아침이었다.

88년생 약혼자 케니는 올해가 자신이 태어난 용의 해와 같은 해라며 모든 게 잘 될 거라고 내게 호언장담을 했었다.

케니와 나는 2024년도는 좀 더 열심히 의미 있게 살아보겠다고 운동도 같이 열심히 하고, 본인이 하고 있는 일에 집중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저녁형인 그가 본업을 마치고 남는 시간에 부업을 하겠다고 한국인 학생과 영어 과외를 시작했다.

금요일 밤에는 늦게까지 여유를 만끽하고 토요일 아침에는 여유롭게 늦잠을 자고 싶었을 것이다.

우리는 경제적인 안정을 가지기 위해 조금만 더 열심히 일하자고 서로를 다독였기에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었다.

케니는 매주 토요일마다 아침 8시에 과외를 한다고 일찍 일어났다.

대견하고 멋있었던 그에게 나는 말로 표현해 준 적이 없었다.

표현에 서툴렀던 나는 경상도 여자라는 핑계를 대고 무뚝뚝한 여자라고 단정 짓고 지내왔다.

2023년 11월 겨울이 다가올 무렵, 나는 핫요가의 매력에 빠졌다.

병원에서 일을 하고 있어서 토요일도 출근을 해야 했다.

일 가기 전 핫요가를 하고 가면은 좀 더 일을 효율적으로 잘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전 9시에 열리는 핫요가 클래스에 매주 토요일마다 참석하고 싶은데 나를 헬스장까지 데려다줄 수 있냐고 케니에게 물었다. 

그도 영어 과외를 마치고 나랑 같이 헬스장 가서 아침 운동을 하고 오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찌뿌둥한 몸을 핫요가로 풀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뻤다. 

운전을 안 하고 있었던 나를 위해 케니는 아침 8시 40분에 과외를 마치고 9시에 시작하는 요가교실에 데려다준다고 매주 토요일마다 바빴다.

저녁형인 그가 잠자는 시간을 조절해 토요일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아침에 잠을 더 자고 싶었을 텐데 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준 그에게 감사했다.

감사한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 게 후회가 됐다.

고마운 마음을 표현해도 모자랄 판에 나는 이기적으로 행동했다.

토요일 아침 종종 과외가 늦게 시작할 때가 있었다.

늦게 끝나면 핫요가 교실에 늦을까 봐 그에게 빨리 가야 한다며 압박을 줄 때도 있었다. 

정말 나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 

요가 클래스에 5분 늦는 게 그 당시에는 왜 그리 싫었는지. 

요가 클래스는 인기가 좋아 오픈하면 사람들이 순식간에 꽉 차기 때문에 좋은 자리에서 요가를 하고 싶었고,

선생님이 잘 보이는 명당에서 요가 수업을 받고 싶다는 이상한 고집이 생겨 늦기 싫었던 것 같다.

그날 아침, 내 고집에 못 이겨 제시간에 요가 수업에 도착했지만 케니의 마음은 나의 투정으로 인해 기분이 좋지 않았을 것이다. 그와 마지막이 될 줄 몰랐던 그날 아침에 그에게 말로써 상처를 줬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와 달리 나는 아침형 인간이었다.

7시까지 출근해야 했기 때문에 밤 11시가 되면 무조건 잠이 들었다.

보통 금요일 밤에 11시쯤 잠이 들고 토요일에는 일찍 아침을 시작해 사랑하는 사람과 운동을 하고 브런치를 먹는 것을 좋아했다. 

하지만 저녁형인 케니는 밤늦게까지 나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고,

토요일 아침에는 잠을 충분히 자고 여유로운 아침을 보내고 싶었을 것이다. 

심지어 나는 지금까지 같이 약 9년 동안 함께한 약혼자에게 어떻게 금요일 밤을 보내고 토요일 아침을 맞이 하고 싶은지 묻지도 않았고 얘기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며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왔다. 

하지만 케니는 아침형 인간인 나를 항상 존중해 줬다. 싫은 소리 불평 한마디 없었다. 

만날 때부터 약 9년 동안 변함이 없는 그의 모습이 처음에는 감사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감사함이 익숙함으로 되었고 그는 나한테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의 배려심, 자상함이 너무나도 소중하고 감사했던 선물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사고가 났던 토요일 아침, 과외가 평소보다 늦게 시작했고 나는 요가 교실에 늦을까 봐 발을 동동 구르고 있었다.

8시 50분이 되자 과외를 하고 있는 케니의 방 문 앞에 가서 지금 집에서 출발을 해야 제시간에 도착해 요가를 시작할 수 있다고 슬슬 압박을 줬었다.

그때의 나를 생각하면 정말 한 대 때려주고 싶을 만큼 나 자신이 싫었다.

요가 교실에 조금 늦는 게 뭐가 큰일 날 일이라고 그렇게 케니에게 투정을 부렸는지.

나라는 인간은 그에게 투정을 부리며 다시는 같이 돌아오지 못할 현관문을 나갔다.

그때가 마지막으로 우리가 함께 현관문 밖을 나가는 순간이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함께 미래를 그려 나갈 것을 약속하고 구매한 우리의 첫 집에서 그와 함께한 마지막 아침을 나의 투정으로 맞이했던 것이다. 

케니가 그날의 아침의 나를 용서 못하면 어떡하지? 나를 원망하면 어떡하지? 이미 원망을 하고 있는가? 내 잘못이 아니라며 나를 용서해주고 있을까? 

나는 요가 클래스까지 가는 길이 그와 할 수 있는 마지막 대화인 줄 몰랐었다. 

마지막 대화를 기억하고 싶어 함께 나눴던 대화가 어떤 내용이었는지 떠오르려고 안간힘을 쓰는 중이지만 기억나지 않았다.

그날 요가클래스를 마치고 나는 일을 가야 하는 상황이었고 케니는 사촌이 우리 집 현관문에 벨을 다는 것을 도와주러 온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분명 거기에 관한 대화를 나눴지만 구체적으로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사랑하고 감사하고 미안하다는 말을 넘치도록 했을 텐데. 

나는 내 소원대로 늦지 않고 9시 정각에 딱 맞춰서 요가 클래스에 도착했다.

늦을까 봐 걱정했던 것이 없어지자 그제야 그에게 '자기 미안해 수업에 늦지 않고 정시에 도착해서 나는 수업을 잘 받을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라고 문자를 남겼다.

그는 마음이 상했는지, 운동에 집중하느라 내가 보낸 문자를 못 봤는지 그에게서 답을 받지 못했다.

마지막까지 그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내가 싫었고 용서할 수 없었다.

나의 그릇은 이 모양이었다. 큰 사람이 아니었다. 

나만 생각하고 내가 하고 싶은 것은 꼭 해야 하는 성격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와 달리 그는 큰 사람이었다. 

남을 위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누를 줄 도 알고,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줄 주 아는 마음이 커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었다.

바다 같은 그의 커다란 마음에 푹 안겨서 나는 스스로의 시간에 갇혀서 왔다 갔다 헤엄치는 새끼 물고기에 불과했다.

큰 못된 짓을 해야 큰 죄책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아프고 상처되는 말, 배려하지 못한 행동을 하면, 나중에 고스란히 죄책감으로 돌아온다.

물론 사고의 원인이 내가 아님을 잘 알아도 그전에 판단하고 결정 내렸던 나의 모든 행동을 사고와 엮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 행동을 안 했었더라면, 내가 이렇게 했었더라면, 내가 그한테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하며 죄책감을 가졌고, 

그날 사고로 케니가 하늘나라로 떠나게 된 잔인하고 비극적인 결말을 내 탓으로 돌렸다.

핫요가에 빠져 사고가 난 그 헬스장을 애초에 선택한 것은 나였다. 

다른 헬스장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 헬스장이 집에서 가장 가까운 헬스장이어서 아무 고민 없이 그곳을 가기로 결정했었다. 

가까워서 선택한 곳이었는데 이런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여기서부터 나의 죄책감은 시작되었다.

그러자 나의 죄책감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그러니 운동을 좋아하는 내 모습까지 아니 도전적이고 모험심이 있는 나의 본질에 대해 부정적인 마음이 들었고 내가 싫었다. 

매일 공격하는 말로 나라는 존재를 때리고 또 때렸다. 

죄책감 꼬리물기는 9년을 거슬러 올라가 나와 그가 만난 첫날까지 이어졌다.

내가 케니를 만났던 모임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를 만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살아왔을 텐데.

그가 사귀자고 했을 때 그냥 그때 정중히 거절했더라면, 그는 계속 잘 살 수 있지 않았을까.

나는 캐나다 토론토에 온 지 약 5개월 만에 케니를 만났다. 

한국인인가라는 착각을 할 정도로 한국 문화를 잘 알고 있었고 나보다 한국 드라마와 영화를 사랑했다. 

한글 읽는 연습을 혼자서 하고 한글을 보고 읽을 수 있을 정도로 한국을 사랑했다. 

하지만 그는 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고, 5살  때 캐나다로 이민을 온 중국계 모리셔스인이었다. 

당시 영어가 자유롭게 되지 않아 풀이 죽어있던 내게 자신감을 줬고, 배려심과 나에 대한 관심을 보여줬다. 

무엇보다도 나를 웃게 만들었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면 내게 서툰 한국말을 섞으며 나를 웃게 해 줬던 그는 나의 비타민이었고 토론토에 가족이 없어 외로웠던 내게 빛이었다. 

그는 나의 베스트 프렌드이자 남자친구이자 나를 보호해 주는 부모님 같은 존재였다는 걸 그가 살아있을 때는 몰랐다. 그냥 내 옆에 있어주는 당연한 존재였다. 

1년, 2년이 지나 5년이 되고 해가 지나갈수록 내게 변함없는 그의 모습에 그에 대한 신뢰는 100%였고 그는 내가 외롭고 공허할 때 나를 채워주는 나의 따뜻한 온돌 같은 존재였다. 

나의 예민함과 괜한 고집으로 그와 싸울 때면 그 순간 미운 마음에 그가 없는 토론토를 상상해 본 적도 있었지만, 

내게 그라는 존재가 너무 익숙하고 당연해져서 어느새 그가 내게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9년이 되자 가보지 않은 곳을 찾는 것이 더 빠를 정도로 나와 케니는 토론토 구석구석 다녀 거의 모든 곳이 추억으로 물들었다.

새로운 곳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모험하는 것을 좋아한 나는 쉬는 날만 되면 케니를 데리고 가고 싶은 곳에 갔다.

우리는 구글맵에 가고 싶었던 한 곳을 검색해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곳으로 차를 타고 달려갔다. 

새로운 곳을 탐험했고 근처 레스토랑에 가서 새로운 음식들을 시도했었다. 

나는 이 즉흥적인 나들이를 통해 자유를 느꼈고, 그와 새로운 곳을 모험하는 것이 삶의 즐거움이었다.

이런 취미가 생긴 이유는 코로나로 해외에 나갈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최근에 집을 사서 허리띠를 졸라매고 돈을 아껴야 했었기 때문에,

멀리 가지는 못하고 토론토 근교 여행을 자주 다녔었다. 

그래서 내겐 캐나다 온타리오주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거의 모든 곳이 케니와 추억이 담긴 장소였다. 

그래서 어딜 가든 곳곳에 케니와 나의 모습이 보였다. 

집 안에 있으면 케니와 함께했던 생활이 기억나 괴로웠고 집 밖에 있으면 케니와 함께 다녔던 추억에 마음이 아팠다.

특히 케니와 다툼을 했던 장소를 지나갈 때면 강렬하게 그때의 모습이 그려졌다. 

나와 케니가 싸웠던 장면들이 뚜렷이 떠올랐다.

나의 짜증에 어쩔 줄 몰라하는 케니의 모습이 보여 미안한 마음에 눈물이 솟구쳤다.

폭식증을 앓고 있어 항상 예민해있던 나는 케니에게 나의 감정을 쏟아붓곤 했었다.

망할 놈의 나의 성격이 미웠다. 

독단적으로 행동했던 나의 이기적인 모습에 나 스스로가 싫었다.

거지 같은 성격 받아주느라고 고생했을 케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케니를 하늘나라에 떠나보내고 처음으로 그와 싸웠던 장소를 지나갈 일이 있었는데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추스를 수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나로부터 멀어져 가는 것 같아서 싫었다.

그와 나 사이에 시간들이 쌓여 나와 그의 사이가 멀어지게 만드는 것 같아 흐르는 시간을 멈추고 싶었다.

하지만 시간은 내가 끔찍한 일을 겪든 내 마음을 몰라주고 야속하게 흘렀다. 

나와 케니만 아는 장소들이 여러 군데 있었는데, 그 모든 곳에 가서 케니를 강렬하게 떠올려 내 옆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케니가 미치도록 보고 싶을 때는 항상 케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장소에 갔다. 

그곳에 가면 함께했던 옛 기억들이 떠올라 마치 케니가 거기에 서 있는 것처럼 뚜렷하게 이미지를 형성할 수 있었다. 

그 장소에 갔을 때 마침 그의 차와 똑같은 차가 주차되어 있으면 그 차에서 케니가 내려 '멍키'였던 나의 애칭을 부르며 달려올 것 같아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미친 듯이 두리번거리곤 했다. 

그의 차가 아니구나라고 깨달으면 '그가 진짜 이 세상에 없구나.'라는 것을 실감해 눈물이 차올랐다.

아이가 길을 잃어 엄마라고 부르며 울면서 급하게 엄마를 찾는 것처럼 나도 눈물범벅이 된 얼굴로 '케니'라고 부르며 그를 찾았다.

그렇게 헤매면서 찾다가 상상 속의 케니를 만나면 나는 케니의 존재를 더 느끼고 싶어서 내 폰에 녹음된 케니 목소리를 들었다. 

그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가 좋아했던 감자탕, 김밥, 닭강정, 햄버거가 생각이 난다.

고기를 좋아했던 그인데 내 위가 고기를 잘 소화시키지 못해서 그와 함께 고기를 즐기지 못했다. 

그는 나를 배려한다고 내가 좋아하는 된장찌개, 해산물 요리를 주로 먹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요리를 자주 함께 먹으면서 그 사람이 살아있는 동안 행복을 더 느끼게 해줬어야 했는데 하는 후회가 막심하게 밀려온다.

무엇이 됐든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취미든 음식이든 기회 될 때마다 함께 나누고 시도해 봐야 한다는 것을 너무 늦게서야 깨달았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한 번도 함께 해보지 않는 실수를 다시는 하고 싶지 않다.

사랑하는 사람을 통해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를 그저 흘러 보내지 않아야 한다. 

새로운 세계를 경험함으로써 혼자서는 절대 경험하지 못할 선물을 받을 수도 있고 몰랐던 나의 재능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칠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 주길 바라는 마음처럼 사랑하는 사람도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내가 좋아해 주길 바라는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내가 안 해봐서 좋아하지 않을 거 같다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같이 그것을 해보고 좋아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하다. 

케니의 취미는 게임이었다. 

게임을 안 하는 나에겐 게임이라는 취미가 처음에는 마음에 들지 않았었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내가 어릴 때는 한국에는 게임을 하면은 좋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 사회적 관습이 여전히 내 머릿속에 내재되어 있었다.

사실 게임도 새로운 세계에서 자신의 능력치를 활용해 성장시키고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좋은 취미라고 생각할 수 있다. 

내가 게임을 한 번도 안 해본 이유로 게임은 내가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했고 게임을 하는 시간에 다른 야외활동을 하는 것이 더 좋다고만 생각했고 고집했다. 

나는 케니를 밖으로 끌고 나가 내가 하고 싶은 하이킹, 새로운 트레일 모험하기를 같이 했는데, 

나는 케니가 좋아하는 게임을 단 한판도 같이 해주지 않았다. 

물론 그가 나한테 같이 하자고 조르지는 않았지만.

집에 있어도 자신이 좋아하는 게임을 하며 잘 즐기고 행복해하는 사람에게 바깥을 좋아하는 나를 만나 괜히 고생시킨 게 아닌가 죄책감이 들었다. 

나가기 싫은데 내가 가고 싶어서 그냥 가 준 것은 아닌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면 너무 사랑해 모든 것을 다해 주는 것처럼 내게 맞춰준 것이 아닌가.

부모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사하다고 머리로는 알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이 익숙함이 되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감사하다는 표현을 점차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나도 케니의 사랑을 듬뿍 받아 감사한 줄 머리로는 알지만 그의 사랑이 당연한 것이 되어버려 더 많은 것을 요구하게 되는 이기적인 나를 시간이 흐르면서 볼 수 있었다. 

모든 연인들은 서로를 사랑하기에 서로를 위하면서도 바라는 점이 많아져 사소한 것에 실망하고 싸우는 경우가 많다. 

함께할 날이 평생 동안 많이 남았다는 생각에 서로 해야 할 말들을 미루고 같이 함께 보내야 할 시간도 미룬다. 

고맙다고 감사하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대신 사소한 일로 서로에게 불만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작은 일로 싸우느라 시간을 낭비한다. 

예측불허한 삶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이 다 괜찮고 내게는 아무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오만하게 행동을 하기도 하고 후회할 행동을 저지른다.

케니는 나를 만나기 전, 이미 아버지를 암으로 잃어 큰 상실을 경험했다.

내가 그를 잃고 겪고 있는 고통스러운 아픔을 그는 이미 겪었을 것이다.

그는 현재 주어진 거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을 때 잘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알았을 것이다.

지금에 와서야 과거에 그가 내게 했던 질문들과 그의 행동들이 머릿속에서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어디든 가고 싶다고 하면 시간을 꼭 빼놓고 같이 가줬다. 

무엇이 먹고 싶다고 하면 나 몰래 그것을 사 와 서프라이즈로 나를 항상 웃게 만들었다.

내가 비싸다고 살지 말지 망설일 때 내게 항상 '이거 안 사면 후회할 거 같아?' 물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을 사지 않았을 때의 감정을 떠올릴 수 있었고,

내가 그 물건을 진심으로 원하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었다. 

그래도 정말 사고 싶은데 비싸다는 생각에 망설인다고 대답하면은 케니는 "내가 선물해 줄게." 하며 사주곤 했다. 

그가 항상 물어봤던 "이거 하지 않으면 후회할 거 같아?"라는 질문을 항상 왜 했는지 이제야 이해했다.

그는 누구보다 그에게 온 소중한 기회를 흘러버리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나는 9년 동안 같이 있으면서 왜 몰랐을까. 

그가 아버지를 잃고 겪었을 상실에 같이 아파하지 못해서 후회가 되고 미안하다. 

이쯤 되면 한번 의문이 든다. 

나는 이토록 그에게 미안한 거 투성이인데 그는 나랑 왜 9년 동안 만남을 가졌을까.

나라는 존재는 그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나는 그를 웃게 만드는 존재였을까? 

모진 말을 할 때도 있었던 나를, 

식이장애로 힘들어하는 나를 왜 시간을 들이며 끊임없이 사랑을 주고 돌봐주려고 했을까.

이렇게 나 자신을 공격을 하고 지쳐갈 때 마음속에서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잔인하지만 부정할 수 없는 말들이 내 귓가에서부터 머릿속까지 울려 퍼졌다.

"케니는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 그를 만나기 전에는 혼자서 잘 살아왔잖아. 

다시는 그를  만나지 못할 거니까 다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

나는 내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있었다는 것이 소름이 끼쳤다. 

왜 그딴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는지. 

이 생각을 지우려고 머리를 세차게 왔다 갔다 흔들었다.

자기 파괴적인 말과 악마들이 나를 계속 공격하자 머리가 아프고 몸이 시들시들 약해졌다. 

그리고 그가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항상 아플 때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따스한 그의 손길이 너무 그리웠다.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는 내가 힘들어 보였는지 그날 밤, 그가 꿈에 나와 미소를 건넸다. 

꿈이 너무 짧았다. 

더 보고 싶은 마음에 다시 잠을 청했지만 그는 다시 꿈에 오지 않았다. 

내게 할 말이 있어서 온 건가? 그 미소가 잊히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 자체를 사랑해 왔고 여전히 사랑하고 있으니까 내게 더 이상 자책하지 말고 나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잠에서 깬 나는 그를 또 실망시킨 것 같아 미안함에 눈물이 흘렀다.

더 이상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항상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 조금씩 생겨났다.

하늘나라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그의 마음을 다시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또다시 그를 아프게 한다면 더 이상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의 몫까지 내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고 처음으로 생각이 들었다.

항상 나를 지옥의 구렁텅이에서 구해줬던 것처럼 그는 하늘나라에서도 여전히 내 삶을 구해주려고 손을 잡아 이끌어주고 있었다.

미안하고 감사한 마음에 눈물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눈물을 한바탕 쏟아내자 내가 겪고 있는 모든 과정을 글로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삶의 방향성에서 길을 잃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는 사람에게 내 이야기가 아주 조금이라도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고 싶어서 무작정 펜을 들고 글을 써 내려가고 있다.

애도란 정해진 기간도 없고 얼마나 극심한 고통을 겪는지 사람마다 다르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텅 빈 공간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이미 정해진 룰이 있는 것처럼 몇 살에 이래야 하고 몇 살에 이래야 한다라고 여전히 말하고 있다. 

하지만 예측불허인 삶에서 그런 룰을 정하고 실천하는 것은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었을 때 그 당시 할 수 있는 최선의 결정을 내려 실행했지만 예상치도 못한 극심한 슬픔의 결과를 줄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에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내렸을 판단이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 최선의 선택을 할 것이 분명할 것이기 때문에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 하더라도 내가 내렸던 결정과 다르게 결정을 내렸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렇게 말하면서도 나는 과거에 내렸던 나의 결정들을 후회하고 또 후회한다. 

나의 결정이 가져온 결과는 잔인하게 비현실적이고 비극적이어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언제 이 현실이 받아들여지는 수용의 단계가 올진 모르겠다. 

몇 년이 걸릴 수도 있고 끝까지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수용의 단계에 갈 때까지 글과 격렬한 대화를 할 것이다. 

대화를 제대로 못해 오해가 쌓였고, 

사랑하는 사람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내 입장에서 생각한 적이 많아 그를 아프게 했다.

너무 늦었지만 그에게 나의 감정을 낱낱이 알려주고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하고 싶었던 말들을 매일 하면서 사랑과 감사함을 표현하라. 

어떤 이유로 사랑하는 사람이 세상에 없게 되었을 때, 상대방에게 표현을 했던 자신에게 감사함을 느낄 것이다. 

표현을 했음에도 더 할걸이라는 후회를 할 수도 있겠지만 표현을 해서 후회를 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전 12화 감동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5가지 증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