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적 자유를 찾으려고 풀 레버리지 했다가 가장 후회하는 일
코로나 발생 후, 예상치 못한 위기로 기회를 잡아 부를 쌓은 사람,
위기 속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갈팡질팡하다가 부를 쌓을 수 있었음에도 잘 몰라서 기회를 놓친 사람들이 있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기회를 잡아야 하는지도 몰랐고 해외에서 무언가를 시작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그래도 기회를 잡고 싶어 온라인 강의도 듣고 유튜브도 시작하려고 준비했다.
재테크와 주식에 전혀 관심 없었던 나는 관련된 영상들을 찾아보면서 스스로 공부를 시작했다.
자본이 없을 때는 '레버리지를 통해 투자를 시작하는 것도 부를 쌓을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다.'라는 영상들을 보면서 '나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마음이 생겼고 그 마음이 시간이 지나면서 커져갔다.
아직 젊고 건강하니까 돈은 어떻게든 더 벌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거주하고 있는 캐나다 토론토도 집 값이 서울만큼 비쌌다. 물론 서울처럼 지역마다 집 값이 다르지만 비싼 곳은 서울 강남이랑 비슷했다.
집은 나와 약혼자가 평생 미래를 함께할 곳이고 주식처럼 쉽게 팔지 못하지만 시간을 벌어서 집 값이 결국에는 오를 수밖에 없는 확실한 투자라고 생각했다.
확실하게 오를 수밖에 없는 장소에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집값이 좀 떨어졌을 때 사놓으면 시간이 지나면서 5년, 10년 후에 수익이 발생할 거라 생각이 들어 약혼자에게 말을 꺼냈다.
나와 케니가 사고 싶은 동네에 집을 사려면 7억의 모기지 대출을 은행에서 받아야 했다.
그 시기에는 그저 열정과 할 수 있다는 마음 그리고 긍정적인 마음이 내 마음과 머리를 지배했었다.
우리는 건강하고 아직 젊으니까 함께 한다면 당연히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어디에서 왔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자신감이 내 마음속에 있었다.
할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가졌었던 케니와 달리 내게는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했다.
금리가 높아져 부동산 시장이 잠잠했던 시기여서 경제적 시기 때문에 집값이 떨어진 집을 선택한다면 좋은 수익으로 이어질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 생각에 꽂히니 다른 문제 상황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케니에게 나의 생각을 말하며 설득하려고만 했다. 오만함과 거만함이 가득한 사람은 자신에게 꽂힌 거 이외에는 잘 보지도 못하고 보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는 눈뜨고 귀가들리는 장님 귀머거리였다.
다른 사람들이 아무리 충고를 줘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나와 다른 생각을 말하는 이들의 말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들이 너무 보수적이라며 속으로 비판했다.
그 누구도 나의 오만하고 거만한 생각을 바꿀 수 없었다.
레버리지가 대출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레버리지는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처럼 이용하여 자기 자본의 이익률을 높이는 것이다.
다양한 레버리지가 있지만 나는 모기지 대출이라는 레버리지를 사용했다.
대출을 받기 전 대출을 한 후 매달 고정적으로 나가는 금액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충분히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 금액이 너무 많을 경우 거기에 대한 압박감은 크다.
한국과 달리 전세 개념이 없는 캐나다 토론토는 매달마다 렌트를 하던지 집을 소유해 거주해야 한다.
그때 당시에 방 두 개 있는 아파트를 렌트하려면 한국 돈으로 약 200만 원이 넘었다.
단순한 건지 무식한 건지 렌트하면서 낼 돈을 차라리 모기지 대출을 갚아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대출을 받아 집을 소유하는 것과 렌트를 하면서 매달마다 나가는 비용은 비슷하게 나가는데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소유한 집값은 오를 것이기 때문에 집을 소유하는 것이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한 달에 내 통장에서 약 200만 원이 빠져나가는 것이 내 삶에 어느 정도 영향을 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생각했던 거보다 돈 씀씀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여행을 가는 건 생각조차도 안 했고 비싼 식당을 가는 게 돈이 아까웠다.
필요한 게 아니면 쇼핑도 하지 않았다. 삶이 단순해졌다. 물론 필요하지 않은 소비가 줄어드니 돈도 아낄 수 있고 좋다고 하며 처음에는 좋은 점만 보였다.
직접 일하지 않아도 자동 수익화되는 것들에 관심이 많았던 나는 이 기회를 통해 유튜브를 제대로 공부해서 자동 수익화를 만들어 돈을 벌 수 있으면 모기지 대출을 갚아나가는데 도움이 많이 될 거라고 생각해 공부를 했다.
이것저것 영상을 만들어서 올리고 직접 녹음하고 편집을 해서 채널을 만들어 수익금을 100만 원까지 벌었던 경험을 운 좋게 가졌다.
하지만 그 당시 일 마치고 집에 와서 유튜브 영상을 만드느라 약혼자와 함께 할 시간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케니와 오랫동안 함께 시간을 했기 때문에 이 시기만큼은 미래의 우리를 위해 부를 쌓는데 집중하자라고 생각했다.
케니도 영어 과외를 하면서 수익을 늘려갔다.
그래도 주중에는 서로 함께하는 시간이 없었지만 주말에는 항상 함께하는 시간을 가졌다.
비록 여행을 당장 못 가더라도 이 시기에 돈 버는 것에 집중해 부가 쌓이기 시작하면 나중에 나이가 좀 더 들었을 때 많은 고생을 하지 않을 거라 확신했다.
처음에는 작은 눈덩이 돈으로 시작했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작은 돈이 굴러가는 속도가 붙으면서 불어나 큰 눈덩이가 된다는 것을 이미 책과 영상을 통해 알고 있어서 큰 눈덩이를 생각하며 괜찮을 거라고 나와 약혼자를 다독였다.
인간은 도전하기 앞서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져 쉽게 포기하거나 시작조차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알게 된 후로 나를 난관 속에 넣지 않으면 새로운 도전을 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모기지 대출이라는 난관에 나를 집어넣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 무모할 정도로 내 속에 내재되어 있는 자신감과 할 수 있다는 긍정만을 믿고 밀고 나갔다.
그 당시에는 나와 약혼자를 위해 시도해 볼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잘 결합해 가던 두 세계가 무너졌다. 큰 차사고가 예상치 못한 시간에 절대 예측할 수 없던 장소에서 당연한 일상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고된 하루를 위로해 주는 나의 취미는 핫요가였다.
핫요가를 하고 나면 뻐근한 몸도 풀어주고 복잡했던 머리와 마음을 잔잔하고 편안하게 해 줬기 때문에
핫요가에 빠져 매일 갔었다.
어느 토요일 아침, 주말에도 일을 했던 나는 일 가기 전 핫요가 클래스에 가서 에너지 충전을 하고 일을 하러 가고 싶어 핫요가를 갔다.
운전을 안 했던 나를 위해 케니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데려다주고 내가 수업을 받는 동안 그는 옆에 있는 헬스장에서 헬스를 했다.
다 마친 후, 그는 지하철에 데려다주려고 입구를 나서는데 그날 큰 차사고가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다.
물론 이를 알았다면 아예 이사를 그 동네로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래 살던 곳에서 행복하게 살면서, 모기지 대출 갚을 돈으로 약혼자와 여행을 다니며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 즐기고 좀 더 편안하게 생활을 했을 것이다.
사고라는 것은 예측을 못해 미리 대비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잘못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혼수상태에서 의식이 들고 사고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죄의식에 심하게 시달렸다.
나 자신을 끊임없이 자책하고 비난했다.
'내가 일 가기 전에 핫요가에 가지 않았더라면, 핫요가라는 취미를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집을 사지 않았더라면, 이사를 거기로 가지 않았더라면, 이사를 1년만 미룰걸, 이사를 가지 않고 원래 있던 곳에서 그냥 행복하게 살았더라면,
이건 다 내 오만함과 거만함에 대한 벌이야 나는 정말 최악의 사람이야.
이건 내 오만함과 거만함에 신이 노해서 나한테 처벌을 주는 거야.
이 사고는 나 때문에 일어났어.
나는 최악이야 정말 죽어도 마땅해.'라는 마음이 24시간 계속되자 우울에 빠졌고 내가 죽었어야 했는데라는 부정적인 마음이 머릿속을 장악했다.
나는 종교는 없었지만 그 착한 사람에게 이런 끔찍한 일이 왜 일어났는지 내가 알고 있는 신에게 묻고 또 물었다.
벌은 내가 받아야 마땅한데 왜 그 착한 사람을 데려갔는지 원망스러운 마음에 신들에게 따졌다.
마음이 너무 괴로워 어딘가에 의지하고 싶었다.
약혼자 집안이 가톨릭을 교회를 믿고 있어서 가톨릭 교회의 관점에서 죽음을 접근해 보았다.
나는 신부님에게 물었다.
"왜 그토록 순수하고 선량한 사람에게 이런 끔찍한 사고가 일어났어요?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아요."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당신의 잃음은 너무나도 마음 아프고 이런 일이 일어나서 안타깝고 슬픕니다.
당신이 의도해서 이 사고가 일어난 게 아닙니다.
우연적으로 사고가 발생한 겁니다.
그러니 당연히 당신의 잘못이 아닙니다.
그 타이밍에 시속 50에서 100으로 달리고 있던 차를 만난 이유를 우리는 설명할 수 없어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자식들을 사랑으로 포용하시는 분입니다.
절대 벌을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자신의 사람 한 분 한 분에 대해 그 걸음을 정하시고 그 길 자체를 기뻐하시는 분입니다.
하느님은 반드시 뜻과 계획이 있으신 분입니다.
인간인 우리는 왜 이 사고는 왜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반드시 하느님의 계획이 있으실 것입니다.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고 자신을 회개하고 뜻을 구하면 하느님께서는 반드시 안전하고 올바른 길로 당신을 인도해 주시고 그 답을 알려주실 거라 믿습니다."
혼란스러웠다.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기 때문에 이 사고가 우리는 왜 일어났는지 지금 당장은 모르지만 죄를 용서하고 뜻을 구하면서 나의 삶을 통해 하느님을 드러내고 영광을 나타내면서 살아가면 답을 구하게 될 거라는, 하느님의 계획이라는 소리에 반발심이 올라왔다.
"하느님, 세상 착하고 선량한 하느님의 자녀를 일찍 데려가신 이유가 뭔가요? 저를 벌하기 위하심인가요?
그를 살려주셨어도 저는 이때까지 오만하고 거만하게 살아온 저의 죄를 충분히 깊게 깨우쳤을 건데 어찌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갈라놓으셨나요?
하느님의 계획은 도대체 무엇인가요?
저는 이 남자와 오랫동안 알아가며 서로 다른 세계를 맞춰나가고 있고 미래를 위해서 집도 장만했고 2세 계획도 서로 얘기하고 있었는데, 왜 제가 꿈꿔오는 미래를 주시지 않습니까?
그럼 제게 바라는 주님의 뜻은 다른 것입니까?
그럼에도 죽을뻔한 저에게 숨을 불어넣어 주시고 사랑하는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음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저와 약혼자에게 일어난 사고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사고 후 나의 몸 상태를 봐주는 물리치료사가 불교를 믿고 있었다.
이 사고에 대한 답을 듣고 싶었던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에게 이 사고에 대해 물었다.
"물리치료사님 저는 선량한 사람에게 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난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앞으로 하고 싶은 것이 많았고 지금은 하고 싶은 것을 뒤로 미루고 돈을 모으는데 집중하고 있었어요.
하고 싶은 것을 같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 세상에서 사라졌어요.
저는 여기에 대한 답을 찾고 싶어요.
저 때문에 이 사고가 일어난 거 같아서 너무 괴롭습니다."
물리치료사가 내 말을 듣고는 이렇게 답했다.
"사고가 일어나는 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고 통제할 수 없어요.
사고가 일어나는 건 너무 슬프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 어느 누구도 예측하지 못하는 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기 때문에 슬퍼해야 하고 애도하는 건 당연합니다.
죽고 사는 것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연 따라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없어집니다.
모든 현상은 매 순간 서로서로 삶과 죽음이 교차합니다.
이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아야지 여기에 자신의 선입견이나 감정이 개입되면 힘들어집니다.
개입되는 순간 그 현상을 왜곡할 뿐 아니라 나를 공격해 내가 무너지고, 무너지는 나는 불안과 갈등과 두려움 속에 빠지게 됩니다.
삶과 죽음은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인연 따라 저절로 생기고 저절로 없어집니다.
이걸 그대로 수용하고 거기에 자신을 내맡겨 모든 현상의 진행을 보아야 합니다.
이 사고가 본인 때문에 일어났다는 생각이 현재 마음속에서 끝없이 발생하는 건 본인이 사랑하는 그와 함께 사고가 일어났고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당연히 그런 생각들이 들 수밖에 없어요.
마음속에서 끝없이 발생하는 자책감 죄의식을 일어나지 못하게 할 수는 없어요.
떠오르는 생각을 저항하면 할수록 생각은 더욱 강하게 떠오릅니다.
좋은 생각이든 나쁜 생각이든 어떤 생각이 일어나더라도 곧바로 이런 생각이 내 마음에서 일어나는구나라고 알아차리는 게 그 생각에 휘둘리지 않을 수 있어요.
본인은 슬픔과 자책감 후회감이 뒤섞여 있기 때문에 이것을 하나하나 알아차리는 것은 처음에는 정말 힘들 것입니다.
저절로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저절로 오고 가는 생각에 일일이 반응하지 않고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 힘들 수 있어요.
본인은 사고를 당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큰 슬픔을 겪었습니다.
지금은 애도하는 과정이어서 제 말이 크게 와닿지 않을 겁니다.
본인에게 일어난 사고가 왜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이미 사고는 일어났고 일어난 일을 과거로 되돌아가 다시 돌이킬 수는 없습니다. 애도하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시간도 필요합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에 칭칭 감겨서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매몰된 스스로를 공격한다면 현재가 죽은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면 당연히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 더 과거에 얽매이게 되는 거죠.
지금 여기에 있는 자신의 현 상태는 인연의 결과이므로 자신의 의지로 그 무엇을 더하거나 뺄 수도 없습니다.
그 인연의 결과에 저항하는 것은 소용없는 저항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있는 현상 그대로 받아들여야 다시 현재를 살 수 있습니다.
삶은 지금 이 순간입니다.
본인은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하기 때문에 이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지금 이 순간에 감사하고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할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머물러 자신이 목표하는 그 일에 집중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약혼자분은 좋은 사람이었으니 다른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나 좋은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이 종교마다 달라 혼란스러웠다.
현재 살아있는 사람들 중에 죽음을 경험해 본 사람들이 없기에 누가 옳고 그르다고 할 수 없다.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두 가지의 관점에서 죽음에 관한 답을 들어서 오히려 죽음을 좀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답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다.
어떤 믿음을 따를 건지는 나의 선택에 달렸다.
확실한 건 과거에 내가 했던 행동들에 얽매여 후회와 비난의 말로 나 스스로를 계속 공격하고 있어서 지금 이 순간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 뼈저리게 하고 있는 후회들을 앞으로의 내 남은 인생에서 하지 않도록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나만의 가치관을 적어서 아침마다 읽고 있다.
우리는 미래를 예측할 수 없으므로 겸손한 마음으로 모든 것을 대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미리 준비하자.
준비한 대로, 예측한 대로 되지 않아도 괜찮다.
삶은 본인의 선택에 따라 흐르는 것이므로 그 당시에 최선의 고민을 해보고 최선의 선택을 하도록 한다.
선택에 따른 결과는 자신이 어떻게 저항하거나 돌이킬 수 없다.
자신의 선택에 따른 후회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절대 돌이킬 수 없다.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면 거기에 감사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베푸고 나누는 삶을 살고,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그 선택을 했던 후회와 자책보다는 그 현재의 순간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면 된다.
이렇게 글로 적거나 말로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절대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서는 이것이 얼마나 어렵고 괴로운지는 알기 힘들다.
내가 지금 과거에 칭칭 매여 현재를 죽이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글쓰기라는 것을 선택했다.
내가 유일하게 현재에 집중할 수 있는 것을 택해 매일 하기로 한 것이다.
사람마다 현재를 살 수 있는 힘을 주는 것들은 다양하다.
누구는 춤, 게임, 노래 듣기, 요리하기, 책 읽기, 걷기, 달리기 등 본인에게 맞는 것을 택하면 된다.
한 없이 보고 싶고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들숨 날숨을 내뱉으면서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에 나라는 존재가 살아있음에 가슴 깊이 감사함을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