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혹시나 운이 좋게도 이 글이 여러분들에게 소개가 된다면, 느긋한 마음으로 보셨으면 좋겠다.
지금 어딘가 이동 중에 빠르게 훑어 보신다던가, 폰으로 무언가를 하고 싶다거나 하는 사람이 있다면 살포시 덮어두고 다음에 다시 읽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그저 바쁜일상속에서 느긋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그런 글이 되길 바란다.
1.
30대 초반 혼자 사는 남자의 하루는 무척이나 바쁘게 시작된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 준비를 위해 물을 맞으며 칫솔질을 하고, 그와중에 또 샴푸를 짜낸다. 머리를 빠르게 말리기 위해 조금 더 비싸게 준 헤어드라이어의 최대출력으로 머리를 말리는 중에도 스마트폰으로 이메일을 열어보고 오늘의 일정을 다시 점검해보곤한다. 엘리베이터를 불러놓고선 늘상 지나가는 출근길을 지도앱을 열어 "가장 빠른 길"을 안내 받고 버스가 언제쯤 도착할지를 확인하다간 엘리베이터문이 채 끝까지 열리기전에 몸을 밀어넣고 수많은 버튼 중에 가장 칠이 벗겨져 있는 닫힘 버튼을 누른다. 버스를 타면 저녁9시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스마트폰을 꺼내 언제든 뉴스를 꺼내 얼마전 발표한 아이폰12가 5G로 얼마나 더 빨라졌는지 따위를 찾아보게되는 그런 아침이다. 뭔가를 동시에 하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그런 압박으로 스스로를 눌러놓은채 똑같은 다섯번의 아침을 시작하곤한다.
빠른 속도를 정면으로 맞는 일상을 보내다보면 가끔은 천천히, 그저 실없이 시간을 보내는 시간들이 필요하기도 하다. 전투적으로 살아온 5일이 지나고나서 만나게 되는 휴일에는 그저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그 와중에도 한달에 한번쯤은 꼭 해야할 일이 있다.
점심으로 라면이나 하나 끓여먹고 낮잠을 자는 한심한 주말의 시간 속에 파 묻혀있다가 뭐라도 해야할 것 같은 불편함이 생기면 어슬렁 어슬렁 나와 자전거를 타고 머리를 자르러 이발관에간다.
미용실이나 바버샵 같은 낯간지러운 곳이 아닌 진짜 이발관.
한때는 나도 요즘 젊은 사람 답게 프랜차이즈 미용실을 다녔다.
-잘보이는 곳에 위치해 뜻 모를 외국어나, 유명하다는 누군가의 이름을 간판으로 달아놓은 곳
-온라인으로 30분 단위로 예약이 가능한 곳
-전화를 하면 사람보다 ARS응답이 먼저 말을 하는 곳
-예쁘고, 잘생긴 젊은 사람들이 모여 지나친 깍뜻함으로 인사해주는 곳
-기다리는 동안 온갖 메뉴의 커피를 가져다 주는 곳
-계산을 할 때 자꾸만 뭔가를 더 권하는 곳
-머리자르는 곳이라기 보다는 장사하는 곳
계산을 마치고 문을 열고 나설때면 15명이 넘는 인원이 저마다의 일을하며 뒷통수로 똑같은 말을 한다.
행복한 하루 되라고, 사랑한다고 이야기를 한다. 말하는 이도, 듣는이도 누구도 좋지 않을 이 거짓사랑 고백은 왜하게 된 걸까.맘편히 가기보단 한껏 꾸미고 가야할 것만 같은 그런 불편함이 있는 곳이다.
머리를 자를때는 무방비 상태로 나를 온전히 맡겨야 하는 시간인 만큼 그저 편안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이발관을 다닌다.
2.
영등포구청 반대편, 시끌벅적한 먹자골목을 쭉 지나 영등포구민회관쪽으로 가다보면 아파트 단지 앞 작은 상가에 '여러분이발관' 이라는 아주 작고 촌스러운 간판을 만날수 있다.
빨간색 파란색 흰색의 줄무늬가 돌아가는 사인볼이 보이지 않았다면 눈에 띄지도 않을 만한 아주 작은 한칸의 가게. 요즘에는 잘 쓰지 않는 '모범업소'라는 표현이 왠지 정겹다.
'컷트 6천원'
백반도 6천원에 먹기 힘든 요즘 가격까지도 정겹다.
언제부터인가 유행처럼 뉴-트로라며 어줍잖게 촌스러운'척'하는 요즘 것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여러분이발관은 가기로 마음 먹은 순간 부터 기분이 좋아지는 곳이다.
가기 전에는 전화를 한번씩 하고 가곤 하는데 간판에도 쓰여져있지 않고, 인터넷에 검색해도 나와있지 않지만 불쑥 찾아가면 문이 닫혀있던 적들이 종종 있어 야심차게 받아낸 아주 희귀한 전화번호다. 옛날분들이야 어려워서 못하실수도 있으니 요즘젊은이의 오지랖으로 언젠가 선생님에게
"인터넷에 전화번호를 올려드릴까요? 그럼 손님들도 더 많이 올수 있을텐데..."
라고 물어본적이 있었는데 지금 혼자하는것도 힘들어서 사람들이 더 오지 않아도 된다고 하신다.
하긴 손님이 북적이는 곳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한 사람 차례가 끝날때쯤에는 새로운 손님이 오는 이상한 곳이다.
3.
가게 앞에 자전거에 자물쇠를 채워놓고 문을 당겨 연다. 요즘 보기 힘든 촌스런 장식의 발을 걷어내고 들어가면 목욕탕 스킨냄새로 알려진 아저씨 스킨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안녕하십니까~" 반갑게 인사를 하며 문을 열고 들어가면, 선생님은 손님 머리를 자르고 있다가 슬쩍 바라봐주시곤 늘 같은 톤으로 "어서와요" 라고 기쁘게 받아주신다.
이 말투가 딱딱하면서도 꾸밈없이 참으로 정겨운데 활자로 옮겨지지 않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18세 부터 이발을 시작해 올해 75세가 되셨다는 이 노년의 이발사는 사장님이나 할아버지 보다는 선생님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사람이다.
많지 않은 머리는 단정히 붙여 쓸어넘겨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요즘은 보기 힘든 새하얀 가운을 입고 근무를 하시는데 하얀 가운 사이로 비치는 펑파짐한 정장바지와 구두에서도 얼마나 프로페셔널한 마음으로 임하고 있는 사람인지를 느낄 수 있다.
냉장고에서 촌스런 그림이 그려진 플라스틱 물병을 꺼내 스댕컵에 물을 따라마시곤 자리에 앉아 이 곳의 공간을 눈에 담는다. 요즘은 보기 힘든 브라운관의 두툼한 TV에서는 매우 높은 확률로 최수종을 만날 수 있다. 지난달에 왔을 때는 장보고였는데 오늘은 왕건이란다. 테이블에 놓여있는 요즘은 보기 힘든 종이신문을 하릴없이 만져볼 때 쯤이면 앉으라고 신호를 주신다.
내차례가 되어 자리에 앉고 나면 서랍에서 주섬주섬 돌돌말린 가운을 꺼내 내 몸을 덮고서는 가운 양끝을 펼쳐올려 거울 밑 서랍장을 열어 끼워 넣는다. 바닥까지 머리카락이 쏟아지지 않기 위한 이 노하우는 몇년이나 되었을까.
아무것도 할수 없는 무방비 상태가 된 나는 순한양이 되어 어떻게 잘라주겠냐는 물음에 “그냥 늘 자르시던데로 멋있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곤 가만히 앉아 있는다. (이제는 이렇게 말해도 되는 사이까지 되었다) 오래되어 항상 충전기에 꽂혀있는 바리깡의 둔탁한 진동과 날카롭게 부딧히는 맑은 가위 날의 소리가 귓가에 들리는게 썩 나쁘지만은 않다. 처음에 방문했을 때는 이 곳과 어울리지 않은 낯선 젊은이를 경계하시기도 했는데, 이제는 제법 친해져 재미없는 농담을 건네기도 하신다. (이 농담이 재미없는 것이 나는 아주 재미있다.)
머리를 감을 때는 세면대에 머리를 앞으로 숙여 앉는다. 노인의 힘이라고 믿어지지 않는 굳센 손으로 머리를 감겨주고 얼굴까지 뽀득뽀득 씻어내주실때면 아주 어렸을때 고양이 세수를 보다 못한 엄마가 굳센 손으로 씻겨주던게 생각나 나도모르게 흥! 하고 코에 힘을 주고 싶기도 하다. 머리를 다 감고나서 마지막으로 머리를 말려줄때는 손잡이가 누렇게 바랜 오래된 덜덜이 드라이기가 힘겹게, 천천히, 아주 고요하게 따땃한 기운을 내뿜는데, 괜스레 거울을 넘어 선생님을 쳐다보곤 왜 인지모를 슬픔을 느끼기도 한다.
아까 내가 문을열었을때도 그랫듯이 내 차례가 거의 끝나갈때 즈음 또 새로운 손님이 온다. (지금쯤이면 바리깡도 충전이 되었겠지)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천원짜리 몇장을 꺼내 계산을 마치면(참고로 여러분 이발관에서는 카드계산도, 계좌이체도 안된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라. 건너편에 편의점의 ATM기가 있으니.) 냉장고에서 주섬주섬 비타500을 아니 비타500과 유사한 음료수를 하나 꺼내어 주시며 "잘가요~ 새해 복많이 받아요" 라고 하신다. 불편한 사랑 고백보다 더 많은 사랑을 느끼며 문을 나선다.
머리를 자르러 갔다기 보단, 한시간 쉬고 오면 머리도 정리해주는 느낌이다. 커트만 해도 무려 한시간이나 걸리는 이 곳은, 모든 것들이 빠르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속에서 유난히 시간이 천천히 흐르는 곳이다. 여러분이발관에서 느긋함을 즐기고 집으로 돌아간다. 내일이면 똑같이 빠른 아침을 보내게 되겠지만...
글을 마무리하며, 읽어주실 '여러분'을 생각하니 선생님이 생각난다. 어디서 파는지 모를 비타500의 유사품이 문득 마시고 싶어지는 밤이다.
요즘 없는 것들이 많은 이곳에 여러분도 한번쯤은 찾아가 보시길.
‘여러분 이발관’
코인세탁방에 빨래를 돌려 놓은채, 뭐라도 해야 할것 같은 마음에 주위를 두리번 거리다 처음 ‘이발관’이라는 곳의 문을 열었던 나의 호기심과 아날로그 감성을 느낄 수 있는 그 끝 언저리에 있는 90년생으로 태어남에 감사한다.
사실 이 글은 언젠가 쓰여지다 만 글이다. 쓸 이유가 없어졌던 글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글로서 나를 처음만나게될 누군가를 위해, 나를 표현해 줄 수 있는 글이 어떤것이 있을까 글감을 뒤지다 다시 열어보곤 기억을 짜내어 힘겹게 완성시킨 글이다.
아이폰 13이 작년 10월에 나왔으니, 그리고 새해인사를 해주셨으니 아마 작년 설날이 지난 이맘 때의 일이였으리라. 이후 몇달간 이발관에 방문을 하지 못했을 무렵, 글을 쓰다 묘사를 어떻게 해야할지를 고민하며 제법 길어진 머리를 긁적이다 무작정 여러분이발관을 찾아갔었다. 문을 열었을때 선생님은 안계시고 처음 보는 젊은 아저씨(50대였지만 선생님 보다는 젊으니)가 맞이해주셨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건강이 너무 안좋아지셔서 일을 그만두고 이발소를 넘기셨다고한다. 머리를 자를거면 앉으라는 낯선 손짓에 나는 얼버부리며 문을 나와버렸다. 선생님 휴대폰 번호라도 물어봤어야 했나 후회가 들기도 하다가도 어쩌면 차라리 모르는게 좋을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문을 나와버렸던 그 날의 감정을 지금 글로 써보려하다 표현할 자신이 없어 그만 두기로 한다.
그날 이후로 나는 여러분이발관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한채 다시 젊은이들의 미용실에 다닌다.
온갖 앱으로 결제가 된다며 편안함을 자랑하는 스티커들을 보며, 새삼 돈통에서 천원짜리를 세어보는 설레던 불편함이 그리워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