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J Apr 26. 2022

떠나가며 나를 기다리는 꿈

생각 하나. 사라진 모자


 등산을 갔다가 모자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냥 오래 착용해와서 나의 체취가 묻어있고, 산에서 찍은 사진 속에서 항상 보였을 뿐, 비싸거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모자는 아닙니다. 집안 어딘가에 있을 때는 있는 줄도 모르다가, 불현듯 곁을 떠난 것을 알아차린 그 순간만큼은, 결합에서 결별로 관계가 바뀌는, 아득한 시간 속에 유일무이한 그 순간만큼은 그 사소한 물건도 눈에 선했습니다. 막상 되찾으면 또 신경도 안 쓰겠지만, 누가 보관하고 있다면 웃돈을 주고서라도 왠지 되찾고 싶어집니다. 


 지금은 그래도 꿈을 붙들고 있기에, 꿈은 아직 내게 그 모습을 또렷이 보여주지는 않습니다. 언젠가 꿈이 내 곁을 홀연히 떠나려 한다면, 그 꿈의 모양을 처음으로 선명하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생각 둘. 삶과 꿈


여인이 옆자리에 앉고 설레는 기차가 흐른다.

창 밖의 무표정한 풍경을 무심코 바라보는 남자

그는 결국 풍경에도 여인에게도

한마디 말도 걸지 못할 것이다.

삶은 그 풍경과 같은 것이고

꿈은 그 여인과 같은 것이리라.





생각 셋. 울지 않는 새


만약 당신이 꿈을 꿀 수 있다면, 그리고 꿈을 당신의 주인으로 삼지 않는다면

 - ‘만약’ 중에서 / 키플링



  울지 않는 새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관한 일본 전국시대 3인방의 이야기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울지 않는 새는 목을 쳐라. (오다 노부나가)

 울지 않는 새는 울게 만들어라. (도요토미 히데요시)

 울지 않는 새는 울 때까지 기다려라. (도쿠가와 이에야스)


 셋 중에서 고르라면, 개인적으로는 이에야스의 입장을 선호하고, 히데요시의 입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세 가지 모두,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습니다. 목을 치는 것은 과격하고, 울게 만드는 것은 인위적이며, 울 때까지 기다리는 것은 끝내 울지 않을 경우 기다림의 끝에서 허망함을 느껴야 합니다.

 

새가 울지 않을 때,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자세를 가질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적극적인 자세이고, 다른 하나는 일면 소극적으로 보이지만 포기나 체념과는 다른 수용의 자세입니다. 공통점은 두 가지 모두 새는 건드리지 않습니다.

 하나, 새가 울지 않으면, 내가 대신 울겠다.

 하나, 새가 울지 않으면, 그 새는 놔둬라.





생각 넷. 오기도 전에 그려보는 떠나가는 행복


 봄의 푸른 산을 오르며 고즈넉한 겨울 산의 풍경을 떠올리는 것은, 마치 지난겨울에 산을 오르며 신록을 그려보았던 것과도 같은 이치입니다. 두 모습의 풍경은 그렇게 서로를 부릅니다. 회갈색 느낌의 산에서 푸른 메아리를 들었듯이, 푸른 산에서의 외침은 회갈색의 메아리로 와서 가슴에 담깁니다. 그러나 그것은 쓸쓸한 소리가 아니라, 마치 준비하고 있는지 묻는 듯한 차분한 소리입니다. 그리고 산행을 하는 사람의 마음도 그렇게 차분해집니다. 행복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행복이 떠나갈 것을 미리 그려보면, 행복이 오고 가는 것에 담담해지듯이….





생각 다섯. 도착지


 요즈음은 다행히 도시에서도 숲길이나 냇길과 같은 자연을 접할 기회가 많아졌습니다. 도시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 속을 산책하는 사람들도 늘었습니다. 그 길을 오가며 마주치는 이웃의 모습에는 언제나 여유가 있습니다. 차분한 사색이 함께 하는, 가끔은 걷고 있는 자신조차도 존재하지 않는 듯한 산책길에 들어서면 이것이 도시의 일상을 그린 수채화의 여백이기보다, 오히려 그림의 중심부라고 해도 그리 서운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봅니다. 도시의 건조한 삶을 버티어내기 위해 잠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아니라, 이 길을 걷기 위해 건조한 삶도 기꺼이 살아간다고 말입니다. 이 길을 걸으면서 발견한 지혜는 건조한 삶조차 윤기 있게 바꿔주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마저 해보았습니다. 이따금 걸어가는 우리 모습은 한가로운 휴식 이전에 삶의 본래 경로입니다. 누군가 말했듯 걷는 것이 삶이라면 그 걸음에 반드시 도착지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이전 09화 빈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