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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핀휠 Nov 08. 2022

피곤함이 어떻게 존중을 만들어낼까

빛나는 복지카드를 들고 다녀보았다

[여름휴가 가즈아] : 핀휠의 비정기 프로그램으로, 장애인과 비장애인 대학생이 2인 1팀을 구성하여 여행을 떠납니다. 잘 놀고 오면 1팀 당 10만 원을 줍니다. 제일 잘 놀고 온 팀은 아이패드까지 줍니다. (사장님이 미쳤어요)


안녕하세요, 핀휠의 기획 마케팅 매니저 대드리입니다.


오늘 소개해드릴 팀의 수기는 핀휠에게 조금은 더 특별합니다. 저희에게 많은 감명을 주셨거든요.


이 분들의 수기가 핀휠 사무실에 도착했을 때 현장은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이렇게 멋진 수기가 도착하다니! 사실 수기에 앞서 이분들이 처음 참가 신청을 해주었을 때부터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처음 봤지만 정말 인상 깊은 표현이 있었거든요.


"빛나는 복지카드 소지자"


참가신청 내 계획에서 처음 마주한 표현, '빛나는 복지카드 소지자' (이름은 가렸습니다)
*혹시 복지카드에 대해 처음 들어본 분이라면?
복지카드는 장애인 등록을 마치게 되면 일종의 신분증의 개념으로 발급받을 수 있는 장애인 등록증을 일컫는 다른 말입니다. 


이렇게 참가 신청부터 강한 인상을 남겨주신 분들이 10만 원을 어떻게 사용하셨을지 정말 궁금하지 않나요?


두 분은 본명 대신 가명을 사용하기를 원하셔서 특별히 이번 글에서는 가명을 사용합니다.

수기 전문입니다.




0. 신나게 놀기 전에

은지와 지혜의 소개


은지(가명)

연세대학교 18학번

청각장애 중증

내가 겪은 사회적 약자로서의 경험이 또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는 데 쓰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직접 겪지 않아도 누군가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그래서 사회학적 상상력은 중요합니다.(?)

장애인 차별은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사회적 손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지혜(가명)

연세대학교 16학번

비장애인

아이패드가 갖고 싶은 대학생입니다.



1. 우리는 이렇게 처음 만났어요. (2018.01.23)

대학교에서 처음 만난 사람들 (은지 says)


사진 1-1) 2018학년도 장애학생 OT, 그리고 게르니카 지원서 / 사진1-2) 당시에 진행되었던 문자통역 쉐어타이핑


연세대학교에서는 매년 장애학생들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진행한다. 정식 입학을 하기도 전부터, 미리 자리를 마련하여 다양한 정보를 공유하는 시간을 가진다. 이 자리는 장애학생인권센터를 주축으로 하여, 장애인권동아리 그리고 장애인권위원회 구성원까지 참석한다. 나랑 지혜는 여기서 처음 만났다.


나는 장애인 같지 않은 청각 장애인으로 살아왔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했다. 내 인생에 장애 정체성이란 건 없었다. 오히려 장애는 내가 가진 사소한 단점이라고 세뇌받으며 살아왔다. 장애를 극복해야 한다는 부모님의 말은 뭔가 이상한 것 같지만 틀린 말이라고 생각해보지는 않았다.


장애학생 오리엔테이션에 참여하면서 지혜가 있는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의 선배들을 만났다. 휠체어를 타는 사람, 목발을 짚은 사람, 인공 와우를 한 사람, 자폐 스펙트럼이 있는 사람. 30명 남짓한 사람들이 이토록 다양성을 가지고 구성될 수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한 번도 받아보지 못했던 '문자통역'이라는 것도 여기서 처음 받았다. 내가 잘 들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도 날 불편해하지 않는 이들의 태도에 얼떨떨했다.


그날 나는 바로 장애인권동아리 '게르니카'에 가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지혜와 친구가 되었다.



2. 롯데월드 (2022.08.23 TUE)

그날 하루의 주제: 복지카드로 나를 설명하는 환상(?)의 나라


롯데월드 가자!


하지만 은지가 입학하고 얼마 안 가서 지혜는 휴학했기 때문에 은지와 지혜가 캠퍼스에서 함께 보낸 시간은 많지 않다. 은지와 지혜는 세 살 차이가 나는데 서로를 '님'이라고 부른다. 서로 은지님 지혜님 부른다는 게 아니라 '님아, ~함? ~음? ~셈?' 한다.


은지와 지혜는 좀 더 자주 보고 싶지만 굳이 일이 생기지 않으면 안 보게 되는 그런, 친하긴 한데 더 친해질 여지가 있는 그런 사이다. 그런 사이인 우리에게 만나서 놀 구실도 되어주고 놀 돈도 주고 그중 잘 놀면 상품도 주는 그런 좋은 공모전이 있다고 해서 참여하기로 했다. 일과 학업을 병행하는 은지와 시험을 준비하는 지혜가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웬만하면 도심에 있어야 했고, 도심에 있으면서도 정말 신나게 놀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했다. 그리하여 결정된 롯데월드행...



늘 그렇듯 시작되는 소소한 난관


입장하자마자 표를 끊는데도 한참을 헤맸다. 장애인 할인을 받기 위해서는 유인 매표소를 이용해야 하더라. 숱한 무인 매표기 뒤쪽 깨알 같은 안내가 전부였다.

사진 2-1) 장애인은 유인 매표소를 이용하라는 안내문

유인 매표소의 직원은 장애인 복지카드를 보여주면 아 장애인이구나 알고 못 들어도 한 번 두 번 더 설명해줄 법도 한데 롯데월드의 직원은 은지가 말을 잘 못 알아듣자 답답한 티를 숨기지 못했다. 당신, 환상의 나라 직원 실격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그저 최저임금 노동자이겠지요...)


깨알 같은 은지 says: 결국 설명을 제대로 듣지 못한 저는 이용하지도 않을 민속촌까지 포함한 종합 이용권을 더 비싼 돈을 주고 샀답니다. 



이 놀이기구는 어떤 사람이 탈 수 없을까?

사진 2-2) 자이로드롭을 타는 은지와 지혜 / 사진 2-3) 친구들과 다같이 찍은 사진, 그리고 이상한 TRAM CAR에서 찰칵


환상의 나라 안으로 입장한 우리는 일단 시야에 보이는 탈 만한 놀이기구는 거진 다 탔다. 아틀란티스, 자이로드롭, 자이로스윙, 혜성 특급, 파라오의 분노... 의외로 파라오의 분노가 줄이 가장 긴 것이 인상적이었다. 롯데월드에서 제일 비싼 야심 찬 놀이기구라고 한다.


여기쯤에서 설명하자면 복지카드가 있으면 일반 줄을 서지 않고 우선 탑승을 할 수 있다. 대한민국에서 복지카드가 진정 유용해지는 순간... 롯데월드는 정말 환상의 나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 복지카드가 없었다면 계속 줄 서기가 힘드니 중간중간에 멈춰서 사진도 찍고 먹을 것도 먹고 다른 것들도 짬짬이 둘러볼 법도 한데, 은지패스가 있어 기구를 무제한으로 탈 수 있으니 정말 쉴 새 없이 놀이기구만 타러 다녔다. 롯데월드를 떠날 때쯤엔 마치 놀이공원에서 일한 것마냥 힘들었다.


이날 깨달은 건데 놀이기구를 타는데도 코어 힘과 같은 기초체력이 상당히 필요하다. 별 일이 아닌 것 같지만, 장애 유형에 따라서는 각각의 어려움이 모두 다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이로드롭은 온몸을 꽉 잡아주는 안전장치가 있어서, 휠체어에 자력으로 앉아있을 수 있는 사람은 탈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아예 다리 부분을 고정할 수가 없다. 하지에 감각이 없고 근육이 없기 때문에 다리가 과도하게 흔들리게 되면 골절 등의 부상 가능성이 있다. 뭔가 이런 생각을 하며 놀이기구를 타는 우리가 좀 별난 것 같지만... 어쩌겠는가?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걸.


그러면서 경사로는 잘 되어 있는지, 계단밖에 없어서 못 들어가는 곳은 없는지,  휠체어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공간인지.. 이런 것까지 보며 다니는 우리.. 정말 이상한가요?



장애인 우선 입장 제도

사진 2-4) 롯데월드 홈페이지의 '우선 입장 제도' 설명


앞서 말했듯 복지카드가 있으면 우선 입장을 할 수 있는데, 이때 장애인 당사자는 동반 1인과 탑승할 수 있다. 지혜는 부끄럽게도 혼자 타면 쓸쓸하니까 당사자 말고 친구 하나 더 태워주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지혜의 역할은 '보호자'였다. 즉, 직원의 안내사항이나 방송을 전해주었어야 했는데 본인부터가 멍 때리다가 말을 놓치기 일쑤여서 그다지 보호자로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반성해야 한다.


또 새로 알게 된 건 장애인 당사자는 우선 탑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성인 보호자 한 명과 함께 탑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장애인 한 명 당 (아마도 비장애인인) 성인 보호자 한 명이 필요하다. 장애인 혼자서는 놀이공원에 와서 놀이기구를 탈 수 없는 것이다. 돌발상황이 생길 때 옆에서 안내해줄 사람이 필요해서일지도...라고 추측했다. 이 때문에 동행했던 청각장애인 친구 T가 비장애인 '보호자'가 없어 자이로드롭을 타지 못해서 아쉬웠다. 하지만 이와 같은 내용이 롯데월드 홈페이지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으니 알아보지 않고 간 우리 탓이다.


은지는 생각을 했다. 장애인 우선 탑승 제도는 무얼 위한 걸까? 나처럼 비가시적인 장애인이 복지카드를 내지 않고 혼자 온다면.. 그럼 어차피 혼자서 탈 수 있는 것 아닌가? 그럼 굳이 내 친구는 자이로드롭을 못 탔을까? 못 탈 이유는 뭐가 있을까?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공중에서 자이로드롭이 멈춘다면..? 그때 안내방송 등을 들을 수 없으니 보호자가 필요하려나? 그럼 어차피 지혜가 있는데 지혜 한 명으로도 두 명의 청각장애인의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등등의 생각이 끝없이 이어졌다. 만약 내가 고등학생이었다면... 같이 온 친구는 나의 보호자가 될 수 없나? 이미 수많은 친구들이 나의 삶에서 보호자가 되어주었는데... (+이외의 30가지 생각은 생략)


장애인 우선 탑승 제도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많은 경우를 커버할 수 있다. 2020년 7월 에버랜드는 장애인 우선 탑승 제도를 폐지하고 예약제로 바꾸었는데, 굉장히 많은 비판이 쏟아졌다. 다른 곳에서 대기하면 될 뿐, 똑같이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룰 때문에 많은 장애 아동 가족들이 갈 곳을 잃게 되었다.


롯데월드에서는 아직 제도가 남아 있다. 은지는 이 날 보호자 없이는 탈 수 없다는 얘기를 듣고 이런저런 고민에 빠졌지만... 들리지도 않는 안내 방송 따위를 듣거나 대화도 할 수 없는 시끄러운 인파 속에서 기다리지 않아도 되는 이 제도가 오래 남아줬으면 좋겠다. 허점이 있을지라도,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제도다.



저 장애인이에요!  


은지는 밖에서 신분증을 제시할 일이 생기면 일부러 복지카드를 낸다. 그러면 내가 청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은연중에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선 탑승을 할 때, 잠깐 보여주는 복지카드만으로 본인이 청각장애인임을 알리면 잠시나마 안심이 된다. 혹시 잘 듣지 못하고 다시 물어보면 그들이 화내지 않고 답해줄 거라는 일말의 믿음이 생기니까. 어쨌든 장애인이라는 걸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환상의 나라, 롯데월드에 다녀온 그런 기분이다. (하하!)



3. 연극 (2022.08.11 THU)

그날 하루의 주제: (우리를 지켜야 하니까) 뻔뻔하게 살자!
사진 3-1) 연극 '술래' 포스터 / 사진 3-2 연극 '술래' 티켓


#연극 줄거리

등장인물은 가끔은 여자였다가 가끔은 남자 소리를 듣는 걸 즐기는 은성,

남자답지 못한 자기 자신을 살짝은 부끄러워하며 남자인 친구에게 관심을 보이게 된 강산,

월세를 마련하기 위해 갔던 인력사무소에서 돼지를 살처분하게 된 경험으로 비건이 된 해수,

연극에서 제이는 이 셋을 만나 자신의 역사를 안고 한강으로 오라고 말한다.


은성, 강산, 해수는 혼란스럽고 자랑스러우며 가끔은 수치스러운 각기의 역사를 가지고 한강으로 모인다.

은성은 자신의 옷가지를 가져와 늘어놓고 은성과 해수에게 나눠준다. 은성이 나눠준 옷가지를 입은 강산은 '남성스럽지 못한' 자기 자신을 만회하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여 얻은 과거의 상장을 찢어 하늘로 날리고, 해수는 팔랑팔랑 흩날리는 종이 아래서 기다란 흰 천을 함께 나눠 잡는다. 셋은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생애 첫 '자막' 연극


롯데월드에 가기 전에는 연극을 봤다. 은지가 무자막 연극을 보다가 존 적이 있다고 해서 지혜와 같이 자막이 있는 배리어 프리 연극을 보러 갔다. 연극은 프로젝트 PAN의 술래.


은지는 정말 오랜만에 지혜를 만나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았다. 연극 입장을 기다리며 복도 소파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혜는 은지가 잘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가끔은 마스크를 내리고 말을 해야 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은 우리의 대화 소리 때문인지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배리어 프리 연극인 만큼 접근성 매니저가 따로 계셨다. 한글자막이 잘 보이는 곳으로 안내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사진 3-3) 극장 입장 대기중 한 컷! / 사진 3-4) 현장 데스크에 계셨던 접근성 매니저 분



배가 아팠던 지혜의 넋두리

 

그런데 관람 중 문제가 발생했다. 지혜의 배가 아파온 것이다. 배우들이 열연을 펼치는 와중 배에서 꾸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지혜는 처음으로 은지가 듣지 못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ㅋㅋ). 배가 아픈 나머지 나가고 싶었는데 의자가 너무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이목이 집중되지 않고는 도저히 나갈 수가 없었다. 관객에게도 배우에게도 방해가 될 것 같았다.


민망하게도 꾸륵꾸륵 울어대는 배를 붙잡은 지혜는 둘러보았다. 모두 이 작고 딱딱한 의자에 바른 자세로 앉아 긴 시간 연극을 관람하고 있었다. 그들은 배에서 소리도 안 났다. 문득 지혜는 연극 시작 전 은지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내용은 이랬다. 은지는 자신의 친구 B가 최근에 당한 억울한 일에 B가 얼마나 화를 내고 있는지에 대해 전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지혜는 생각 없이 B 씨 너무 피곤하게 사는 거 아니냐, 좀 넘어갈 건 넘어가는 게 좋지 않냐고 말했다. 그러자 은지는 지혜에게 어떻게 B의 '피곤함'이 은지를 '존중'하는 경험을 만들어주곤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즉, 은지가 언젠가 선별 진료소를 갔다가 안내원의 말을 잘 이해를 못 했는데 그때 안내원이 은지에게 짜증을 냈다. 물론 은지는 비장애인 중심적인 세상을 살아가는데 도가 튼 장애인이다. 원래 기질이 그런 것인지 그런 기질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인지 우리는 영영 알 수 없다. 그런 은지답게 은지는 안내원의 무례에 화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상황을 본 B가 불같이 화를 냈고, 안내원은 은지가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사과하였다.


대학교 동아리 선배님께서는 차별받는 경험 한 번은 존중받는 경험 백 번이 있어야 사라진다고 말씀하셨다. B의 불같이 피곤한 성격이 은지의 차별받는 경험을 존중받는 경험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이제 그 안내원은 앞으로 소통이 잘 안 되는,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민원인이 와도 함부로 대하지 않지 않을까. 그렇게 B의 피곤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꿔나가는 게 아닐까.


배를 붙잡고 연극을 보고 있는 지혜로 넘어와서. 지혜는 은지를 비롯한 자신의 수많은 친구들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이런저런 병이 있고, 배가 아프지 않고는 앉아서 연극 한 편 제대로 관람하지 못하고, 불쑥불쑥 화장실을 가며, 어두운 밤에도 실내에서도 가끔씩은 마스크를 내리고 목소리를 높여 또랑또랑하게 이야기한다. 가끔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존중받을 수 있도록 불같이 화를 내며 갑분싸를 감수한다.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참 피곤한 사람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희... 뻔뻔하게 살아도 될까요?


연극이 끝나자 마법같이 지혜의 배가 가라앉았다. 은지와 지혜는 건물 밖으로 나왔고 저녁 캠퍼스는 조용했다. 은지와 지혜는 연극에 대해 이야기했고 여느 때와 같이 은지가 들을 수 있도록 지혜는 큰 소리로 또박또박 말했다. 그러자 옆에 지나가던 사람, 담배 피우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을 조금이라도 탓하려는 게 아니다. 사람은 큰 소리가 들리면 반사적으로 시선이 간다. 하지만 악의가 있든 없든 간에 시선에는 힘이 있고 시선을 받으면 받는 쪽은 움츠러들기 마련이다.


지혜는 집에 와서 이 이야기를 은지와 같은 청각장애인인 T와 지체장애인인 S와 함께 나누었다. 어떻게 하면 움츠려 들지 않고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지혜는 자주 불쑥 해명하고 싶어진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T는 일일이 해명할 수 없는 우리는 뻔뻔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뻔뻔하다': 부끄러운 짓을 하고도 낯을 붉힐 줄 모르는. 지혜는 그게 답인 것 같다고 느꼈다.


지혜는 은지와 있을 때 앞으로도 큰 소리로 이야기할 것이고 은지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답할 것이다. 누군가가 쳐다보더라도 이제는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고. 또 어떤 누군가는 조용히 해달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사람 좋게: 저희가 잘 안 들려서요, 죄송함다! 뻔뻔하게 사과하면 그만인 것이다.



4. 마치며

불만 많은 사람들.


은지와 지혜는 세상에 불만이 많다. 아무튼 정말 많다. 위에서 볼 수 있듯이, 롯데월드 잠깐 다녀오고 연극 한 편 봤을 뿐인데.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사람들이다.


수기를 제출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런 글을 적기 시작했지만... 이번 기회를 통해서 서로의 시각과 생각을 잘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았다. 은지는 청각장애인 당사자로서 살고 있지만... 지혜는 청각 장애 이외에도 다양한 권리의 문제를 잘 알고 있다. 은지는 자신의 권리가 침해받는지도 모르고 (어쩌면 알면서도 넘어가고 싶은 걸지도) 살 때, 지혜는 항상 '불쑥' 끼어들어서 정정해준다. 은지한테 지혜는 잊고 살던 '나'를 상기시켜주는 사람이다. 잔소리가 좀 심하긴 하지만 틀린 말은 하지 않는 그런 친구랄까.


지혜는 자신 주변의 장애인 친구들과 함께하며 겪었던 일들을 꼭꼭 소화시키며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한마디라도 더 일조하며 살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모든 게 '불편'한 사람들이지만.. 세상은 편하게 살면 안 되는 거 아닐까? 지하철 한 번 타려고 엘리베이터 있는 역을 굳이 굳이 찾아가는 불편한 경험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지방에 갈 때 애초에 버스라는 선택지가 없는 경험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혼자라면 속상했던 일도, 불편했던 일도 내 가슴속에만 묻어두고 살아야겠지만, 지혜와 은지는 함께 놀러 간 시간을 통해 이를 공유할 수 있었다. 연극 <술래>는 우리에게 끊임없이 말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래서 피곤하고 뻔뻔한 우리는 거침없이 우리의 불만을 말하기로 했다. 계단 없는 공간, 장애인에게 불친절한 사람들, 이상한 우선 탑승 제도를 겪고 불만은 많아졌지만 그 불만은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게 할 에너지가 될 거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지킬 수 있다면 계속해서 불만을 토해낼 것이다. 우리는 함께니까, 불만은 나누면 변화가 될 거야. 그러니 함께라면 뭐든 괜찮다!


다음은 핀휠 멤버들의 한줄평입니다.


호구박: 수기문을 읽고 이분들은 꼭 만나 뵙고 싶어서 시간을 내서 알바트로 준님과 함께 두 분을 만나뵈었었답니다. 남겨주신 수기문처럼 정말 맑고 밝게 빛나는 분들이었어요. 만나서 많은 에너지와 힘을 받고 배운 것도 많은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신나고 즐겁고 재미나게 놀고 와야 한다는 취지의 여름휴가가즈아였기 때문에 대상이 되시진 않으셨습니다만, 글에 보여주신 정성과 서로에 대한 아낌도 정말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도 두 분의 우정과 마음이 계속 이어지실 수 있기를. 가끔 생각날 때 핀휠을 찾아주세요.


대드리: 두 분의 수기를 읽고 여기저기 보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글을 읽으며 저도 이 변화에 동참하고 싶어졌습니다. 우리 함께 만들어가요!!!


김선비: 우리가 사는 일상생활에서 이렇게나 불편함을 가지고 있어도, 사과를 해야 하는 일들이 아직도 참 많은 것 같아요. 두 친구의 글에 괜스레 미안함과 속상함을 느낀 것 같습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작은 소리에 불과할지라도, 작은 소리가 모여 하나의 거대한 울림이 되길 기대해봅니다.


알바트로준: ★★★★★

“빛나는 복지카드의 소유자가 미천한 비장애인 접대하기” 

고작 한 문장으로 최애로 등극한 팀, 마인드부터가 취향저격인 팀

-알바트로 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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