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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emon LA Apr 17. 2024

6차 항암을 포기하겠다고 말했더니

암투병 일기

이번 봄날의 벚꽃 구경은 절망 속에서 희망을, 오랜 시간 묵혀두었던 그리움이 꺼내지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6차 항암 스케줄대로 병원을 갔습니다. 두 가지 마음이 들더군요. '잘 버텨내자. 이번이 세포독성항암(암세포도 죽이지만 면역세포에도 영향을 미치는) 마지막이야. '하는 마음과 '포기하자. 한 번 더 견뎌내려다 내가 죽을 수 있어.' 하는 마음.


모든 암환자가 그렇듯이 항암치료가 지속되면서 고민들도 늘어나고 새로워집니다. 이번 6차 항암 전에는 이런 걱정들이 앞섰습니다. 


- 마지막 세포독성항암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 항암 스케줄을 열흘에서 한 달 정도 연기?

- 수술 날짜도 연기할 것인가?


오전 9시 30분, 예약시간 보다 30분 정도 담당의사를 일찍 만나게 되었습니다. 

"어떠셨어요? 지난 5차 항암 끝나고 특이사항이 있던가요?"

"5차 항암 4일 후 호흡곤란 와서 짧은 시간이었지만 기절했어요. 설사는 10흘정도 지속, 팔다리가 저려서 밤에 잠도 잘 못 자요. 입덧처럼 울렁증은 여전히 심해 체중이 더 줄었고요."

"4차 때보다 부작용이 조금 더 심해졌네요. 어디 피검사 결과를 볼게요. 음... 백혈구, 적혈구 수치는 정상, 빈혈이 좀 심해졌네요. 체중도 줄고."

"선생님, 저 6차 포기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거 같아요."

"아니 마지막 한 번이에요. 6차만 끝나면 나머지 과정은 훨씬 쉽습니다. 음... 항암제 양을 조금 줄여 줄게요. 지금까지 암 사이즈도 많이 줄었고 경과가 좋은 편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합시다."


결국 6차 항암은 의사 선생님의 설득대로 항암제 양을 10~20%(항암제 별로 다름) 줄여서 하게 되었습니다. 항암제 양을 줄이면 부작용이 덜하지 않을까 내심 기대했는데 지금까지 체내에 쌓인 독성분이 많아서 그런지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울렁증을 시작으로 지속되는 설사, 관절통증, 팔다리 저림, 어지럼증, 안구건조증까지 심해져 열흘을 꼬박 아팠습니다.


일주일 정도 침대 위에서 끙끙 앓다가 창밖을 바라보니 멀리 보이는 주변 산들의 풍경이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회색, 갈색톤이었던 동네 산들이 여린 연두색과 초록으로 물들고 곳곳에 사랑스러운 여린 핑크결로 벚꽃들이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지난가을에 암판정을 받고 '내 인생에 따사로운 봄햇살을 다시 쬐며 아름다운 벚꽃을 다시 볼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는데, 감사하게도 그런 봄 날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조카가 오래 걷지 못하는 나를 배려해 드라이브로 벚꽃 구경을 가자는 말에 주저하지 않고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나섰습니다. 집에서 차로 채 5분도 떨어져 있지 않은 벚꽃 길을 차로 달리는데 가슴 저 밑바닥에서 무언가 울컥하는 뜨거운 덩어리가 올라오며 목이 메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생각해 보니 한국의 이런 벚꽃을 다시 보게 된 게 12년 만입니다. 외국 생활이 길어지면서 가슴속 어딘가에 굳게 닫혀있던 비밀의 향수창고의 문이 열렸나 봅니다. 그제야 왜 이렇게 아파서 돌아오게 되었는지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 날 바람에 휘날리는 핑크빛 귀여운 벚꽃 잎들은 어떤 항암제보다 훌륭한 치료제가 되었습니다. 원하는 방식은 아니지만 때론 이런 아픔을 통해 삶이 나에게 가르쳐 주는 것들이 있음을 깨닫습니다.


<암을 이겨내는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책에서 이병욱 의사는 "암을 퇴사하겠다는 생각에서 벗어나 잃어버린 삶의 질을 되찾는 데 집중하세요"라고 권유하고 있습니다. 


'삶의 질'이라는 단어에 괜히 뜨끔합니다. 미친 듯이 앞만 보고 달리다 이렇게 넘어져 암이 걸렸는데, 이번에는 다시 암을 퇴치하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삶의 질 따위는 깊게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이 아픈 시간은 나를 위로하고 돌보며 삶의 질을 돌아보라고 하늘이 주신 기회가 아닐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암치료가 시작되면서 하루하루 일 중심으로 살아왔던 반복적이고 규칙적인 생활의 우선순위가 저절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저 내 몸과 마음을 돌보는 데 온전히 시간을 쏟고 있습니다. '이래도 괜찮나?'라는 생각이 들 만큼 나를 챙기는 것엔 서툴기만 합니다.


6차 항암을 하면서 도움이 되었던 봄 철 식단이 있습니다. 

-도다리 미역국

-도다리 쑥국 (난생처음 먹어봄. 기력이 회복되는 느낌)

-아구지리

-낙지, 주꾸미 연포탕

-쑥, 냉이 된장국

-꽃게 된장국(4월부터 5월까지가 암꽃게가 알이 가득해 가장 맛있는 시기)


울렁증에 도움이 되었던 반찬은 동치미와 백김치였습니다. 집에서 동치마와 백김치를 조금 담기도 했고 주변에서 응원의 메시지로 동치미와 백김치를 담아 보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아픈 일이 다 나쁜 것은 아닙니다. 아파보니 소중했던 사람들과 더 가까워지고 사랑의 심도를 확인하게 됩니다. 빨리 나아 받은 사랑을 갚아야겠다고 생각하니 삶의 의지도 강해집니다.


내년 봄에는 벚꽃처럼 누군가에게 위로와 울림을 주는 잔잔한 봄이 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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