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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는 법

돈 말고 다른 걸 씁니다

by 양독자


#프롤로그



우리 집에는 항상 돈이 없었다. 정확히는 여유를 살 돈이 없었다. 말 그대로 ‘먹고사는 것’만 지장 없는 수준. 생계유지는 가능했지만 그 밖의 생활은 허락되지 않았다. 우리 가족은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그중 가장 심한 말은 ‘가난’이었다. 나는 우리를 '불운'이라고 불렀다.



운이 없었다. 이 상황을 인정하려면 이 정도 가설이 적당했다. 우리 집이 망한 건? 운이 없어서야. 엄마가 팔자 탓을 하는 건? 운이 없어서야. 내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건? 운이 없어서야. 피로는 간 때문이고, 가난은 ‘운’ 때문이야.



열심히 일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벗어나려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건 핑계야. 더 악착같이 살았어야지’ 라고 탓한다면, 더는 반박할 변명이 없다. 나름의 노력이 성공으로 이어지는 기회를 놓친 것도, 운이 나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납득이 됐다.






부자가 되는 걸 바라진 않았다. 남들보다 나은 삶을 목표로 삼지 않았다. 그저 남들 만치만. 학교에서 만나는 친구들. 어쩌다 만나는 친척들. 딱, 그 정도만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평균, 그 이상을 원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평범은 누군가에게 이상이 되기도 한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나처럼 살지 말라는 엄마의 세뇌는 내 좌우명이 되어 나를 지배했다. 주입식 교육은 의외로 효과가 좋다. 다행히 대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안정적인 밥벌이를 찾아갔다. 드디어 보통사람이 된 것 같았다. 엄마는 내가 자신과 다른 인생을 살게 될 거라고 말했다.



예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그토록 원하던 평균의 범주에 들어왔지만, 나는 결코 평범해지지 못했다. 난생처음 받아보는 월급으로 뭐든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남들의 여유로운 생각과 행동은 비매품이었다. 텅 빈 지갑을 채워도, 텅 빈 마음은 그대로였다. 나는 여전히 자격지심으로 똘똘 뭉친 못난 어른이었다.






가난은 ‘상대적’이다. 물질적 만족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르다. 누구에게는 흡족한 것이 누구에게는 부족한 것이 되기도 한다. 타인과의 비교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만들지만, 동시에 안식을 주기도 한다. 나보다 더한 인생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 그 사실에 안도하는 나. 역겹지만 이렇게 위안을 얻고 사는 수밖에.



그러나, 가난한 마음은 ‘절대적’이다. 물질적 결핍에서 파생된 ‘정신적 결핍’은 극히 개인적인 영역이다. 애초에 비교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정서적인 문제에 가난은 2차 가해자이므로, 형편이 나아졌다고 해서 완전히 해결되지 않는다. 간접 흡연자에게 담배를 끊으면 건강해질 거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가난은 지독하다. 모진 말로 생긴 상처, 구질구질한 거지근성, 궁핍하게 변질된 성격. 이것들은 좀처럼 나아지질 않는다. 이젠 괜찮아졌을까? 안심하는 순간 재발되어 끈질기게 나를 괴롭힌다. 아주 악독한 녀석이다.






어떻게 하면 지독한 가난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나는 돈이 아닌 글을 쓰기로 했다.

돈을 쓸수록 지갑이 가벼워지는 것처럼,

글은 쓸수록 마음이 가벼워지지 않을까?


계속 적어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 마음의 바닥에 닿을지도 모른다. 그곳에서 나를 괴롭히던 원인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어그러진 감정이 누그러지고, 화해를 하는 순간이 오게 될지도 모른다. 밑바닥을 발판 삼아 가볍게 날아오를지도 모른다. 마침내 가난한 마음이 채워질지도 모른다.


사실 이 방법도 실패할지 모른다.

모르지만 써본다.

내게 남은 유일한 해결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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