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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난다

겨울의 배신

by 양독자



“너는 왜 그 옷만 입어?”

동급생 친구의 질문에 나는 돌처럼 굳어버렸다.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메두사를 만나면 이렇게 되는 건가. 머리카락 한 올까지 움직임을 멈춰버린 느낌이었다. 살면서 들어본 난감한 질문들, 이를테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넌 커서 뭐가 될래?” 같은 물음과는 수준이 달랐다. 역대급으로 깊은 곤경에 빠졌다.



내가 입고 다닌 외투는 하필 빨간색이었다. 문제는 그게 내 유일한 겨울옷이라는 점이다. 사람들이 입는 롱패딩의 8할이 검은색인 이유가 있다. 뭐든 어두워야 티가 나지 않는다. 이염이 생겨도 표가 나지 않고, 교복처럼 매일 착용해도 어색하지 않다. 만약 내 점퍼가 무채색이었다면 친구의 눈썰미에 걸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녀의 질문에는 악의가 없었다. 아니, 없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만약 나를 꼽주려는 의도였다면 "너는 옷이 그거밖에 없어?"라고 물어야 맥락상 어울린다. 그녀는 31가지 맛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는 것처럼 옷도 기분에 따라 골라 입었다. 감히 내 옷장을 상상이나 했을까. 하지만 고의가 아니었다고 상대가 다치지 않는 건 아니다.





심장이 따끔했다. 친구손에 들려있던 샤프가 내 가슴팍을 정곡으로 찌른 것 같았다. 요즘말로, 제대로 긁혀버렸다. 얼굴은 슬슬 달아올라 입고 있던 외투만큼 붉어졌다. 자존심이 상했는지 몸 안에서 고약한 악취가 났다. 이깟일에 마음을 다쳤다는 사실에도 마음이 상했다.



나는 왜 긁혀버린 걸까. 친구의 무례함에 화가 나서? 가진 옷이 그것뿐이라서? 아니다. 나는 겁이 났다. 저 눈썰미 좋은 녀석이 내 가난까지 눈치챘을까 봐 무서웠다. 빨리 적당한 답변을 떠올려야 했다. 시간을 지체할수록 의문은 의심으로 바뀌게 될 테니까. 뭐라고 대꾸해야 그럴싸한 변명이 될까? 머릿속이 텅 비어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다른 옷은 불편해서 안 입어”

쿨하게 가난을 인정하지 못한 나는, 쿨하지 못하게 거짓말을 했다. 따끔했던 심장이 뜨끔해졌다. 기껏 떠올린 핑계가 이따위라니. 전혀 납득이 안되잖아! 분명 친구는 믿지 않는 눈치였다. 나는 다시 불안해졌다. 거짓을 진실로 포장해 줄 새로운 겨울옷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사건(3화 참고) 이후, 나는 부모님께 무언가를 사달라고 말한 적이 없었다. 거절의 아픔을 다시 겪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엔 피할 수 없었다. 이건 단순히 갖고 싶은 욕심이 아니다. 나에게는 학교 준비물처럼 꼭 필요한 물건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한참을 우물쭈물거리다 겨우 입을 떼었다.

“엄마, 나… 겨울옷 하나만…”



엄마는 단박에 알겠다고 했고, 아빠는 당장 주말에 옷을 사러 가자고 했다. 으응? 이렇게 바로? 평소와 달리 그들의 대답에는 고민이 없었다.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쇼핑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들의 허락이 ‘흔쾌히’ 혹은 ‘기꺼이’가 아닌 ‘간신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 부탁이 이번 달 가계 지출에 부담이 된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다.



엄마는 가게에 걸려있는 옷들 중 옅은 카키색 패딩 하나를 골라 들었다. 내 얼굴에 대어보더니 한번 입어보자고 하셨다. 이게 바로 ‘덕다운‘이구나. 인생 처음으로 걸쳐본 오리털 점퍼는 생각보다 가볍고, 예상보다 따뜻했으며, 상상보다 비쌌다. “원래 겨울옷은 이 정도 해!” 부모님은 녀석의 몸값에 당황한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새 옷을 입었지만 마냥 신나지 않았다.





나는 겨울을 유독 편애했다. 이 계절에는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 활개를 쳤다. 팥이 든 붕어빵, 곶감과 연시, 이불속에서 까먹는 귤, 1년에 하루뿐인 내 생일. 하지만 겨울은 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다. 녀석은 기어코 내 부족함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만들었다. 가난은 겨울옷으로 티가 난다.



얼마 전, 엄마의 장롱을 열었다가 낯익은 외투를 발견했다. 에이 설마… 이걸 아직 갖고 있다고? 그날 샀던 오리털 패딩이었다. 엄마는 20년도 더 지난 옷을 아깝다며 버리지 않았다. 지난 흑역사를 보는 듯한 불편함과 불쾌함이 단전에서 끓어올랐다. 나는 잔소리를 한가득 쏟아냈지만 엄마는 여전히 그 옷을 버리지 않았다. 가난이 아직 떠나지 않은 것 같았다.





이 글의 제목은 tvn 드라마 <작은 아씨들>의 대사를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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