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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Aug 11. 2024

외동딸을 향한 애매한 간섭

이것은 간섭인가 관심인가


아기자기한 공원이 있는 우리 동네에는 산책하는 강아지가 많다. 덕분에 귀여운 반려견들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집 밖으로 나온 강아지들에게는 적당한 자유가 주어진다. 풀밭에서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기도 하고, 나무 밑에서 다리를 올리고 영역표시를 하기도 한다.


그들은 털 색깔도 짖는 목소리도 각기 다르지만 유일한 공통점이 하나 있다. 바로 목줄을 차고 있다는 것. 위험한 곳으로 가려하거나 다른 강아지를 보고 으르렁거리면 보호자는 재빨리 목줄을 잡아당긴다. 느슨했던 줄은 순식간에 짧아져 팽팽해진다. 그들에게 허락된 자유의 크기는 목줄의 길이와 같다.


흔히 자식이나 손주들을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곤 한다. 그래서인지 부모-자식 간의 관계가 때론 보호자와 반려견처럼 느껴진다. 어린 자식에게는 보이지 않는 줄이 걸려있다. 자신의 의지대로 나아가더라도 결정적인 순간에는 부모에 의해 제지당하고 만다.


내 목줄은 유달리 짧은 것 같았다. 내게 허락된 행동반경은 남들보다 좁게 느껴졌다는 뜻이다. 왜 그런 걸까. 내가 외동이라서? 딸이라서? 둘 다 해당돼서? 누군가에게는 흔한 자유가 나에게는 그렇지 않은 적이 종종 있었다. 때론 그것들이 나를 갑갑하게 했다.




내가 답답함을 겪기 시작한 순간은 사춘기가 다가오는 시기와 비슷했다. 부모의 애정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애석하게도 간섭처럼 느껴졌다. 친구들과 비교해 보면 내가 좀 유별난 취급을 받는 듯했다. 왠지 모를 반발심도 생겨났다.


중학생이 되자 핸드폰을 가진 친구들이 하나둘 생겨났다. 처음에는 몇 명 되지 않았던 단말기 소지자는 어느 순간부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집과 학교만 오가는 나에게 핸드폰은 사치품에 불과했지만 점점 커지는 소외감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결국 나는 부모님께 무리한 요구를 하고 말았다. 커서는 뭔가를 사달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는데. 낯선 자식의 모습에 부모님은 주저 없이 큰돈을 내어주셨다.


죄송한 마음도 잠시. 드디어 나에게도 핸드폰이 생겼다는 사실에 그저 기뻤다. 방과 후에도 친구들과 시답지 않은 문자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소외감이 머물던 자리는 안정감이 차지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이 전자기기가 친구들과의 연락수단에서 부모님의 감시수단으로 전락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주말에 친구들을 만나러 가면 항상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저녁 늦게까지 논 것도 아니었다. 심지어 학교 수행평가로 모일 때도 전화는 계속됐다. 엄마는 늘 나에게 말했다. 부모로서 그 정도 연락은 당연히 할 수 있는 거라고. 하지만 친구들의 핸드폰은 울리지 않았다.


전화를 받을 때마다 민망했다. 친구들이 마마걸처럼 보진 않을까 걱정됐다. 우려는 곧 짜증으로 변했다. 집에서는 나에게 이 정도 관심을 보이질 않는데, 왜 눈앞에만 안 보이면 유난인가 싶었다.




내가 성인이 되면 부모님의 염려도 사라질 거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물론 줄어들긴 했지만 없어지진 않았다. 외동딸을 향한 애매한 단속은 사회인이 되어도 계속되었다.


대학 졸업 후 바로 취업을 했다. 회사의 위치는 양재, 우리 집은 인천이었다. 출근을 하려면 세 번의 환승을 해야 한다. 달리 말하면 네 번의 지하철을 타야 한다는 뜻이다. 회사 사람들은 나를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는 출연자처럼 신기하게 봤다.


편도 출퇴근 시간이 1시간 30분을 넘어가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높다고 한다. 하루에 4시간을 길바닥에 버리며 살아보니 영 일리 없는 주장은 아니구나 싶었다. 이런 생활이 약 100일 정도 이어졌다. 곰이 마늘과 쑥을 먹고 사람이 되는 시간. 나는 사람에서 피로에 쩌든 곰이 되었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용기 내어 부모님께 독립을 선언했다.


‘이제 너도 성인이니 알아서 해’라고 하실 줄 알았는데 예상밖으로 두 분의 반대가 완강했다. 독립심 강한 딸은 환영이지만 독립하겠다는 딸은 환장할 노릇인가? 남들은 대학 때부터 시작하는 자취인데 뭐가 그리 걱정인지. 외국으로 이민이라도 간다고 했으면 단식투쟁도 하실 기세였다.


친구와 함께 자취를 하는 조건으로 겨우 부모님의 마음을 돌렸다. 물론 1년 뒤에는 각자 다른 집을 구해서 혼자 살긴 했지만. 여자 혼자는 위험해서 안 된다고 다그치던 부모님. 정작 자취방을 구할 때는 오시지 않았다. 부동산을 다니며 발품을 팔고 계약을 하는 건 항상 나 혼자였다. 이쯤 되면 말로만 걱정하시는 건가 싶었다.




나의 중학교 친구 황양은 얼마 전 이런 말을 했었다.

“우리 만날 때마다 너희 어머니한테 전화 왔었잖아”

아직도 이걸 기억하고 있다니. 항상 반복되는 연락이 꽤나 인상적이었나 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약간의 창피함이 느껴진다.


부모님의 심정이 이해는 된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이 여자애라니. 뉴스만 틀면 나오는 흉흉한 소식에 딸 가진 부모는 걱정거리가 한가득이다. 마음은 알지만 불안감을 지나치게 티 내진 않았으면 했다. 특히 외동에게는 친구나 이성 문제에 예민하게 대응하는 경우가 있다. 부모님이 그럴수록 나는 감추는 방식을 택했다. 꼬치꼬치 묻는 게 관심보단 감시로 느껴졌으니까.


외동들에게는 건강하게 대화할 수 있는 부모가 필요하다. 부모마저 대화상대가 되지 않으면 집 안에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그러니 자식이 스스로 드러낼 수 있도록 조금만 덜 아끼고 단속해 주시길. 애타는 마음이 애정으로 느껴지려면 외동들에게는 약간의 자유가 필요하다. 그래야 소중한 마음이 간섭이 아닌 관심으로 전해진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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