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으로 치부된 감정에 대하여
“애가 한 명이에요? 어휴 외롭겠다”
처음 만난 어른들에게 내가 외동으로 소개되면, 그들은 어김없이 나의 고독을 걱정해 주었다. 항상 반복되는 오지랖. 오늘도 부모님은 멋쩍은 웃음을 짓는다. 여기서 마무리되면 그나마 다행. 동생을 낳아달라고 조르라며 나를 부추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땐 나도 수줍은 듯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계속되는 민망한 웃음퍼레이드. 이게 우리 가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동과 고독을 한데 묶어 생각한다. 형제가 없으면 외롭다? 굉장히 단편적인 생각이다. 의외로 외동들은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나도 그랬고 주변의 다른 외동들을 봐도 그랬다. 든자리가 있어야 난자리도 있는 법. 있어본 적도 없는 것에 허전함을 느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공허함에 단련되며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대신 여러 감정들을 마주하며 살게 된다. 그것들은 단순히 ‘외로움’이라는 하나의 범주로 분류시킬 순 없다. 외동이 자라면서 감당하는 상황들이 그리 단순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나도 이 글을 쓰면서 그 간의 심정들을 구체화시키는 기회를 얻었다. 찬찬히 떠올려보니 역시나 외로움으로 치부되기엔 섬세한 감정들이다.
어렸을 때 혼자 느낀 기분의 8할은 ‘심심함’이다. 나를 걱정하던 사람들이 언급했던 외로움은 아마도 심심함의 과장된 표현법일 것이다. 핵가족이 기본값인 요즘, 외동아이는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다.
일을 마치고 온 부모가 아이와 함께 노는 것은 엄청난 에너지를 요구한다. 체력적 한계는 표정과 몸짓으로 드러나고 눈치가 빠른 외동은 금방 파악한다. ‘아 지금 나랑 있는 게 재미가 없구나’ 나는 다시 혼자 노는 방식을 택한다. 1인 2역 소꿉놀이는 이제 익숙하다.
해마다 명절을 기다렸다. 맛있는 음식이나 세뱃돈보다 더 기다려지는 게 있었다. 또래 사촌들이다. 긴 연휴는 유일한 기회다. 그들과 한 집에서 먹고, 자고, 놀 수 있는 1년에 두 번뿐인 찬스. 하지만 빨간 날은 언제나 순삭 아니던가. 익숙해질 만하니 어느덧 헤어질 시간이다. 한참 재밌게 TV를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전이 된 것 같다. 정적은 공허함을 뿜어낸다. 함께 갖고 놀던 장난감을 보니 사촌들 생각이 난다. 다시 혼자 노는데 익숙해져야 할 시간이다. 후유증이 일주일은 갔던 것 같다.
외동을 키우는 가정은 아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는가? 아이의 입장에서 말해보자면, 오히려 그 반대로 느껴진다. 아이보다 어른이 많은 집은 부모를 중심으로 흘러가는 상황이 더 많다. 다수의 법칙은 어김없이 적용된다. ONE키즈존은 가끔씩 NO키즈존이 된다.
외로움은 주로 혼자일 때 느끼는 감정이지만, 소외감은 여러 사람 속에서 느끼는 감정이다. 외동은 혼자라서 문제가 아니라 혼자 남겨져서 문제다. 내가 가족에게 느낀 감정은 외로움이 아니라 ‘소외감’이다.
백화점이나 공항 같은 공공장소에서 외동인 아이들을 보면 자연스레 눈길이 간다. 부모에게 관심을 끌기 위해 말을 걸어 보지만 엄마는 바쁘고 아빠는 피곤하다.
“엄마, 이거 봐봐 내가“
“응, 잠깐만. 엄마 지금 이거하고 있잖아”
어른들의 장소에서 혼잣말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 외동아이. 그 모습이 너무도 익숙해서 짠하다.
혼자 크는 아이들은 대체로 얌전하거나 혹은 그렇게 보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주변 부모들이 부러움을 드러내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아들을 둘 이상 키우는 어른들이 그랬다. 외동들의 의젓함은 대게 후천적으로 만들어진다. 소외되는 순간이 잦아지면 그렇게 자랄 수밖에 없다. 혼자서 정신 사납게 뛰놀고 다니는 아이는 없지 않은가.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이라는 프로그램을 가끔 본다. 문제가 있는 부부에게 솔루션을 제안하는 예능이다. 거기엔 출연자가 다투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나 같은 미혼자에게는 비혼 장려 프로그램이 따로 없다. 부모의 다툼을 아이들이 직관하는 장면도 나온다. 그럼 오은영 박사님은 미간을 찌푸리며 깊은 한숨을 내뱉는다. 아이 앞에서 부부싸움은 절대 금물이라며 일침을 가한다.
특히나 외동에게는 이런 순간이 공포다. 이때 혼자 느끼는 감정은 ‘무서움’이다. 부모님이 싸우는 원인이 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다. 알면서도 눈치를 보게 된다.
나이가 들고 몸집이 커지면 무섭지 않을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언제나 부모의 균열은 가장 큰 공포다.
“엄마아빠가 혹시 갈라서게 되면 누구랑 살고 싶어?”
엄마는 만약에라는 가정을 네댓 번이나 한 후에야 겨우 입을 떼었다. 당시 나는 주민등록증도 나오지 않은 고등학생이었다. 대한민국 수험생은 출제자의 의도를 기가 막히게 파악한다. 나는 이미 엄마가 건넨 질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엄마가 사용했던 가정법을 이번에는 내가 활용했다.
“만약에 그럼… 난 혼자 살 거야”
당연히 진심이 아니었다. 떨리는 마음을 숨기기 위한 거짓말이었다. 나 혼자 이혼 가정의 아이가 될까 봐, 나 혼자 남겨질까 봐, 나 혼자 이런 인생을 살게 될까 봐. 저 대답 뒤에 숨겨진 감정은 오로지 무서움이었다.
감정은 상황에 의해 생긴다. 외로움을 겪는 상황은 크게 두 경우다. 아무도 없을 때, 누군가 있지만 혼자라고 느낄 때. 전자와 후자 모두 외동들은 익숙하다. 심지어 가끔은 고독을 즐기기까지 한다. 외로움을 타고난 자들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엄마들은 뜨거운 냄비 손잡이를 성큼 잡는다. 어릴 적 바라본 그 모습을 항상 신기하게 바라봤다. 엄마는 단단해진 피부 덕에 뜨겁지 않다고 했다. 내가 외로움을 대항하는 자세도 이와 비슷하다. 단단해진 마음덕에 잠깐의 뜨거움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누군가 말했다.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하기 위해서는 혼자서 보내는 시간도 즐거워야 한다고. 홀로 남겨진 순간에 익숙하고, 혼자 감당하는 감정에 단련된 외동은 누구보다 단단한 어른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생각보다 외로움에 강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