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동이 가진 양날의 검
‘최애’는 애니메이션에서 가장 아끼는 캐릭터를 지칭하는 말이다. 요즘은 아이돌 팬덤에서 그룹 내 최고로 애정하는 멤버를 일컫는 용어로 쓰인다. 모두를 차별 없이 사랑하는 팬들이지만 마음속에 최애 한 명쯤은 품고 있기 마련이다. 부모도 마찬가지 아닐까? 안 아픈 손가락 없다한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 유독 마음이 쓰이는 자식은 분명 존재한다.
나는 엄마의 최애 자식이다. 외동이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답정너 질문처럼 당연하게 부모의 관심을 독차지하며 자랐다.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꿀리지 않을 자신은 없지만, 우리 부모님이 최고로 애정하는 사람이 나라는 것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다. 조금의 머뭇거림도 필요 없다. 명확한 사실이니까. 지금까지 받아온 사랑은 지나치게 명료하다.
부모님의 1순위가 되는 건 분명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혼자서 감수해야 할 부분도 많다. 좋지만, 꼭 좋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자식을 키우는 과정을 농사에 비유한다. 중년을 넘어선 부모에게 자식농사는 매우 중요한 과제다. 아이의 성장 수준은 부모의 인생 성적표가 되기도 한다.
여러 농작물을 키우는 농사꾼은 자신의 희망사항을 고르게 나눌 수 있다.
‘감자야, 너는 올곧게 자라렴’
‘옥수수야, 너는 높이 자라렴’
‘단호박아, 너는 예쁘게 자라렴’
외동아이를 둔 부모는 씨앗이 하나뿐인 농부와 같다. 이 생명체를 잘 키워야 한다는 의지가 상당하다. 작물의 수가 부족한 만큼 욕심도 줄어들면 좋겠지만 부모의 기대는 쉽게 수축되지 않는다. 결국 하나의 씨앗에 모든 희망을 품게 된다.
‘얘야, 너는 올곧지만 높게 그리고 예쁘게 자라렴’
요구사항이 많아질수록 자식은 힘들어진다. 완벽한 육각형 자녀가 되는 건 쉽지 않으니까.
초등학교 과학 시간에 하던 돋보기 놀이를 기억하는가? 돋보기의 볼록렌즈는 태양의 열을 한 곳으로 모은다. 집중된 열 에너지를 받은 종이는 점점 뜨거워진다. 정도가 심하면 타기도 한다. 나는 부모님의 관심이 돋보기를 통해 들어오는 햇살처럼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따스했지만 가끔은 뜨겁기도 했다.
기대가 한 곳으로 모일수록 마음의 부담이 커졌다. 부모의 바람이라면 내가 원하는 방향이 아니더라도 받아들였다. 어느 순간부터는 부모가 소망하는 것을 내가 희망하는 것이라 착각하기도 했다. 다른 외동도 나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걸까? 대체로 우리들은 무난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처음부터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건 아니다. 9살 무렵에는 TV에 나온 패션쇼를 보고 의상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말했다. 11살 즈음에는 동네 화장품 판매점에 매료되어 가게 사장님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엄마는 계속 대답이 없었다. 부모로서 원하는 방향이 아니었던 걸까. 어린아이의 줏대 없는 말에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반응이 없으니 말하는 재미도 시들해졌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천진난만하던 상상은 사라졌다. 점점 현실에 맞추어 진로를 바꿨다. 학기 초마다 제출하는 자기소개서를 채울 장래 희망이 필요했다. 나는 그곳에 ‘선생님’이라고 적었다. 딱히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매일 만나는 직업군에 대한 익숙함이었고, 안정된 직장이라는 평이 마음에 들었다. 이번엔 엄마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다. 나에게 잘 생각했다고 말해주었다. 여자한테는 선생님만 한 직업도 없다고 한다.
운동회에서 학년 대표로 시범을 보일 정도로 스포츠 댄스가 재밌었다. 하지만 무용을 배울 시도는 하지 않았다. 꼼지락 거리기를 좋아하던 손재주는 이케아 가구 조립에 쓰이는 재능 정도로 남겨두었다. 오로지 나에게 주어진 길은 학업뿐이라고 생각했다. 공부는 가장 가성비가 뛰어나고 위험도가 낮다. 그리고 부모님이 가장 원하는 길이다. 두 분이 원하는 걸 하는 게 내가 사는 방법이었다. 유일한 자식은 자랑은 못 되어도 흠은 되지 말아야 했다.
형제들과 비교당하며 자란 친구들은 간혹 외동을 부러워한다. 부모에게 비교당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외동들도 비교를 당한다. 다만, 비교 대상이 집 밖에 있을 뿐이다.
우리 엄마는 주변에 존재하는 엄친딸, 엄친아를 기준으로 세웠다. 세상에는 잘난 자식들이 너무 많다. 학원은 안 다니지만 1등만 하는 자식, 새벽까지 잠도 안 자고 공부만 하는 자식 등. 천상계에 있을 법한 아이들이 엄마 주변에는 널렸나 보다. 그런 비교를 당할 때면 가슴속 자신감이 배꼽까지 짓눌리곤 했다.
심지어는 방송에 나온 사람들도 비교 대상이 된다. 한 번은 집에서 다 같이 TV를 보는데 영어 영재가 나왔다. 외국에서 살거나 사교육을 받은 적도 없는 그 아이는 미국 교포같이 꼬부랑 발음을 잘도 뱉어냈다. 그 모습에 감탄하던 부모님이 바로 비교를 시작했다. 나는 두 분에게 따지고 싶었다. 특별한 사람이니까 방송에도 나오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아빠와 엄마가 합심하여 나를 몰아세우는 수적 열세 상황. 이때는 일단 후퇴하는 게 좋다.
외동이 받는 비교에 다른 점이 하나 있다. 비교대상이 부모님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영어 영재가 나오든 수학 천재가 나오든, 부모님의 혈육은 나 하나뿐이다. 자신감은 떨어질지언정 자존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두 분이 나를 가장 사랑한다는 믿음은 내 의식 속에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웬만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집 안과 다르게 바깥세상은 차갑고 냉철하다. 부모로부터 받던 최애 대접을 바라면 안 된다. 담임 선생님이 가장 예뻐하는 학생이 내가 아닐 수도,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벗이 내가 아닐 수도 있다. 나는 두 번째가 되기도 하고 아예 고려 대상에서 제외되기도 한다.
그렇다고 마음의 요동치지는 않는다. 이런 상황에서 불안해하는 사람은 오히려 애정결핍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정에서 사랑을 독점했던 외동들은 사회적 관계에서 해탈의 경지에 이르기도 한다. ‘당신들이 아니어도 나를 가장 아껴주는 사람이 있으니 괜찮아’라는 마인드가 장착되어 있달까.
물론 나를 1순위로 생각하지 않는 가족도 있다. 대표적으로 할머니가 그렇다. 조부모님들은 첫째의 자녀 혹은 집 안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손주를 제일 아끼는 경향이 있다.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막내였다. 자연스레 손주 무리의 최고 연장자는 내가 아니다. 할머니의 최애 손주가 되기에 나는 여러 조건이 자격미달이다. 명절 때 사촌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느껴졌다. 할머니의 마음이 가장 많이 향하는 손주는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래도 괜찮았다. 섭섭하거나 원망스러운 감정도 없었다. 기대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실망스럽지 않았다. 희한했다. 부모의 최애 자식이 갖는 근거 있는 자신감이
이런 건가 싶었다.
영화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 등장하는 반지는 여러 부족을 하나로 모으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어로는 'One Ring'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반지'로 번역되었다. 하나의 반지가 절대적인 것처럼 하나의 자식도 그렇다. 절대적이라는 것은 상대될 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외동이 가진 양날의 검이다. 자식은 부모로부터 사랑만 받는 게 아니다. 부담을 받기도, 미움을 사기도, 학대를 당하기도 한다.
혹시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생긴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주는 사랑의 독점권을 고를 것이다. 누군가에게 변함없는 1순위가 되는 체험은 모든 이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부모님이 다른 형제를 더 아낄 수도 있고, 결혼한 배우자가 자식을 더 애정할 수도 있다. 내가 겪은 진귀한 경험은 생각보다 많은 긍정적 영향을 주었다.
외동들이 애정을 독차지하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무조건적이거나 무한하진 않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다른 아이들과 똑같다. 하지만 뺏기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고 빼앗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지는 않는다. 이런 것들로부터 해방된 외동들은 남들보다 마음의 공간이 살짝 널널한 편이다. 불안감이 있을 곳에 다른 감정들이 놓일 수 있도록 자리가 비워져 있으니까.
어른이 되면서 배우고 있다. 조금의 여유가 큰 차이를 만든다는 것을. 올림픽 경기에서 승패를 좌우하는 건 운동 실력보다 흔들리지 않는 멘탈이다. 내가 지닌 조금의 여유가 언젠가 다가올 승부를 결정지을 중요한 자산이 될지도 모른다. 외동이 가진 양날의 검, 잘못하면 베일수도 있지만 잘만 사용하면 두 배의 효율을 낼 수 있다.
* 사진 출처 : 나무위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