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생은 말고요
MBTI 중 두 번째 글자는 S와 N으로 나뉜다. S는 감각형으로 현실 중심의 사고를, N은 직관형으로 추상적인 사고를 하는 유형이다. 이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조금 엉뚱한 질문이 필요하다.
"만약에 좀비가 된다면 넌 어떻게 할 거야?"
이 물음에 고개가 갸우뚱하거나 아무 미동도 없다면 당신은 S에 가깝다. 반면, 갑자기 부산행 열차라도 탄 것 마냥 상황에 몰입하기 시작한다면 당신은 N에 근접한 사람이다.
이 실험으로만 본다면 나는 완전한 S다.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을 내용은 제 아무리 ‘만약에’라는 부사를 달고 있어도 용납되지 않는다. 별 흥미도 없고 상상하기도 귀찮다. 어차피 좀비가 될 일도 없는데, 굳이 왜? 나는 지독한 현실주의자다.
이런 나도 가끔은 가상현실을 즐긴다. 주로 나의 희망사항과 관련된 상상이다. 만약 내가 로또에 당첨된다면 당첨금 수령은 무슨 요일에 할까? 만약 내가 당장 회사를 그만두면 가장 먼저 뭘 할까? 꿈같은 이야기지만 실현가능성이 완전 0%는 아니다. 언젠가는 실제가 될지도 모르는 상상 정도는 하고 사는 S형 인간이랄까.
그런데 내가 유일하게 N이 되는 때가 있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것을 상상하는 순간. 바로, 형제에 대한 공상을 하는 때이다.
나에게 오빠가 있다면 어떨까?
동생이 있다면 무슨 기분일까?
언니가 있다면 나는 어떤 동생이 되었을까?
터미네이터나 아이로봇 같은 SF영화는 과학기술의 발전을 등에 업고 먼 미래에 일어날 가능성이라도 있지. 내가 하는 공상은 일말의 가능성도 없다. 완전 제로의 확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가끔 그리고 잠깐씩 형제 VR체험을 해본다.
점집을 찾는 취미는 없지만 새해가 되면 신년 운세를 습관적으로 찾아보는 편이다. 원래는 '점신'이라는 무료 어플에서만 확인했는데, 재작년에는 궁금한 것이 많아서 다른 채널도 찾아보았다. 그러던 중 금융회사에서도 공짜 토정비결을 볼 수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내가 이용하는 주거래은행에서 서비스를 제공 중이었다. 나는 곧장 이름과 생년일시를 입력했다. 결과지에는 인생의 여러 가지 운이 나와있었다. 재물운, 이성운, 직업운 등등. 그중에는 형제운도 있었다.
<형제운>
다복하지 못하니 수족으로 인해 마음고생이 심합니다. 형제가 있어도 그 역할이 한정되어 오히려 나를 힘들게 합니다. 집안의 재물을 상하게 하여 가족 간 마찰의 원인이 되며 뜻이 통하지 않으니 왕래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생각이 크게 다르니 간혹 종교적인 문제나 철학적인 문제로 분란이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덕을 생각하기에 앞서 이해와 관용의 마음이 더 필요한 식구네요. 뜻을 함께 하지 않으니 때론 남보다 심한 싸움을 하게 되기도 합니다. 나이 들어 후회할 식구이니 부모 살아생전에 반드시 화합을 이루어 위아래의 역할을 분명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있지도 않은 나의 형제님은 재물을 훼손하고, 왕래가 거의 없으며, 남보다 못한 사이라는 건가?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신은 형제복이 아주 더럽게도 없습니다’쯤이 되겠구먼. 잠깐! 형제가 없는 것도 달리 말하면 형제복이 없는 거 아닌가. 그렇다면 나는 외동이 될 운명이었나.
외동 vs 득 보다 실이 많은 형제
이런 잔인한 밸런스 게임을 봤나. 나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이것뿐이라니. 내 팔자에 형제는 없는 게 맞나 보다. 태어날 때부터 정해졌다고 생각하니 오히려 미련이 덜하다.
어릴 때는 형제 있는 친구들이 크게 부럽지 않았다. 별 생각이 없었다는 게 더 정확하겠다. 학교에서 마주쳐도 대면대면한 오빠, 잔심부름을 시켜대는 언니, 귀찮게 챙겨줘야 하는 동생.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고 집에 오면 혼자였지만 이것도 익숙해지니 나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으니 오히려 좋기도 했다.
난 언제부터 그들을 부러워하기 시작했을까? 아마도 학교를 졸업한 이후부터 인 것 같다. 법적으로 성인이 되자 신기하게도 그들의 모습이 달라졌다. 사소한 걸로 유치하게 싸우지 않았고, 안중에 없는 듯한 투명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다. 서열 전쟁이 끝나고 동등한 인격으로 서로를 받아들인 느낌이랄까. 형이나 언니는 부모님과 별개로 의지하는 대상이 되고, 마냥 어리던 동생은 기댈 수 있는 어엿한 어른이 된다. 적어도 제 3자인 외동인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와는 멀어진다는 소문은 슬프지만 사실이었다. 나 역시 이 명제를 비껴갈 순 없었다. 30대 중반이 다가오니 가까웠던 친구들과도 멀어지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거의 매일 보곤 했는데. 이제는 1년에 한 두 번 만나면 자주 보는 편에 속한다. 벌써부터 이 정도인데 앞으로는 더 소원해지겠지? 나이는 벗과의 거리를 나타내는 숫자인가 보다.
반면에 친구들은 그 시기부터 형제와 더욱 가까워지는 양상을 보인다. 이들은 그 누구보다 서로의 소식을 자주 공유한다. 내 주변만 봐도 자매가 있는 친구들은 시시콜콜한 일상을 전부 언니나 동생에게 보고한다(남자형제들은 잘 모르겠다).
TV에 가끔 우애 좋은 형제들이 나온다. 동생은 형을 제일 좋아한다고 말하고, 형은 동생이 가장 친한 친구라고 말한다. 형제, 자매는 평생 친구라는데. 그 말이 사실인가 보다. 이들은 서로에게 어떤 의미일까? 엄마 뱃속을 공유하고 피를 나눈 사이란 도대체 무슨 느낌이지? 나는 죽었다 깨어나도 알지 못한다. 형제를 향한 부러움은 증폭되어 때로는 그들의 존재를 갈망하기까지 한다.
로또가 당첨되었을 때 기분은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르지만, 당첨금으로 뭘 하고 싶은지는 생각해 볼 수 있다. 나 또한 형제가 있으면 느끼는 감정은 모르지만, 함께 하고 싶은 일들은 충분히 떠올려볼 수 있다. 이왕이면 언니가 있는 게 좋겠다. 상상이니까 내 맘대로 설정해도 되지 않을까?
갈망한 것 치고 너무 소박한 꿈이다. 겨우 동네 카페 가기라니.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위대한 것이라는 말처럼, 일상의 동행을 가장 해보고 싶다.
동네 카페는 남과 가기 쉽지 않다. 그것이 친구여도 마찬가지다. 사회인이 되면 그렇게 된다. 가까이 살면서 근무패턴도 비슷하다면 모를까. 친구와 불쑥 만나기란 쉽지 않다. 점점 나이에 걸맞은 예의를 갖추게 된다. 어릴 때처럼 당장 나와달라며 떼쓰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친구는 일하는 중 일수도, 선약이 있을 수도, 집에서 쉬고 싶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매들은 친구와는 다른 류의 편안함이 느껴진달까? 지켜야 하는 에티켓의 기준이 완화된 것처럼 보였다.
결혼과 출산을 넘어 육아의 삶에 정착하면 친구들을 만나기가 어려워진다. 나는 미혼이지만 친구들이 애엄마가 되니, 나 역시 그녀들을 만나기가 어렵다. 결국 비슷한 자유인 신분의 친구들만 만나게 된다. 하지만 얘 때문에 시간내기 어렵다는 친구들도 자매들과는 자주 만난다. 이제 친구는 각 잡고 만나야 하는 사이라면, 자매는 편하게 마주할 수 있는 관계다. 그게 바로 친구와 자매의 차이인 것 같다.
부모님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나는 가족여행이 재밌지 않다. 절대 오해는 없으시길 바란다. 재미가 없다고 해서 행복하지 않다는 건 아니다. 세 식구가 함께하는 시간은 감사하고 기쁘지만 솔직히 재미는 없다.
가족여행이 어떻게 즐겁지 않을 수 있어?라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겠지. 나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내가 언급한 재미는 화목함과는 별개의 영역이다. 일종의 유머요소가 없다고 생각하면 된다. 영화를 예로 들면 이해하기 쉬우려나? 작품성은 뛰어나지만 약간 졸린 영화가 있다. 좋은 영화인 건 알겠는데 좀 지루하다. 한 번씩 빵 하고 터지는 배꼽도둑급 대사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없달까. 우리 집의 가족여행은 밍밍한 명작 같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가족여행을 갔다. 그래서 조금 헷갈린다. 내가 외동이라서 재미가 없는 건지, 부모님을 챙겨야 하니까 재미가 없는 건지. 판단하기가 어렵다.
성인이 된 외동은 부모님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 일명 ‘독박투어’다. 내가 여행자인지 여행사 직원인지 분간이 안 간다. 고통을 분담할 형제가 절실히 필요하다. 세대차이도 큰 요소다. 나는 부모님의 이야기가 역사책에 등장하는 선사시대 기록처럼 느껴지고, 반대로 부모님은 나의 이야기를 깊이 공감하지 못한다. ‘요즘 애들은 그렇다며?’라고 이해해 보려 노력하시지만 역부족이다. 가끔은 영혼의 공감을 표현해 줄 또래 가족이 필요하다. 나와 함께 맞장구를 쳐줄 형제가 있으면 재밌을 것 같다.
형제가 가장 필요한 때가 언제인지 아는가? 부모님 욕을 하고 싶은 순간이다. 불효막심하게 부모 뒷담이나 하려고 혈육을 바란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겠지. 하지만 간절히 필요하다. 나의 욕 메이트가.
친구에게는 말할 수 있는 한계치가 있다. 심부름을 많이 시킨다는 둥, 반찬투정을 하다 혼났다는 둥. 말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표면적인 이야기들. 정작 중요한 마음속 깊은 응어리는 펼쳐 보일 수 없다. 그것이 누워서 침 뱉기가 되기도 하니까.
친구에게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건 가족뿐이다. 문제는 나의 가족은 부모밖에 없다는 것이다. 당사자에게 욕을 할 순 없지 않은가. 나는 혼자서 삼킬 수밖에 없다. 만약 내가 결혼을 해서 삶의 동반자를 만나더라도 이 응어리는 꺼내지 못할 것이다. 내게는 평생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이야기가 남아있다.
나의 말을 들어줄 형제가 생긴다면 다 쏟아내고 싶다. 울지 않기 위해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감출 필요도 없다. 눈물을 흘리지 않기 위해 얼굴에 힘을 줄 이유도 없다. 그렇게 가슴속에 봉인했던 말을 시원하게 뱉어내고 싶다.
누구나 부모에 대한 서운함과 불만이 있다. 시간이 지나면 해소되었다고 착각하지만, 풀지 않는 한 계속 존재한다. 형제가 있다고 멍울이 완전하기 사라지진 않는다. 그래도 입 밖으로 나온 조각만큼은 줄어들지 않을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데.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형제의 진득함을 모른 채 살아가겠지? 이번 생에는 만날 수 없던 2촌의 존재. 궁금증은 부러움과 아쉬움으로 남았다.
막상 갑자기 나의 혈육이 생기면 끔찍할 것 같다. 마치 도플갱어를 만나는 기분이지 않을까. 만약 지구상에 내가 아닌 부모님의 또 다른 자식이 있다면? 마주치는 묘한 불쾌함이 온몸을 감쌀지도 모른다.
그저 바라본다. 혹시나 내게 인간으로서의 다음생이 주어진다면 그때는 형제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치고받고 싸우겠지만 은근한 끈끈함을 느낄 수 있게 2촌을 만들어 달라고. 분수에 동전을 던지듯 가볍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빌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