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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독자 Sep 15. 2024

외동딸도 상주가 되나요?

추억공유자의 부재


급식을 먹을 때, 나는 아끼는 반찬을 마지막까지 남겨두는 아이였다. 나물 무침이나 생선 조림류는 먼저 해치웠고, 돈가스나 치킨너겟은 최후의 반찬이 되어 은빛 식판을 지켰다. 좋아하는 음식으로 입가심을 하고 나면 기분이 좋았다.


이렇듯 나는 고진감래의 성향을 갖고 있다. 힘든 일은 앞으로, 행복한 일은 뒤로 미룬다. 마음껏 놀기 위해 숙제를 먼저 하고, 편히 쉬기 위해 회사일을 미리 끝내며, 미래의 행복을 위해 현재의 즐거움을 조금 양보한다. 부지런하다기보다는 배짱이 없는 타입이다. 귀찮고 어려운 일이 남아있으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이번 글은 <외동이 어른이 되면>의 마지막 글이다(아! 에필로그는 남아있다). 그간의 행보에 따르면 가장 즐거운 이야기를 남겨두어야 맞지만, 이번엔 그러지 못했다. 가장 하기 싫은 이야기를 맨 뒤로 미뤄두었다. 말이 씨가 될까 봐, 아니 글이 씨가 될까 봐 그랬다. 피하고 싶은 주제였지만, 피할 수 없는 숙명이기에 담담히 적어보려 한다. 세상 모든 외동이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과제를.




나이가 들수록 결혼식보다 장례식에 갈 일이 많이 생긴다고 한다. 아직 30대 중반밖에 되지 않았는데 벌써 공감이 간다. 주변에 결혼할 만한 사람들은 거의 식을 올렸다. 격주로 가던 예식장을 요즘은 몇 달에 한 번꼴로 간다. 그러나 지출되는 경조사비에는 큰 변동이 없다. 축의금의 빈자리는 조의금이 대신한다. 경사와 다르게 애사는 예고 없이 찾아온다. 이제는 하객룩이 아닌 조문룩을 고민한다. 제대로 된 검은 옷 한 벌을 장만해야겠다.

  

어색했던 문상 예절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 인사는 어떻게 하는지,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하는지, 언제쯤 방문하는 게 좋은지 등등. 우왕좌왕하던 어리숙함은 사라졌다. 익숙해지니 다른 게 보이기 시작한다. 조문객을 맞이하느라 쉴 새 없이 절하는 상주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예전에는 그저 남일처럼 느껴졌는데... 요새는 그렇지 않다. 선생님 손에 든 회초리를 맞기 위해 줄을 선 학생이 된 기분이다.


인간은 누구나 태어나고 죽는다. 이것에 예외는 없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다. 언젠간 나도 검은 상복 위에 완장을 차고 저 자리에 서있을 것이다. 부모님을 떠나보내며 동시에 문상객을 맞이하지 않을까. 슬퍼서 울기도 했다가, 지쳐서 기대기도 하고, 다시 기운차려 일어나겠지.




회사 후배의 부친상에 가기 위해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내려간 적이 있다. 그때 함께 갔던 회사 동료분이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분은 오래전 조문을 다녀오는 길에 둘째를 가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문득 자신의 아이가 혼자 장례를 치르는 모습을 상상했더니, 무조건 형제를 만들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이 이야기를 듣고 나니 부모님이 조금 원망스러웠다. 두 분은 과연 나를 위해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을까?


계획하기 싫지만 대비해야 한다. 혼자 상주가 되는 일 말이다. 문득 궁금해져서 인터넷을 찾아봤다. 검색어는 ‘여자 상주’. 생각보다 많은 글들이 쏟아졌다. 나만 궁금한 게 아니군. 보통은 아들이 상주를 한다. 딸만 있는 경우 사위가 상주를 한다. 미혼인 외동딸은 누가 상주를 할까? 집안 어르신이나 남자인 친척이 상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자식이 있는데도 여자라는 이유로 다른 이가 상주 역할을 대신했지만, 시대의 변화를 반영해서 요즘은 여자가 상주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다행이다. 생각보다 대한민국은 많이 변했구나. 앞으로 사람들의 인식은 점점 더 바뀌어가겠지. 덕분에 외동딸인 내가 상주를 하는 것은 꽤나 자연스러운 일이 될지도 모른다.




2020년 초, 코로나가 전 세계를 덮치기 직전. 우리 집안에 슬픔이 먼저 덮쳤다. 평소 몸이 안 좋으셨던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갑작스레 연락을 받은 우리 가족은 가장 빠른 차편으로 부산에 내려갔다. 우리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삼촌들이 장례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서둘렀음에도 불구하고 많이 늦은 느낌이었다.


친조부모님은 내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그때는 구석에 앉아 사촌들끼리 자리를 지키는 게 전부였다. 성인이 되고 장례를 치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가까이서 지켜보니 고인을 보내드리는 일은 선택의 연속이었다. 장지는 어디로 할지, 꽃은 얼마큼 놓을지, 수의는 뭘로 입혀드릴지, 수목장을 할지 납골당에 모실지. 이 모든 걸 외삼촌들이 해결해 주었다.


엄마는 종종 나에게 말했었다. 남자 형제는 결혼하면 남이라고. 크면 있으나 마나 한 존재라고 말이다. 하지만 엄마는 쓸모없다던 외삼촌들의 도움을 전적으로 받고 있었다. 사실 오래전부터 그랬다. 가까이서 할아버지를 모신건 외삼촌들이었으니까. 한평생을 막내 외동딸로 살아온 엄마. 과연 나의 앞선 걱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생각하기 싫은데 계속 떠올리게 된다. 홀로 상주가 된 나의 모습을. 상상 속 나는 모든 조문객들에게 혼자 절을 하고, 상조회사 직원이 내미는 선택지를 고민하고, 상차림 음식 주문을 넣고, 식사하는 손님들에게 감사 인사를 한다. 나에게 제대로 슬퍼할 겨를이 있을지 모르겠다.


결혼식은 부모 손님이고 장례식은 자식 손님이라는데. 우리 부모님에게 찾아올 조문객은 내 지인들 뿐이다. 좁디좁은 인간관계를 지금부터라도 넓혀야 할까? 회사를 그만두지 말고 끝까지 다녀야 하나? 별개다 고민이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는 삼 형제가 등장한다. 그중 둘째인 동훈(이선균)에게 큰형과 막내가 매번 신신당부를 한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절대 회사를 관두면 안 된다고. 제대로 된 화환은 있어야 하지 않냐며 걱정한다. 자식이 세 명이나 있는데도 고민하는 내용은 똑같나 보다.




장례는 3일이면 끝나지만, 그 이후에는 약 30년의 시간이 남아있다. 나는 그때가 더 두렵다. 나와 함께 부모님을 그리워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 엄마, 아빠는 내 머릿속에만 남아있는 기억이 되겠지. 무료 나눔도 되지 않는 고립된 추억.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엄마에게는 챙겨야 하는 기일이 생겼다. 그날을 보내고 나면 부모님은 나에게 작은 부탁을 하곤 한다.

“나중에 엄마, 아빠가 떠나고 나면 번거롭게 제사 같은 거 지내지 마. 우리가 좋아했던 음식 맛있게 먹으면서 한 번씩 생각해 주면 돼“

씁쓸한 이야기를 내뱉는 두 분의 얼굴에 애쓴 미소가 그려진다.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한다. 그렇게 하겠다고 웃으며 말할 수도, 아직 건강히 살아계신 부모님을 두고 눈물을 보일 수도 없다. 수락과 거절 사이. 그저 가만히 듣는다. 최대한 죽음 앞에서 무덤덤한 척. 아직은 먼 이야기라 무심하게 흘려듣는 척. 그게 내가 선택한 최선의 대답이다.


결혼을 하게 될지 모르겠지만, 했다고 한들 남편이 나만큼 부모님을 애틋해할까. 나이 들어 사촌들과 가까이 지낼지 모르겠지만, 그렇다 한들 그들이 나만큼 부모님을 살뜰히 기억할까. 아주 먼 훗날이었으면 좋겠을 그날. 내가 누구와 함께 밥을 먹으며 부모님을 떠올릴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것만은 확실하다. 아마 나는 혼자서 부모님을 추억할 것이다.




기나긴 세월 동안 나는 얼마만큼의 외로움을 느끼게 될까? 외동이 외롭다는 건, 어쩌면 부모가 사라진 이후의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할 수만 있다면 방학숙제처럼 끝까지 미루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 방학은 끝나겠지. 부디 개학식이 최대한 늦춰지길 기대할 뿐이다. 나에게 끝없는 시간이 주어지길 염치없이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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