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외동이 어른이 되면>은 우연히 다가온 질문으로 시작되었다.
"외동으로 자라면 어때?"
생각해 본 적 없던 지금까지의 삶. 상상해 본 적 없던 앞으로의 인생. 당사자인 나조차 좋고 나쁨을 가늠할 수 없었다. 머릿속은 뒤죽박죽 엉켜있었다. 그래! 글을 쓰면서 정리해 보자. 정돈을 하니 그제야 보인다. 먼지 뭉터기에 둘러 쌓여있던 감정들이. 옷장 밑으로 굴러 들어가 한참을 잊고 지낸 본심이. 하나, 둘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나의 대답은.
"나는, 내가 외동인 게 싫었어"
연재를 시작하기 전, 나 자신과 약속했다. 어떤 결론을 내리더라도 과거형으로 남겨두기로. 현재형까지 번지게 내버려 두진 말자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당부했다. 그래서 ‘싫어’가 아닌 ’싫었어‘로 마무리짓는다.
이미 예상했다. 내가 내릴 결론은 부정에 가깝다는 걸. 나는 인생에 불만이 가득한 사람이다. 이런 내가 불과 몇 달 만에 긍정의 아이콘으로 바뀔 리 없다. 지나간 시간을 부드러운 파스텔톤으로 미화시켜 봤다. 다가올 내일에 힘껏 희망회로를 돌려도 봤다. 역부족이었다. 좋은 점은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한참을 풀밭에 앉아 네잎크로버를 찾다가 결국 빈손으로 일어난 기분이다. 진짜 없는 걸까. 아니면 내 눈에만 보이지 않는 건가. 행운을 뜻하는 네잎크로버는 내 삶에 없었다. 가끔은 든든한 오빠, 의외로 잘 통하는 언니, 은근히 재밌는 동생. 이런 행운이 이번생에는 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풀밭에는 행복을 의미하는 세잎크로바가 넘쳐난다. 다정한 아빠, 사랑이 많은 엄마, 먼저 연락해 주는 사촌언니, 고민을 말할 수 있는 친구들. 돌아보니 주변이 온통 행복이다.
아무리 툴툴거려도 세잎이 네잎이 될 수는 없다. 이제 그만. 이번생에 허락된 어리광은 여기까지다. 지금부터는 보이는 것에 집중하려고 한다. 갖지 못할 행운 따위는 깔끔히 포기하고, 외면했던 눈앞의 행복을 취하기로 했다. 그동안 세잎크로버를 너무 무시했다. 흔하다는 이유로 소중함을 느끼지 못했다. 투덜거리며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외동이 가진 행복은 너무도 귀중하다.
어두운 감정도 봉인하기로 했다. 혼자 남겨질 불안감, 혼자 느끼는 소외감, 혼자 감당할 부담감, 혼자이긴 싫지만 혼자이고 싶은 이중적인 마음까지. 이 책에 담아두고 다시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버리는 게 아니다. 일부러 들춰내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잔잔한 모래바닥을 휘저으면 맑은 개울도 흙탕물로 변한다. 그런 행동은 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외동의 이야기를 책의 주제로 정한 목적은 단 하나. 이런 삶의 모습도 말하고 싶었다. 나만 아는, 혹은 소수의 우리만 아는 장면들을 전하고 싶었다.
내가 서술한 일화들이 모든 외동들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다. 부모의 가치관, 자라온 환경, 개인 성향, 시대적 상황에 따라 외동도 각자 다른 색을 드러낸다. 나는 외동이지만 안 그랬는데? 우리 아이도 외동인데 그러면 어떡하지? 이런 의문과 걱정은 잠재워주시면 좋겠다. 외동의 모습을 일반화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외동아이를 키우는 방향을 제시하려는 뜻도 없었다. 내가 뭐라고 감 놔라 배 놔라 하겠나. 말도 안 된다. 그럴 자격도 없다. 나는 이 땅에 태어난 한 명의 외동일 뿐. 내 생각과 경험으로 기준이 세워지는 건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다. 그냥 궁금증을 해소시켜주고 싶었다. 우리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중에 크면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될까? 외동이 아니었던 부모들이 외동인 자식을 이해하려는 행동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그 대상에는 우리 부모님도 포함이다.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라도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 것들이 있다. 나 같은 과묵한 외동딸의 속마음은 특히나 난의도가 높다. 나도 한 번쯤은 털어내고 싶었다. 주머니 안감을 뒤집어 빼내듯 내 본심을 보여주고 싶었다. 비록 그것이 부모님이 원치 않는 행동이더라도, 이번만큼은 나를 위해 그러고 싶었다.
놀랍게도 한 편씩 이야기를 쓸 때마다 묵은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다. 이게 바로 글쓰기의 힘인 걸까. 지금은 원망스러운 마음이 많이 사라졌다. 나중에 불현듯 반갑지 않은 감정이 나타나도 괜찮을 것 같다. 발견하는 즉시 잘 타일러서 돌려보낼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그냥 외동이 아니다. 어른이 된 외동이다. 외동이 어른이 되면, 성숙해져야 행복할 수 있다.
지잉-. 핸드폰이 울리면 곧바로 알림 창을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되었습니다. 이게 다 브런치 때문입니다. 그중 제 심장을 가장 뛰게 하는 것. 바로, 독자분들이 적어주신 댓글이었습니다.
OOO님이 댓글을 남겼습니다.
그냥 지나치거나 라이킷만 누르고 나갈 수도 있을 텐데. 하나의 글을 읽고 하나의 글을 남긴다는 건 대단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 마음에 반응하고 싶었습니다. 그래, 일일이 답글을 달아드리자! 그렇게 조금이나마 보답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남겨주신 글에는 단순한 공감, 응원만 있지 않았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깊은 고민이, 아픈 상처가, 넓은 시각이 담겨있었습니다. 차마 답을 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회피를 택한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독자분들의 글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역시나 제 생각을 드러내기에 과분한 글들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바꿨습니다. 댓글창은 오롯이 읽는 사람의 공간으로 남겨두자. 그곳에서 저는 쓰는 사람이 아닌 읽는 사람이 되기로 했습니다. 그래도 감사인사는 꼭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에필로그에 저의 마음을 적어봅니다.
“매우 공감합니다”
짧은 한 문장을 한참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안도했습니다. 나만의 생각은 아니었구나. 혼자만의 글이 되진 않았구나. 누군가의 마음에 닿았다는 게 참으로 다행스럽습니다.
성별도, 나이도, 직업도 모르는 사이. 제가 아는 건 여러분들이 외동이라는 사실 하나였지만 그것만으로 힘이 되었습니다. 멀리서 혹은 가까이서 살고 있을 여러분들. 각자 짊어진 외동의 무게를 잘 견뎌내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제 가슴을 누르던 짐도 조금은 가벼워진 기분입니다. 부디 여러분들에게도 제 글이 작은 안식처가 되길 바랍니다.
‘형제가 있으면 이럴 거야’라고 편협한 생각을 했습니다. 덕분에 다른 형태의 삶을 들여다볼 기회가 생긴 것 같습니다.
여러분들이 외동의 마음을 완벽히 공감할 수 없는 것처럼, 저 또한 형제가 있는 인생을 온전히 이해하진 못합니다. 하지만 이건 가능했습니다.
'아… 형제가 있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좁은 시야를 조금은 넓힐 수 있었습니다. 저 또한 이 정도의 반응만 받는다면 충분히 감사할 것 같습니다.
'아… 외동이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한 단락을 넘어가는 긴 댓글들. 대부분 아이를 키우는 부모님들이 남겨주셨습니다. 길지만 막힘없이 단숨에 읽혔습니다. 여러분들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저의 치기 어린 감정표현을 보고 ‘혹시 우리 아이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하며 스스로를 질책하는 모습이 처음엔 당황스러웠습니다. 이후엔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조금 더 순화해서 적을걸 그랬나? 이 말은 쓰지 말걸 그랬나? 뒤늦은 고민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외동으로 자란 1인으로서 꼭 전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식에 대한 치열한 고민을 했다는 것. 그 자체만으로 자식은 부모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 정도의 사랑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훌륭한 양육자입니다. 이건 저희 부모님에게 하고 싶은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외동이 어른이 되면>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처음 연재되는 글이라 정돈되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정제되지 않은 문장에는 오히려 날것의 마음의 담겨있습니다. 진심만큼은 생생하게 전달되길 바랍니다. 부족한 글에 관심을 가져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