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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잔차키스의 도시, 이라클리오

미노타우로스와 조르바의 흔적을 찾아서

by 낮은 속삭임

한냐의 일정을 정리하고 체크 아웃 후 차에 짐을 실었다. 두 시간 여의 운전이 필요하기에 한냐를 벗어나기 전 주유소에 들렀다. 당연히 셀프 주유일 줄 알았는데 직원이 주유해 주고 카드 계산까지 완료. 게이지의 1/4이 남은 상태에서 가득 넣으니 48유로가 계산되었다. 섬이라 본토보다 주유비가 많이 드는 편이다. 그리스의 기름값은 우리나라보다 조금 더 비싼 듯하다.

역시 오늘도 가민 내비게이션이 말을 안 들어서 구글맵을 켜고 출발. 만약 다음에도 렌터카를 몰게 된다면 그냥 구글맵으로 해야겠다.

크레타섬의 도로 사정은 그리 나쁘지는 않다. 왕복 2차로라 해도 갓길이 넓은 편이라 최대한 갓길에 붙여 운전하면 빨리 가야 하는 차들이 알아서 추월한다. 운전을 하고 가니 뚜벅이로 다닐 때 못 보았던 풍경들을 보게 되어 좋다.

이라클리오까지 가는 내내 바다를 바라보고 간다. 물론 독특하게 생긴 산들도 보지만, 역시 크레타는 섬이다. 지중해에서 다섯 번째로 크고 그리스에서는 가장 큰 섬 크레타의 주도가 지금 찾아가는 이라클리오이다. 헤라클리온, 이라클리온이라고도 불리는 이 도시의 시내로 진입하기 위해 좌회전을 해야 하는데, 왕복 4차선 도로에 신호등 없이 좌회전이라니 정말 답이 없다. 겨우 진입했는데 뒤차가 경적을 세게 울렸다. 무시하고 가려니 뒤차 아저씨가 옆에 차를 붙이더니 뭐라 뭐라 하신다. 알아듣도 못하는 그리스어지만 아마도 잘 보고 들어와야지 하는 그런 제스처다. 미안한 척 손을 들어줬더니 쿨하게 지나가신다. 본인 하고 싶은 말 다하고 상대방이 알아들었다 생각한 모양이다.

숙소는 바다 바로 앞의 호텔이었다. 주차를 하려고 헤매는데 호텔 직원이 나와서 주차장에 세워둔 봉을 치워주어서 그 자리에 아주 바짝 주차했다. 체크 인 시간이 아직 좀 남아서 호텔 앞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직 입맛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음식은 내게 그저 그랬다. 단, 너무 홍합찜은 너무 짜다는 것은 인정.

식사를 끝내고 체크 인을 했다. 다 마음에 드는 이 호텔에서 단 한 가지 단점은 커피 포트가 없다는 것. 평소에 여행용 포트 챙겼는데 이번에 깜박했던 것이 아쉬웠다. 물론 로비층에 있는 바에서 뜨거운 물을 언제든지 받을 수 있었지만. 테라스에 바람이 가득히 불어온다. 가벼운 옷들을 씻어 바람에 날리지 않게 잠시 널어놓았다.

숙소는 항구와 베네치아 성채 부근이어서 저녁 산책으로 베네치아 성채와 항구 방파제 길을 걸었다. 등대는 너무 멀리 있었서 거기까지는 가지 않고, 갖가지 벽화와 조형물들을 구경하며 적절한 어둠이 내릴 때까지만 산책했다.

다음 날은 크노소스 궁전에 가기로 했다. 시내에서 5 km 떨어진 곳이라, 오늘까지의 렌터카 운전과 딱 맞았다. 차 빼는 사람이 있어서 운 좋게 주차장 좋은 자리를 차지했다. 그런데 사람들이 너무 많다. 올해부터 그리된 것인지는 모르나, 박물관과 유적지 통합 티켓이 없이 각각 따로 표를 구입해야 했다. 혹시나 통합권이 있는가 알아봤지만 없었다. 줄을 서서 크노소스 궁전 티켓을 사서 들어갔다. 유럽 최초의 문명인 미노아 문명의 발상지인 이곳 크노소스 궁전은, 청동기 문명인 미노아 문명과 함께 신화 속 반인반우(半人半牛) 미노타우로스와 미궁의 신비롭고 매혹적인 이야기의 배경이기도 하다. 지금은 다 무너진 폐허만 남아있지만 복원으로 전시된 공간과 장면들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유적지에서 보낸 시간은 정말 흥미롭고 매혹적이었다. 컨디션은 80퍼센트 정도 회복한 상태라 다닐만했다. 이제 이라클리온 시내만 돌아다닐 예정이라 차를 몰고 호텔로 돌아왔다. 주유 게이지가 렌트할 당시와 같아졌다. 호텔에 차를 세우고 나니 이제 배가 고프다. 구글맵을 펼쳐 가까운 맛집으로 갔다. Cooking with Love라는 소박한 이름의 이 가게에서 토마토밥이랑 렌틸콩 수프에 와인 한잔. 토마토밥은 조금 짰지만 따뜻한 렌틸콩 수프가 너무 맛있었다. 감기 때문에 거의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에서 렌틸콩 수프는 축복이었다.

점심식사를 마치고 찾아간 곳은 이라클리오 고고학 박물관. 크노소스 궁전 유적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볼 수 있는, 크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박물관으로 크노소스 궁전에 다녀오기 전후에 방문하기 좋은 박물관이다. 크노소스 궁전에 복원되어 있는 벽화 진품을 보면서 과거 미노아 문명을 다시 돌아보는 재미있는 시간이 되었다고나 할까.

렌터카 반납시간이 가까워져서 숙소로 천천히 돌아왔다. 한냐와 엘라포니시, 이라클리오와 크노소스 궁전을 다닐 때 나의 편한 교통수단이 되어주었던 현대 자동차 소형 SUV 바이욘. 우리나라 차라서 내부 화면을 우리말로 설정할 수 있어서 좋았다. 블루투스로 내 스마트폰 연동시켜서 폰에 있는 익숙한 노래도 듣고. 외국에서 처음 해본 운전이었지만 그래도 해볼 만한 일이었다.

렌터카를 반납한 이후 숙소 근처에 있는 베네치아 성채와 방파제 길을 어제처럼 따라 걸었다. 해질 무렵이 되어서인지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방파제 바깥쪽은 파도가 세고 바람도 강했지만 안쪽의 항구는 더없이 잔잔했다. 길을 걷다 보면 만나는 작은 흉상. 크레타 출신의 그리스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이다. 그리고 방파제 벽에는 다양한 벽화와 장식들이 있는데, 에우로페의 납치, 인어공주의 몇 장면, 크노소스 궁전 벽화들의 모사품 등 보는 재미가 있다.

저녁이 다가오고 어둠이 내리는 이라클리오. 이제 내일 하루는 온전히 이라클리오 시내를 돌아다니는 것으로 보내야지.

크레타에서 보낼 마지막 날이 밝았다. 숙소의 조식을 먹은 후 오늘의 일정을 준비한다. 오늘은 현대 그리스 문학의 대표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를 방문하는 것으로 시작하고자 한다. 바닷가에 있는 숙소에서 약 15분에서 20분 정도 걸어가야 한다. 햇빛이 쨍쨍한 골목길을 통과하여 도착한 성벽 남쪽의 마티네고 보루에 자리한 카잔차키스의 묘는 단출하다. 나무 십자가가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있다고 한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은 <그리스 인 조르바>와 <최후의 유혹>만 읽어보았기에 그에 대해 무엇이라 평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두 권의 소설은 카잔차키스를 내게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카잔차키스의 묘에서 이라클리오를 잠시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갈 것인가 고민도 해야 했고. 가까운 곳에 아이오스 미나스 성당이 있다. 구글맵을 따라 이리저리 헤매다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난 광장에 웅장하게 서 있는 성당의 모습은 사람들을 압도할 만했다. 내부의 천장화, 프레스코화, 제단화도 멋있었던 성당이었다.

성당을 나와 시내 쪽으로 가면서 들른 벰보 분수. 이라클리오 총독 지안 마테오 벰보에 의해 만들어진 이 분수는 이라클리오 최초로 흐르는 물을 공급한 분수라고 한다. 수도교로 물이 운반되었으나 도시 안으로는 흐르는 물이 공급되지 않다가 벰보 분수를 만들면서 도시 내로 흐르는 물이 공급되었다고 한다. 머리 없는 파수병 조각이 분수에 세워진 것도 독특하다. 벰보 분수 옆의 육각건물은 오스만 투르크 시절에 만들어진 노변 분수대인 '세빌'이라고 한다. 어쩌다 보니 벰보 분수보다 세빌을 더 크게 찍어버렸다.

벰보 분수를 따라 내려오면 이라클리오에서 가장 북적한 아름다운 광장인 베니젤로 광장에 이른다. 광장 중앙에 사자 장식이 있는 모로시니 분수가 있어서 사자 광장(Lion Square)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분수는 가동되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식사 시간이 조금 지났다. 예전엔 여행 책자를 살펴가며 식당을 찾았지만 요즘은 스마트폰 검색으로 모든 것이 끝이다. Peskesi라는 식당이 구글에서도 추천되었기에 그곳으로 갔다. 문 앞자리에 앉아 오늘의 점심을 주문했다. 크레타 샐러드에 포도잎, 호박꽃으로 감싸서 찐 밥이었다. 채식주의자는 아니지만, 해외에선 고기 냄새가 안 맞을 때가 있다. 해외여행하는 데 있어서 입이 짧다는 것은 최대 단점 중 하나다. 그래도 선택권은 있으니 다행한 일이지만. 아, 식사와 함께 레드 와인을 한잔 했는데, 이 식당에서는 식사 끝에 라키 한잔을 준다. 소주 한잔 정도 양의 라키는 식사를 깔끔하게 정리해 주는 듯했다.

식사를 끝내고 다시 베니젤로 광장으로 왔다. 성 마가 교회는 전시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데 현재 전시는 바다를 그린 풍경화이다. 아마도 19세기 크레타 출신의 화가이거나 그리스 화가의 작품인 모양이었다.

잠깐 동안 그림을 살펴보고 나와서 만난 건물은 로기아(Logia). 17세기에 지어진 건물로 1915년부터 1945년까지 복원을 거쳐 지금은 이라클리온 시청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한다. 안쪽 공간에서 바라보는 하늘이 예쁘다.

해변으로 쭉 뻗은 길은 '8월 25일 거리'라고 한다. 크레타가 오스만 투르크에 지배당했을 때 대규모 학살이 이루어진 날이 8월 25일이란다. 그래서 그날을 잊지 않기 위해 이 거리에 그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지금은 크레타 금융의 중심지라고. 거리 사진을 많이 찍었는데 어찌 된 것이 거리의 끝자락 사진 밖에 없다. 셀피가 많아서일까.

아이오스 티투스 교회는 비잔틴 교회로 961년에 세워졌다고 한다. 사도 바울의 제자이며 크레타 최초의 주교, 이라클리오와 크레타의 수호성인 성 티투스를 모신 교회로 알려져 있다.

시내를 벗어나 다시 베네치아 항구 방파제로 발길을 돌렸다. 파도소리와 거센 바람이 가득한 이 길은, 땡볕이어도 공기 자체가 서늘해서 걷는 기분이 좋다.

방파제에서 돌아오면서 저 사각형의 요새에 들어가 보았다. 쿨레스 요새라 불리는 이 요새에서 항구와 도시. 바다를 바라보는 것도 새로웠다. 생각보다 요새의 규모는 컸다.

다시 시내로 발길을 돌렸다. 기념품도 조금 사야 하고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의 활기를 느껴보는 것도 좋을 듯하여. 간간이 동아시아 사람들을 보기는 하는데 한국인들이 별로 없다. 아니면 내가 찾지 못하는 것일 수도. 내일 아침 일찍 배를 타야 하니, 오늘의 이라클리오를 눈에 가득 담아야겠다.

저녁이 내린 이라클리오와 작별하고 숙소로 돌아와 짐을 정리한다. 내일 아침 일찍, 우리나라 사람들이 그리스 하면 떠올리는 그곳, 산토리니로 떠난다. 휴양 여행은 거의 해본 적이 없는지라 이제부터 여행할 섬들은 모든 게 새로울 것 같다. 과연, 나는 이런 여행을 좋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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