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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냐(Chania), 더위 속 한기

냉방병인지 여름감기인지 크레타에서 탈 났다

by 낮은 속삭임

어둑해지기 시작한 한냐 공항에서 렌터카를 인수받으러 간다. 공항 밖으로 조금 걸어 나가면 Voyager Car Rental의 키오스크가 있다.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서류 작업을 끝내고 옆에 서 있는 차로 데려갔다. 내가 예약한 차는 여기 이름 피칸토인 우리나라 경차 모닝이었는데, 이 차는 현대 소형 SUV이다. 렌터카 회사에서 무료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라고 한다. 경차가 유지비는 덜 들기는 하지만, 이런 업그레이드는 내 입장에서는 오히려 좋다. 바이욘(BAYON)이라는 이 차는 국내에는 판매되지 않는 것이라고 하는데 베뉴와 동급 차량으로 검색되었다. 차는 너무나 깨끗한 신차여서 기분은 좋았다. 이곳에서 쓰는 가민 내비게이션을 빌리긴 했는데, 저걸 과연 잘 사용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연료 게이지 확인 및 촬영, 차량 외부 촬영을 끝낸 후 숙소로 향했다.

이때 내비게이션은 차량 인수해 주던 직원이 잡아줘서 내비게이션이 말하는 대로 따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한냐에서의 운전이 그렇게 시작되었다. 도로는 그리 나쁘지는 않았지만 차선이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제법 어둑해진 거리에 사람들이 많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사람들을 피해 조심조심 운전하며 호텔 근처에 도착했는데 주차할 자리를 못 찾아서 호텔 주변을 돌았다. 일방통행도로에 진입할 뻔하다가 현지인의 신호를 보고는 반대편으로 꺾었는데 다행히 주차공간이 보였다. 호텔과도 가까운 편이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차를 세워둔, 노상의 무료 주차 공간이었다. 짐을 내리고 호텔에 체크인을 했다. 조식이 포함되는 호텔인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밤늦게 도착했지만, 처음으로 해외에서 운전을 했고 그리하여 이곳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것 역시 다행한 일. 그런데 여름 감기가 조금씩 심해지고 있었다. 일단 오늘은 갖고 있는 상비약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목구멍의 이물감이 이 감기의 첫 증상이었다. 그리고 기침, 재채기를 거쳐 온몸의 기운이 조금씩 빠지고 미열에 식은땀까지. 새벽엔 기침 때문에 몇 번 깨었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깨어난 다음날. 그래도 한냐에 왔으니 이 부근의 아름다운 해변은 다녀와야 하지 않을까 하며 가보기로 한 곳은 엘라포니시. 한냐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걸린다고 했지만 외국에서는 초보 운전자인 내게는 두 시간가량 걸린 듯했다.

몇 번 헤매다 겨우 도착한 엘라포니시에는 많은 이들이 해수욕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 여행하면 좋지 않은 것이 모든 물건을 다 들고 움직여야 한다는 것. 우리나라처럼 물건들을 차에 두고 다닐 수도 없다는 것이 조금 절망스럽기도 했다. 엘라포니시 1일 주차료는 3유로이며, 최대한 안쪽으로 들어가서 주차하는 것이 편하다(아무 생각 없이 입구에서부터 손 흔드는 주차요원을 따라 차를 세우고 꽤 걸었더니 힘들었다). 우리나라 해수욕장처럼 바로 해안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꽤 걸어야 한다. 어쩌면 그런 불편함이 이 해안을 이만큼 보존하게 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오니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생각해 보니 나는 우리나라에서도 해수욕을 그리 즐기지 않는 편인데, 엘라포니시 해안을 찾은 것은 그저 이곳이 유명한 탓이라, 크레타에 왔으니 한 번은 들러봐야 할 곳이라 생각되어서였다. 아름다운 풍경인 것은 맞지만, 역시 나와 해수욕은 좀 맞지 않는 것 같다.

또다시 이곳까지 온 만큼 다시 운전해가야 한다. 가민 내비게이션으로 제대로 주소를 찍었다고 생각했는데 한냐 여객선 터미널이다. 뭐지. 가민 내비게이션을 무시하고 결국 구글맵을 켰다. 두어 번 헤매기는 했지만 결국 숙소에 도착. 비어있는 자리에 차를 세우고 숙소에 잠시 널브러졌다. 편도 두 시간 여의 운전은 힘들었다.

아직 저녁햇살이 많이 남아서 한냐 구시가지를 산책한다. 크레타에 들어와서는 계속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 이렇게 저녁에 나오는 것도 오랜만이다. 뜨거운 한낮은 이미 벌써 지났고 부드러운 저녁햇살을 즐기기 위해 많은 이들이 산책 나오고 있었다. 하루 온종일을 엘라포니시에서 보냈더니 시간이 촉박한 느낌이다.

어느덧 여행은 1/3이 지나고 있었다. 내일이면 이라클리오로 이동한다. 중간에 아름다운 소도시 레팀노(Rethymno)를 들를까 했는데, 지금의 몸 상태로는 이라클리오까지 운전해 가는 것도 무리가 될 수도 있겠다. 식사를 하고 습관처럼 약을 털어놓고는 잠자리에 들어보자. 타지에 나와서 아프니 힘들기는 한데 그래도 어떻게든 견뎌야지. 다음번엔 해외여행 나올 때 여름이라도 뜨거운 물을 넣을 수 있는 물주머니를 챙겨 와야겠다. 여름에 배가 찰 때 꼭 필요한 물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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