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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고한 대나무가 바람에 흔들리나니

풍죽(風竹, 17세기 초반)-이정

by 낮은 속삭임
풍죽(風竹, 17세기 초반)-이정, 간송 미술관 소장

조선 묵죽화의 1인자로 칭해지는, 조선 중기 왕실 출신 문인 화가 탄은(灘隱) 이정의 <풍죽(風竹, 17세기 초반)>. 네 그루의 대나무가 바람에 세차게 흔들리는 장면을 담은 힘찬 그림이다. 바위 아래 뿌리를 내린 대나무는 거센 바람에 흔들리지만 꺾이지는 않는다. 뒤쪽의 그림자처럼 엷게 묘사된 대나무들도 바람에 세차게 휘었지만 그 고고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제일 앞쪽의 대나무는 다른 나무들보다 더 우아하게, 그리고 아름다운 이파리를 바람에 나부끼면서도 그 고고한 모습이 흐트러지지 않는다. 문인화의 대표 주제였던 사군자(四君子)는 '매난국죽(梅蘭菊竹)'의 순서이며 동시에 '춘하추동(春夏秋冬)'의 순서이기도 하다. 겨울의 차가운 바람에도 고아한 모습으로 서 있는 대나무는 당대 사대부들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식물이 아니었을지.

조선 중기 문인화가 탄은(灘隱) 이정은 세종대왕의 5세손으로 왕실 종친이다. 종친으로서 정 3품 당하관에 해당하는 석양정(石陽正)에 봉해졌다가 후에 석양군(石陽君)으로 승격되었다고 한다. 그는 묵죽화의 대가 중 하나로 조선 초기 묵죽화에서 표현된 가는 줄기와 큰 이파리와는 달리, 줄기와 이파리의 비례가 보기 좋게 어울리고 대나무의 강인한 특징을 잘 드러내었다고 한다. 그의 기법은 조선 묵죽화 기법의 기본으로 후대 묵죽화가들이 널리 활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묵란과 묵매에도 조예가 깊었고 시와 글씨에도 뛰어났던 그는 그러나, 임진왜란 때 적의 칼에 오른팔을 크게 다쳤으나 이를 극복하였으며 이후 더 힘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분명히 사군자화는 중국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다. 그러나 탄은 이정의 묵죽화는 중국의 묵죽화와는 다른 특징을 보여주며, 이로 인해 그는 조선의 미적 감각을 반영한 조선 고유의 묵죽양식을 창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은 서울의 간송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정보와 이미지는 네이버 검색을 참고하고 내려받았다.

*오만원권 지폐 뒷면 그림은 두 작품이 섞여있다. 하나는 설곡(雪谷) 어몽룡의 <월매도(月梅圖)>, 나머지 하나가 바로 이 작품이다. <월매도>에 가려져 희미하게 보여도, 고고한 대나무는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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