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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낮은 속삭임 Jun 01. 2024

노래로 기억되는 이는 잊혀지지 않는다

그 노래들과 함께 떠오르는  사람들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귓가에 어떤 노래들이 들리면  문득 떠오르는 오래된 기억들. 그 안에, 잊었다고 생각했던 그들이 있다.

첫 번째 기억은 대학교 새내기 때의 일이다. 같은 단과대의 동기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조금 해졌고, 그 친구로 인해 7, 80년대의 록음악부터 우리 시대의 팝, 그리고 재즈 음악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공통 수강 과목이 많아서 수업 때도 자주 만나곤 했던 그 친구는 과묵한 편이었고, 세련되거나 섬세한 면은 적은 편이었다. 남자 형제만 있는 집에, 남중 남고 출신인 그가 그러한 성향을 지닌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조금 결이 다르게 섬세하고 세심했다. 그 섬세함은 음악을 좋아하는 것으로 표출되었고, 그리하여 그가 다양한 음악을 섭렵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을 것이다.  친구와 친해진 덕분에  또한 여러 팝 음악들을 두루 듣게 되었고, 팝 음악에 더 관심을 갖고 심취하기도 했었다. 그에 대한 내 마지막 기억이면서 또한 오래된 옛 추억은, 대학교 졸업식 이후 따로 만났을 때의 이다. 졸업 후 군 복무를 해야 했던 그가 아마 복무지로 떠나기 전이었던 것 같다.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그는 내게 잘 지내라, 나는 그에게 잘 다녀오라는 얘길 하지 않았나 싶다. 그날 헤어지면서 그가 내게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건넸다. 자기가 좋아하는 재즈 곡들 중에서 듣기 편하고 대중적으로 알려진 음악만 뽑아서 녹음했다고. 집에 와서 그 테이프 케이스를 열었더니 편지 한 장이 함께 나왔다. 다른 내용 없이, 테이프에 녹음된 곡들을 빼곡하게 설명해 둔 것이었다. 제목과 가수, 그리고 어떤 분위기에 들으면 좋은지를 담담히 써내려 간 소개서 같은 글. 다른 어떤 감정적 표현도 없는 멋스럽지 않은 설명이 가득한 글이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건 그의 고백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노래를 선정하고 녹음한 뒤, 다시 들으면서 그것을 정리했을 터, 그리고 이것을 나를 위해 만들었을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니. 나만을 위한 그의 재즈 컴필레이션 중에서, 지금 들어도 그가 생각나는 곡은 프랭크 시나트라(Frank Sinatra)와, 록 밴드 U2의 보컬 보노(Bono)의 1993년 듀엣 버전인 'I've Got You Under My Skin.' 프랭크 시나트라의 편안하고 부드러운 속삭임 같은 목소리와, 낮고 매혹적인 보노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어우러지는 이 노래는, 어디선가 들려올 때마다 그때의 그와 나를 떠올리게 한다. 아직은 순수함이 더 많았던 나의 이십 대, 흑역사일 수도 예쁜 기억일 수도 있는 그때의 그와 나를.


두 번째 기억은 직장인이 된 이듬해였던 것 같다. 우연히 동창 모임에서 만난 그와 어떻게 친해졌는지는 잘 모른다. 그 무렵엔 동창 찾기가 무슨 유행처럼 이뤄졌으니까. 그 동창 모임을 주도했던 친구는, 초등학교 6학년 때인지 중학교 때인지 외지로 전학 간 친구였다. 그 친구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동창들이 잊어버린 소소한 일들을 아주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우리를 당황시켰다. 그런 그와 함께 나타난 키 크고 덩치 큰, 그리고 말이 별로 없었던 동창생. 그와는 고향에서 있었던 그 모임에서 술 한잔 정도 마신 기억밖에 없었다. 그 모임은 나중에 다른 지역에서도 있었는데, 아마 그중 한 번은 서울이었던 것 같다. 그때 어쩌다 보니 그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지금은 기억나지 않지만 꽤 친해졌던 것 같다. 전화번호를 주고받고 가끔씩 연락도 하면서. 그때 그와는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했었는데, 당시 네이버 메일에서는 음악 메일이 가능했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배경으로 담아 메일을 보내면, 수신인이 메일을 열어볼 때 그 음악이 흘러나왔다. 아마도 네이버에서 이 서비스가 종료된 것은 저작권 문제가 걸려서인지도 모르겠다.  당시 발매되어 최고의 인기를 끌었던 음악은 지금도 명반으로 불리는 앨범인, 가수 나얼과 윤건이 듀오로 결성한 브라운 아이즈 1집(2001)이었다. 타이틀 곡인 '벌써 일 년'은 영화 같은 스토리를 담은 뮤직 비디오로 사랑받았고, 그 외 이 앨범의 모든 곡들은 하나같이 아름다운 곡들이었다. 그런 어느 날, 그가 내게 보낸 메일에는 브라운 아이즈의 'With Coffee'가 첨부되어 있었다. 너무 오래전의 일이라 지금 그 메일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보내온 노래 속에 그의 마음이 담겨 있었던 것이 아닐까.


'Cause you're my love forever
매일밤에 달콤한 낮은 속삭임
부드러운 커피 향보다 더욱 진하게
Don't be afraid Tonight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이 노래 가사의 '낮은 속삭임'을 내 별칭으로 정했다. 아직은 순수했던 그래서 그의 눈에 어쩌면 예뻐 보였는지도 모르는 내 모습이 아닐까 싶어서.


세 번째 기억 역시 동창 모임에서 만나 십여 년을 '속 깊은 이성 친구'로 지냈던 이에 대한 것이다. 그와 나는 아주 어렸던 때 같은 반이었었다. 그것도 동창 모임에서 역으로 추적하면서 알게 된 것이었고 이후로는 모임이 있을 때 한두 번 만났을 정도였는데, 어쩌다 보니 그 이후로 그와 같이 만날 일들이 많이 생겼다. 모임의 규모가 작아지고 얘기하기 편한 이들끼리 모이게 되면서 아마도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친구들과 함께 그의 집에서 밤을 새우다가 잊어버리고 나왔던 '어린 왕자' 영문판. 내가 다른 지역에 살았기에 그 책은 한참 후에 서울에서 받았다. 그 이후로도 그와는 '먼 곳에 사는 편한 이성친구'로 잘 지냈다. 가끔씩 안부 메시지를 보내기도 하고 소소한 직장 스트레스를 풀어놓기도 하면서 우리는 서로 익숙해져 갔다. 그리고 한동안 서로 연락이 없다가도, 가끔 전시회나 공연 관람으로 서울에 가게 되면, 나는 그에게 시간 나면 보자는 가벼운 메시지를 보내곤 했었다. 그러면 그는 열에 여덟 번은 나왔었다. 그리 긴 얘기를 하는 것도 새로운 얘깃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그래서 그와 둘이 만나 오래 얘기를 나누며 술잔을 기울인 적도 있었다. 함께 한 전시회, 오래된 궁 산책, 그리고 목적 없는 도보 수다까지 생각하면 그와 자주는 아니지만 꽤 편안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다. 고향이 같았기에 명절 저녁에 가끔 만나기도 했고, 밤하늘의 별자리를 보면서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던 시간도 재미있었고, 사진 찍는 취미에 음악이라면 대부분 좋아하는 성향도 비슷했고. 그와 어느 여름에 함께 갔었던 서해 바다도 생각난다. 물 빠진 바닷가를 거니는 것도, 고소공포증이 있는 그와 높은 다리를 건넜던 것도, 저녁 해변 산책도. 소나기 소리처럼 멀리서 우르르 우르르하며 들리는 소리가 물 들어오는 소리라며 나직이 속삭여 주던 그의 목소리도 기억난다. 여러 많은 기억들 중 매번 그를 떠올리게 하는 노래가 하나 있으니, 그것은 미국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Bruce Springsteen)의 'Streets of Philadelphia'. 가장 미국적인 목소리를 가졌다고 평가받는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이 곡은 도입부의 잔잔한 드럼 소리에 이어지는 편안한 그의 목소리가 매력적인 곡이다. 영화 <필라델피아(1993)>의 주제가인 이 곡은, 브루스 스프링스틴이 허름한 필라델피아 거리를 걸으면서 노래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어딘가 모를 쓸쓸함과 따뜻함이 함께 하는 노래이다. 극적인 카리스마가 표현되는 것도 아닌, 그저 얘기하듯 걸으며 담담히 노래하는 곡이라 해야 할까. 영화의 분위기와도 너무나 잘 어울리는 곡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거의 기억나지 않지만, 브루스 스프링스틴의 이 아름다운 곡은 오래도록 귓가를 울렸고, 그와 이 노래에 대해 얘기를 나눴으며 그 역시 이 노래에 대해 내가 놓친 부분을 얘기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서 이 노래는 전주의 드럼 소리만 들어도 그의 목소리가 나직이 내게 속삭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에 대한 추억을, 몇몇 친한 이들에게 얘기해 줄 때가 있었다. 그러면 사람들은 내게 '이 답답한 사람아'라고 말했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하냐고, 대체 그 사람의 마음을 알아채는데 얼마나 걸렸냐고.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고, 그저 먼 곳에서 친구가 오면 당연히 만나러 나오는 마음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다는 나의 말에 혀를 차고 고개를 내저으며 하는 말이, 아무리 친구라도 마음이 없으면 귀찮아서 어떻게든 피하고자 한다고. 아마도 내가 만나자 했었을 때가 주말이었을 텐데, 쉬고 있었던 주말까지 내던지고 나를 만나러 나왔던 그의 마음을 어떻게 그렇게 모를 수 있었냐고. 그렇게 속절없이 '답답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나였기에, 그를 천천히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래와 함께 사람을 기억한다는 것은 결국 그를 잊어버릴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연락이 끊어져 버렸고, 내가 지금처럼 내 삶에 만족하며 살아가듯이, 그들 역시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소중한 사람들로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그저 아주 가끔씩 이 노래들을 듣는 동안 내 기억 속의 그들을 생각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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