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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Apr 03. 2023

봄날의 술을 좋아하세요?

유서 제1쪽

“다음 달에는 진짜 술 끊어야지.”


그 ‘다음 달’이 2월이 되고 3월이 되고 오름차순 숫자가 끊이지를 않으니 그냥 하는 말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러나 오늘 새벽에는 간만에 진심으로 다짐했다. 적어도 봄이 가기 전까지는 술을 끊어야지. 오늘 새벽의 다짐에는 오늘 새벽의 일이 큰 영향을 미쳤다. 장어를 구워 먹으며 술을 마셨고 남은 술이 아쉬워 과자와 함께 2차를 달렸다. 머릿속에서 한 병만 더 꺼내자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지만 용케 억누르고 얌전히 술자리를 정리했다. 그래서 딱 기분 좋은 정도로만 알딸딸했다. 자제한 나를 조금 뿌듯해하며, 역시 적당한 술은 보약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며, 흥얼흥얼 침대를 뒹굴었다. 새벽 한 시까지는 분명 그랬다. 한 시를 넘긴 고요하고 어두운 시간, 어두운 침대에 푹 퍼져 있다가 불현듯 눈가가 새카매졌다. 새카매진 눈은 언제나 단 한 가지를 찾아 헤맨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그것을 찾아 헤맸다. 그런데 원래 자리에 있어야 할 그것이 그 자리에도, 다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눈가는 이제 축축해지기까지 했다. 축축한 눈가가 어이없었다. 그것이 없는 게 눈물이 맺힐 정도로 초조하고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나 초조하고 안타까운 손길로 그것을 찾아 헤매다가 결국 찾아내었다. 그리고 그것과 잠깐의 대치 상황을 벌였으나 허례허식이었을 뿐이다. 내가 그것을 찾는 날에는 무조건 그것이 나를 이기기 때문이다. 이번 새벽에도 다르지 않았고 패배한 나는 새벽 내내 따끔했다.


과음하지 않았는데, 적당히 마셔서 기분이 좋았는데 왜 그랬을까. 적당한 술도 내겐 위험한 걸까. 그렇다기엔 적당히 취하여 즐겁게 잠들었던 날이 더 많다. 이번 새벽에는 무엇이 내 눈가를 새카맣게 물들인 걸까. 의문에 찬 머리를 이고 지고 꾸역꾸역 버스 정류장에 도착했을 때 돌풍이 일었다. 돌풍에 벚꽃 잎이 나부꼈다. 의문이 풀렸다. 동시에 기시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작년 꼭 이맘때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2022년 4월 3일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는 익숙한 거짓말을 하고 집을 나선다. 조금만 걸으면 가로등 불빛이 유독 미약한 골목이 나온다. 구석에 엉거주춤 서서 주머니에 몰래 넣어온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꺼내 물고 불을 지핀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가 한숨으로 뱉어낸다. 오랜만이다. 갑자기 왜 담배 생각이 났을까 스스로에게 질문해 본다. 연거푸 뱉어내는 숨에 알코올이 가득한 탓인 건 이미 알고 있다. 질문을 바꿔본다. 왜 또 술을 이렇게 마시게 된 것일까. 그나저나 어깨에 걸친 패딩이 덥고 거추장스럽다. 그냥 후드집업을 걸치고 나왔어도 될 뻔했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깨닫는다. 봄이 왔구나. 질문의 답을 찾았다. 유독 자주 술에 취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어느새 다 타서 짧아진 담배 탓에 입술이 뜨거워져 온다.





봄을 싫어한 지는 오래되었다. 일단,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에 대해 처음으로 진지하게 계획을 세웠던 때가 열일곱 봄이었다. 봄은 낯섦을 몰고 온다. 새 학기, 새 환경은 항상 봄에 있다. 낯섦을 지나치게 두려워하는 나는 봄과도 심하게 낯을 가렸다. 낯섦은 곧 외로움으로 이어졌는데 그때는 그 감정의 정체가 외로움인지도 모른 채 끙끙 앓고만 있었다. 앓음이 심해지자 ‘4월 1일에 거짓말처럼 사라지자’라는 생각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쨌든 사라지지 못한 채 어느새 열아홉 번째 봄을 맞이하던 어느 날이었다. 오후 청소시간에 교실 창문을 활짝 열자 봄 냄새가 그득하니 들이찼다. 따뜻한 바람과 꽃가루, 아이들의 들뜬 움직임 후에 남는 샴푸 향기 같은 것들이 섞여서 만들어진 냄새였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부산스러운 학교 풍경을 지켜보았다. 긴 갈색 머리를 봄바람에 흩날리는 아이, 삼삼오오 운동장에 나가 벚꽃구경을 하는 아이들, 떨어진 벚꽃을 귀에 꽂은 아이. 봄 냄새가 갈수록 더  달큰해지는 것 같았다. 무언가에 취한다는 것이 이런 느낌인가 싶었다. 그렇게 곧 우울해졌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봄이 싫어졌다. 지금 생각해 보건대 아마 봄 특유의 가볍고 따뜻한 분위기가 본능적으로 싫었던 것 같다. 나와 너무 대비되기 때문에, 그리하여 나는 그 속으로 섞여 들어갈 수 없음을 새삼 체감했기 때문에.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다. 따스한 봄 공기를 들이마시면 숨이 막힌다. 몸이 나른하니 처진다. 침대에 가만히 누워 하루를 보내는 날이 잦아진다. 식욕은 떨어진다. 반면에 술을 마시고 싶은 욕구는 높아진다. 당신, 봄날의 나를 떠올려 보라. 생각해 보면 유독 자주 취해 있었고 유독 연락이 잘 되지 않다가 술 한 잔 하자는 연락만 잦았을 것이다. 장난이 아니면서 장난인 양 봄이 싫다고 말했을 것이다.


작년 오늘, 나는 취해서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책상 위에 틀어 놓은 인랜드 엠파이어는 라디오 역할을 하는 중이었다. 책상 밑 어두운 공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워 있다가 도로 나와 서머싯 몸의 책과 가위를 쥐곤 다시 책상 밑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리고 가위로 책을 갈기갈기 찢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 없이 마구 자르고 찢었다. 사놓고 한 번도 읽지 않은 새 책이라 종이가 빳빳해서 가위를 쥔 손에 악력이 많이 들어갔다. 손이 아팠지만 아랑곳 않고 계속 잘랐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멈추고 그저 가만히 누워 있었다. 그렇게 누워 있기를 몇 분, 다시 책상 앞 의자에 앉아 멍하니 인랜드 엠파이어를 보면서 한 손으로는 파우치 속을 헤집었다. 그날은 그것이 제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것을 찾는 날에는 무조건 그것이 나를 이긴다.

선생님은 술을 먹으면 우울증이 곱하기 2가 된다고 말씀하셨다. 몸으로 경험하여 잘 알고 있는 수식이다. 그리고 내게 해당되는 수식이 하나 더 있는 것도 안다. 그 술에 봄이 섞이면 우울증은 곱하기 4가 된다는 신기한 수식. 잘 아는데도 왜 마시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렇게 답한다. 현재를 밀어내고 싶으니까. 벚꽃 흩날리는 이 봄을 있는 힘껏 밀어내고 싶으니까. 술은 그것을 도와주는 도구다. 물론 파괴적인 방법으로. 그리고 오늘 새 수식을 배웠다. 봄 섞인 술은 한 잔이든 한 병이든 한 궤짝이든 내게 같은 결과값을 준다는 수식. 그러니까 봄에만 이라도 술을 입에 대지 말자, 다짐하지만 새해의 다짐이나 다를 거 없다는 걸 잘 안다. 그것이 나를 이기듯이 술이 나를 이긴다는 걸 알면서도 술을 찾을 것이다. 봄날의 술을 좋아하느냐고? 집착도 애정이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유서의 첫 장을 봄과 술로 채운 이유는 그것들이 나의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해 주는 것들 중 한 축에 속하기 때문이다. 맑고 밝고 희망적인 것에 대한 거부감, 그 거부감의 발현인 술, 그 술에 대한 애증. 햇살에의 거부감-혹은 이질감-, 파괴감, 애증. 앞으로 쓰일 유서의 구체적 내용은 나 역시 아직 모르지만 대부분의 글들의 주제는 이 셋으로 추려질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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