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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등대 Aug 27. 2023

인간은 프래자일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의 단상 공책 1

_약 설명서​


책상 위에 무심히 놓여 있는 약 설명서를 무심히 바라봤다. 타이레놀처럼 작은 종이곽으로 포장된 약의 내부에 들어 있는, 길게 여러 번 접힌 설명 종이. 종이의 끄트머리에 깨알 같은 글씨로 자세한 내용은 약 전자도서관을 참조하라고 적혀 있었다. 약을 주제로 하는 전자도서관이 따로 있다니. 세상에 약이 얼마나 많으면 그에 대한 도서관이, 사이트가 만들어지기까지 했을까.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세상에 약이 그토록 많다는 것은 곧 인간이 걸릴 수 있는 병과 증상이 그만큼 많다는 뜻일 것이다. 이리도 나약한 인간이라니. 프래자일, 깨지기 쉬움, 취급주의 테이프는 다른 어떤 대상도 아닌 인간에게 둘둘 감아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_안무 영상


어느 밤, 유튜브 알고리즘을 타고 가다가 BTS의 “달려라 방탄”이라는 곡의 안무 영상을 보게 되었다. 노래의 가사도 찾아 읽었다. 그리고 나의 감상은 - 대단하다. 저 정도는 해야 성공하고 인정받는구나. 작은 소속사에 소속된 지방 출신 젊은이들이 자행한 엄청난 노력과 인내와 열정의 소산이 그들의 현재 위치인 듯하다. 그들의 노력과 인내와 열정이 대단하고 또 대단하긴 한데, 분명히 그러한데, 한편으로 나는 너무 무서웠다.​


이 세상은 이제 저 정도로 이 악물고 버티며 노력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곳이 되어버렸구나. 그렇지 않으면 순식간에 도태되는 곳이 되어버렸구나. 버티기와 상처와 병이 어느새 당연한 것이 되어버린 이곳이 무서웠다. 타이레놀 포장지를 쌓아놓고 일하는 게 별 대수롭지도 않은 풍경이라는 대기업 사무실 모습이 겹쳐 보였다. ‘논현동의 비가 새던 작업실에서 깡소주를 까며 신세타령이나 하며 다짐했던 그 말, 성공하면 다들 뒤졌어 ‘라는 가사를 읽으면서, 새삼스레 ’성공‘, ’정상‘, ’존버‘ 같은 것들이, 그런 것들만이 칭송받는 이곳이 무서웠다. 내겐 일종의 광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마음이 복잡해 쉬이 잠들지 못했다. 그 영상을 다시 보기 힘들 것 같다.







_저스틴의 울먹임

영화 <멜랑콜리아>는 우울에 대한, 우울에 의한 영화다. 실제로 감독이 우울증에 걸렸을 때 만든 영화이기도 하고 영화의 내용도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는 저스틴의 이야기(1부), ‘멜랑콜리아’라는 행성이 지구와 충돌하여 지구가 종말 할 것이라는 소식에 불안에 떠는 저스틴의 언니 클레어의 이야기(2부)로 이루어져 있다. 이 영화를 많이 좋아해서 많이 되풀이해서 봤는데 얼마 전에야 이 영화에 대한 평들을 접했다. 많은 사람들이 저스틴의 우울과 고통은 지구의 종말보다도 더함을 강조하며 그러므로 저스틴에게 지구의 종말은 아무것도 아니었으리라고 말하고 있었다. 심지어 몇몇은 저스틴이 지구의 종말을 바라며 그것을 통해 해방되었다고까지 말했다.

물론 저스틴은 지구가 멸망할까 봐 불안에 떠는 클레어와 달리 매우 평온하다. 심지어는 지구의 생명체는 악하기만 하기 때문에 지구의 종말을 애석해하지 않아도 된다고까지 말한다. 멜랑콜리아 행성의 푸른빛 아래 매혹적인 표정으로 자신의 나체를 비추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를 여러 번 보면서 단 한 번도 저스틴이 지구의 종말을 바란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것은 영화의 말미에  나오는 저스틴의 울먹임 때문이다. 많은 이들이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은, 저스틴의 그 작은 울먹임.

저스틴은 종말을 두려워하는 어린 조카 레오를 안아주며 울먹였다. 종말의 순간에도, 클레어처럼 울부짖지는 않았지만 레오와 클레어의 손을 잡아주며 분명 눈물을 글썽였다. 그러니까 저스틴은 종말을 거부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종말을 찬양하는 사람도 아니다. 저스틴은, 종말을 거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게 된 자신의 모습을 슬퍼하는 사람이다. 그것이 저스틴이 울먹인 이유다. 저스틴은 오랜 세월 우울로 너덜너덜해진 끝에 이제는 지구의 종말 앞에서마저 울부짖지 않게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슬퍼하는 사람이다. 저스틴은 종말의 시간에 멜랑콜리아에 잠식된 자신을 새삼 발견한 것이다. 멜랑콜리아 행성에게 잡아 먹힌 지구처럼 우울에 잠식된 자신을. 나는 이 지점이 이 영화에서 가장 아픈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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