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시골행이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다. 이왕 온 김에 또 며칠 머물렀다 가련다. 언젠가 사촌형님과 대화 중에 찰밥을 방앗간에서 주문해 먹었다고 한 적이 있었다. 산행할 때마다 산악회에서 점심으로 나누어 주던 찰밥이 맛있었던 기억에 한말을 주문해 냉동실에 보관해 놓고 필요시 먹었었다. 반찬 필요 없이 김만 있으면 먹을 수 있다. 현미 가래떡이 그렇듯이 아주 간편식 비상음식이다. 특히 남편은 압력밥솥에 하는 것보다는 증기로 찐 고슬고슬한 찰밥을 좋아한다. 어려서 먹어 본 입맛 탓이리라.
바다나무 세컨드하우스가 있는 이곳은 남편의 고향이자 집성촌이다. 남편의 형제뿐만 아니라 아버님 형제까지 모두 아랫마을에 살고 계시다. 마을에 모든 행사들을 집안 어르신들이 관여해 우리는 이곳에서 외롭지 않게 생활하고 있다. 단지 동네와는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해 사생활에 큰 침해를 받지 않으며 필요시 자발적 고립도 가능하다. 무엇보다 내가 늦잠 자는 것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귀촌이나 귀농 후 시골생활은 가끔 원주민들과 적당한 조율이 필요할 때도 있는것 같았다.
늘 큰 형님이 많은 것을 챙겨주셨는데 연세가 많으시고 나도 퇴직한 터라 스스로 자급자족 하려고 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고. 그러나 가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리운 손맛이 있기도 하다. 무심결에 내가 한 말이 사촌형님은 마음이 걸려 찰밥을 해주고 싶으셨나 보다. 오랜 세월 며느리라는 이름으로 함께 살아온 덕에 사촌형님은 가끔씩 맛난 음식을 잘 챙겨주셨다. 시골 인심이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피의 흐름일지도 모른다. 아침일찍 사촌형님이 찰밥을 해놓을 테니 올 수 있냐고 전화를 하셨다. 맘먹고 생각해서 베풀어 주시는 호의라 우리는 염치불구하고 시골로 달려왔다.
어느새 세월이 많이 흘렀다. 낯설었던 시집살이도 살아오는 시간 속에 입맛을 함께 공유하는 사이가 되었다. 명절음식을, 제사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입맛의 평준화가 이루어졌다. 이제 내가 그 맛을 전수받아야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이대로 사서 먹을 것인가? 된장을 담그고, 찰밥 하는 것을 배워 남편의 입맛을 즐겁게 해 주어야 하나 순간 고민이 되기도 하였다. 올해부터 김장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긴 배우려면 인터넷이라는 훌륭한 모범답안이 있으니 못할 것도 없다. 물론 맛은 다소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맛있게 먹고 차츰 고민해 보련다.
사촌형님은 고슬고슬한 찰밥을 해서 한 끼분으로 소분하여 일일이 포장해 놓고 기다리셨다. 식기 전에 얼른 냉동실에 넣어야 맛있게 먹을 수 있다고 하시면서. 사과농사로 바쁘신 가운데 신경 쓰고 챙겨주심에 감사했다. 처음 시집와서 낯선 시골생활을 형님들의 보살핌으로 정 붙이고 빠르게 적응할 수 있었다. 늘 드린 것 없이 받기만 한 것 같은 송구함과 감사한 마음에 동서들끼리 나들이 길에 나섰다. 맛난 음식 먹고 분위기 있는 카페에서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우리 형님과는 자주 다녔지만 사촌 동서들끼리 의기투합하여 밖으로 나들이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시댁 흉보는 것도 은근히 재미있었다. 어쩌면 그건 흉이라기보다는 살아온 추억담일지도 모른다.
부엌에서 명절음식을 하던 그 옛날이 떠올랐다. 식구수가 많아 명절밥상을 서너 번 차려내고 나면 정작 부엌에서 새벽부터 일한 며느리들은 먹을 것이 없었다. 생선도, 고기도 모두 바닥이 나 있었다. 막내로 자란 나는 친정에서는 처음밥상에 아버지, 작은아버지와 함께 안방에서 밥을 먹었었다. 그런데 시집을 오니 부엌이라고 하는데서 반찬도 없이 대충 먹는 게 아닌가. 갑자기 서러움에 울컥해서 눈가가 붉어졌던 기억이 있다. 눈치 빠른 사촌형님이 얼핏 보신 모양이다. 그때는 그 상황이 왜 그리 서글펐는지 모르겠다. 지금 생각하니 참 철부지였다.
그다음 해부터 사촌형님은 따로 한몫 떼어 우리들의 밥상을 애초 만들어 놓으셨다. 음식이 모자라도 며느리들의 밥상을 고수했다. 맏며느리인 큰 형님은 안절부절하셨지만 사촌형님을 비롯한 아래동서들은 우리도 제대로 된 밥상을 한번 받아보겠다는 일념으로 못 들은 척했다. 이때부터 소리 없는 며느리들의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여권신장을 부르짖는 작은 움직임이었는지도 모른다. 지금 같으면 음식을 더 많이, 푸짐하게 하면 되는 세상이지만 당시는 아무리 많이 해도 음식이 모자랐다. 이 같은 부엌단합은 지금까지 며느리들만의 비밀로 유지되고 있었다.
우리는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시며 그 시절 비밀을 폭로하며 웃었다. 그때는 다 먹고 살기 어려웠었다고. 그렇지만 북적대던 그때가 좋았다고. 모두들 그 시절을 그리워했다. 돌아보니 형님들과 산딸기 따고, 고사리 꺾던 시골의 산천은 변함없는데 형님들은 저만큼 흐른 세월 속에 서 계셨다. 나 역시 지렁이만 나타나도 무섭다고 호들갑 떨던 풋내기 새댁이 희끗희끗한 머리로 돌아와 다시 그 길을 걷고 있다. 변한 것은 없는데 모든 건 변해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