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길을 잃었니?

뒤늦게 핀 꽃

by 바다나무

꽃밭을 한 바퀴 돌며 아침을 맞는다. 적어도 시골에 있는 동안은. 아침 햇살이 정원에 가득하다. 날망집이다 보니 햇살맞이도 빠르다. 정원에는 여름꽃이 한창이다. 수국도, 달리아도, 나리꽃도. 거기에 보라색 리아트리스와 스토케시아가 정원을 지키고 있다. 먼 아메리카에서 남의 나라 땅으로 여행 와 제나라인양 뿌리내리며 적응하고 있다. 선길을 이정표도 없이 잘도 찾아왔다.


모든 건 때가 있다고 생각했었다. 정해진 것에서 벗어나면 틀린 것인 줄 알았다. 정상이 아니라고 정했었다. 정원 한 귀퉁이에 4월 봄소식을 알려주는 목련나무에 꽃이 세 송이 피었다. 자주색이다. 뜨거운 한여름 8월에 이 무슨 괴이한 일인가? 지난 늦가을 개나리가 울타리에 간혹 핀 걸 보면서 제철 맞이를 못하고 핀 게 안쓰러웠던 적이 있었다. 헤매고 있는 듯이 보였으니까. 이 자목련도 길을 잃어버린 것인가? 7월 중순쯤 두 송이가 피었기에 이상기온으로 잘못 찾아온 줄 알았다. 그리고 때가 아님을 깨닫고 민망해하며 고개 숙이고 곧 떠날 줄 알았다. 그런데 사그라들기는커녕 한송이가 더해진 것이 아닌가?

날씨가 변덕을 부리더니 꽃들도 덩달아 이상현상을 나타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긴 철기둥을 타고가는 능소화도 매해 봉오리만 맺더니 4년 만에 활짝 웃는 게 아닌가? 목을 빼고 기다려도 제때가 되어야 피는데 자목련은 기다리지 않음에도 홀로 어 미소로 답하는 게 아닌가? 분명 길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상기온 때문이라고 확신했다. 내가 보기엔 정상이 아니었다. 내년에는 돌고 돌아 헤매다 때를 맞추어 잘 찾아올 것이라는 여지를 두 이왕 핀거 즐겁게 놀다 가라고 변의 풀도 뽑아 주었다.


문득 어린 시절 길을 잃어버린 생각이 났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네다섯 살 쯤으로 기억한다. 동네 언니오빠들과 집 앞 골목에서 놀다가 학교운동장에서 공놀이를 한다고 하여 따라갔다. 처음으로 가본 학교운동장은 너무나 넓었다. 여러 가지 운동기구들도 있었고 모래놀이터도 있었다. 언니오빠들은 나를 어리다고 끼워주지 않았다. 처음에는 공을 주워다 주는 심부름을 하다가 재미가 없어 혼자 모래놀이터에서 두꺼비 집을 짓고 놀았다. 아마 한참을 놀은 듯했다. 날이 어둑해 주변을 보니 언니오빠들은 없고 운동장 구석에 나만 홀로 남아 있었다.


덜컥 겁이 났다. 무섭기도 하고 배도 고프고. 이리저리 언니오빠들을 찾아다녔다. 수돗가 주변도, 조회대 주변도, 심지어 화장실까지 무서움을 참아가며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때부터는 엄마를 부르며 울기 시작했다. 집에 가려고 교문을 찾았지만 언니오빠들을 따라 들어왔던 학교문은 어둠에 보이지 않았다. 모래놀이하던 꼬질꼬질한 손으로 눈물을 닦아가며 넓디넓은 운동장을 기웃거렸다. 저 멀리 교문이 보였다. 그 문만 나가면 집을 찾을 줄 알았다. 우리 집은 바로 학교 앞에 있었으니까.


문을 빠져나왔는데 전혀 낯선 동네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우리 집은 없었다. 어둠은 점점 나에게로 다가왔다. 배고픔은 어디로 가고 무서움만 남아 있었다. 길거리를 울면서 한참 헤매고 있는 나를 동네아주머니 한분이 어디론가 데려다주셨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곳은 동사무소였던 것 같다. 기억에 경찰복장을 한 아저씨가 아니었던걸 보면. 그때는 동사무소에서도 집을 찾아주었던 것 같다. 방송 장비가 있었으니까. 아저씨는 내게 집은 어디냐부터 엄마, 아빠는 뭐 하시냐, 왜 길을 잃었느냐 등 이것저것 꼬치꼬치 물으셨다. 잠시 후 아저씨는 마이크에 대고 방송을 하셨다. " 아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아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양갈래 머리를 하고 자주색 리본으로 묶었습니다! 노란색 원피스를 입었습니다! 등등..." 순식간에 내 정보는 확성기를 타고 멀리멀리 유출되었다.


울고 있는 내게 아저씨는 엄마 찾아줄 테니 걱정 말라며 알사탕을 하나 입에 넣어주시며 달래 주셨다. 달콤함에 난 눈물을 멈추고 맛나게 먹었다. 잠시 후 땀범벅이 된 엄마가 혼비백산하여 동사무소로 들어오셨다. 엄마를 보고 난 반가움과 서러움에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엄마는 "이제 괜찮다"며 나를 꼭 안아주시며 얼룩진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주셨다. 업히라며 등도 내어 주셨다. 저녁때가 되어도 집에 들어오지 않아 엄마는 걱정이 되어 온 동네를 수소문하여 학교운동장으로 나를 찾아 나선 것이다. 그러다 방송을 들으셨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나는 학교 정문으로 들어가 헤매다 후문으로 나와 길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학교운동장이 그렇게 넓은지는 그때 알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학교에 가보니 그리 크지도 않던데...


왜 8월에 핀 자목련을 보며 뚱딴지 같이 어린 시절 길 잃어버린 악몽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아마 안쓰러운 탓일 게다. 인터넷을 찾아보았다. 꽃말을 알아보려고. 대체 자목련의 꽃말이 뭐길래 이렇게 시도때도 모르고 지조 없이 피는지. 물론 백목련의 꽃말은 "고귀함"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적어도 명색이 숲해설가 자격증 소지자 아닌가. 자료를 검색하다 뜻밖의 사실을 발견했다. 지금 핀 꽃은 "자목련"이 아니고 "앤목련"이라는 것을.


"앤목련"은 자목련과 별목련의 교잡종으로 7월 초에 개화하는 여름목련이다. 가끔 여름에 두 번씩 피기도 한다. 자목련과 앤목련의 구별은 자목련은 꽃잎의 겉과 속이 자줏빛인 반면 앤목련은 겉은 자주색, 속은 연분홍이나 흰색이라고 한다. 또한 자목련은 꽃이 먼저 피고 잎이 나중에 나오며, 앤목련은 그 반대이다. 그러고 보니 바다나무 정원에 핀 꽃은 앤목련이었다. 괜히 호들갑을 떨었다. 고유이름을 갖고 제때에 핀 것을 가지고.


다시 꽃을 바라보았다. 자목련보다 붉은빛이 더하다. 희미한 기억 속의 그때의 리본색이다. 이름을 잘못 불러서 미안하다고 했다. 여름하늘빛이 예쁘다. 딸을 잃어버리고 애간장을 녹였을 엄마에게도 오늘은 죄송하다고 고백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