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은 답을 알고 있다.

나의 놀이터

by 바다나무

농장에 오면 해가 중천에 떠야 일어난다.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길 망정이지 시골사람들이 보면 게으르다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하긴 동네 중간에 사시는 퇴직 후 귀촌하신 사촌형님은 아침 일찍 일어나 현관문부터 열어 놓으신다고 한다. 커튼을 젖혀놓고 현관문을 열어 놓아야 동네사람들 눈치가 안 보인다고 한다. 그러고 보면 귀촌이나 귀농이 그리 쉬운 일만은 아닌 듯하다.


낮잠도 잘 인자는 나인데 바다나무 농장에 오면 이상하게 잠이 잘 온다. 일주일에 이삼일 머물다가니 마치 콘도에 여행온 듯하다. 작은 공간에는 내가 팔을 뻗으면 필요한 물건들이 손에 잡힌다. 소한의 것들이지만 불편함이 없다. 이곳에 오면 각자가 좋아하는 일을 한다. 론 같이 풀을 뽑거나 꽃을 심기도 하지만 일에 서툰 나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한다.


올 때마다 일을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있다면 아마도 오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시댁동네이다 보니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면 오기 싫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직장생활에 구속되어 살았는데 퇴직 후 또 무엇인가에 의해 제약을 받는다면 나는 강한 거부감을 나타냈으리라. 이곳엔 꽃밭 말고 내가 좋아하는 나의 놀이터가 있다.래서 곳에 오면 마음이 편하고 즐겁다.


농원옆에는 조그마한 구릉이 하나 있다. 그곳에는 고사리가 있다. 난 이곳에 오면 시골장터에서 산 꽃장화를 신고 그 언덕배기에 가서 고사리를 꺾는다. 한 계절이지만 그것이 너무 재미있다. 멀리 산꼭대기를 가는 것도 아니고, 힘이 들만큼 많이 꺾는 것도 아니라 내가 즐기기에 딱 안성맞춤이다. 일주일에 한 번 갈 때마다 내가 두 손아귀에 꺾어서 들고 올 만큼의 양만 피어 있다. 많으면 일이라 생각하고 미리 포기할지도 모르는 내 성격을 고사리도 잘 아는.


고사리 꺾는 것은 재미도 있지만 운동도 된다. 은 비탈길을 위로 아래로를 반복해서 오르내리게 만든다. 이상하게 꺾고 돌아서서 내려오면 다시 보이는 게 고사리다. 풀사이에 고개를 말아 쥐고 수줍은 듯 숙이고 있어 얼굴을 쉽게 보여주려 하지 않는다. 그나마 목을 쭉 빼고 있는 놈은 눈에 잘 띄기라도 하는데 키 작고 오동통한 녀석들은 나 잡아봐라 하듯 풀숲에 숨어 나와 숨바꼭질 하려 한다. 오늘도 그만큼의 양이다. 내가 쥐고 갈 수 있을 만큼.


꺾어온 고사리를 끓는 물에 살짝 데쳐 채반에 널어두고 집으로 돌아가면 일주일 동안 바싹 말라 묵나물이 되어 있다. 자서 햇살과 바람을 맞이해 딱 한 끼 반찬으로 활용할 만큼의 양으로 내게 화답한다. 내손으로 꺾은 고사리 요리는 맛도 맛이지만 내가 스스로 채취를 해서 요리를 했다는 성취감에 그 맛이 더해진다. 게 노동의 신성함을 알려준다.


이렇게 고사리 놀이터는 내게 육체적인 노동력과 그에 상응하는 물질적 보상으로 식탁을 풍성하게 해 준다. 고사리 요리는 역시 조기조림이나 나물볶음이 제맛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찌 물질적으로 풍요롭다고 행복하다고 할 수 있겠는가. 농원에서 조금만 신길을 올라가면 예쁜 나무들로 아늑하게 자리 잡은 저수지가 있다. 게 정신적인 보상을 해주는 또 다른 놀이터이다.


이곳에 의자를 두 개 가져다 놓았다. 구든 쉬어가라고. 사촌형님이 어느 날 산책하다가 그곳에 의자가 있어 쉬었다 왔다고 하시는 걸 보면 동네사람들도 이용하는 것 같다. 우리는 풀을 뽑다가 흙 묻은 옷을 입고 이곳에 와서 가끔씩 커피를 마시며 쉬었다 온다. 카페를 갈 때도 있지만 그곳은 씻고 옷을 갈아입어야 한다는 전제조건을 제시여 다소 불편하지만 이곳은 아무 조건 없이 자리를 내어준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자리에서 우리는 멍 때리기 놀이를 즐기다 온다.


저수지 위의 반짝이는 윤슬이나 바람에 일렁이는 잔물결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세월을 낚는 풍류객처럼 정신줄을 놓고 커피맛도 잊은 채 무념무상의 시간을 갖는다. 저 고요해질 뿐이다. 시끄러웠던 마음도, 북적거렸던 머릿속도 잔잔함 앞에서 숙연해진다. 렀던 땀방울도 앗아간다.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는 내게 가끔씩 숲 속의 새소리만이 취임새를 넣는다.


이제는 채우기보다는 하나씩 비워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엇을, 어떻게, 어느 만큼 비우고 떠나보내야 하는지의 답은 자연이라는 놀이터가게 가르쳐 줄 것이다. 무심히 흐르는 물이, 꺾여도 다시 피어나는 쥐어질 만큼의 고사리가.


저수지에서 내려오다 보니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초록의 묘소가 보인다. 먼저 간 아내옆에 자신의 자리를 만들어 놓고 매일 한 번씩 불편한 몸을 이끌고 와서 산소를 돌보시는 동네어르신의 모습에서 오늘은 (고) 김광석 가수의 사랑의 랩소디가 들려오는 듯하다. " 어느 60대 노부부의 이야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