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과의 향연

영혼의 자유로움

by 바다나무

산날망 집에는 가을이 일찍 찾아온다. 8월 중순이 지나면 한여름의 불볕더위도 사그라들고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다. 퇴직을 몇 년 앞두고, 덕유산 자락 언덕배기에 자그마한 땅을 매입했다. 퇴임 후 소일거리와 보람 있는 생활을 하기 위한 준비 중 하나였다. 근무지에서 주말마다 몇 시간을 달려 들락거리며, 사시사철 꽃이 피고 질 수 있도록 수십 종의 다년생 꽃과 나무를 심고 열심히 가꾸었다.


날망 중턱에 농막을 지었다. 농막 한쪽에 이어서 만든 헛간에는 농기구며 잡동사니를 넣어두고, 농막 안 작은 공간에는 언제든 쉴 수 있는 소파와 조그만 탁자도 가져다 놓았다. 탁자는 때로는 식탁으로, 어느 때는 책상으로 쓰다가 새소리 풀벌레 소리를 들으며 차를 마실 때에는 찻상이 되기도 했다. 작고 조금은 불편하지만, 이곳은 나와 남편의 쉼터이며, 우리가족의 놀이터였다.


코로나가 한창 극성을 부릴 때 집에서 함께 생활하던 작은딸이 코로나에 감염되어, 우리 부부는 어쩔 수 없이 농막에서 격리 생활을 하게 되었다. 격리가 시작된 다음 날, 남편은 장거리 출근이라 이른 아침 집을 나섰고, 잠을 깬 나는 기지개를 켜며 문밖으로 나왔다. 자그마한 꽃밭에 심어 놓은 수십 종의 꽃과 나무가 아침햇살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해가 갈수록 꽃들은 점점 세련되고 예뻐지는 것 같다. 나무 역시 의젓한 모습으로 정원을 지킨다. 이제 열흘간은 이 꽃들과 동고동락하며 모처럼 여유로운 생활을 즐길 수 있을 것 같아 나도 모르게 마음이 설렌다.


정원의 가장자리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야트막한 돌담을 쌓고, 중간에는 아담한 아치를 세워 덩굴장미를 올렸다. 산책로도 자갈돌을 깔고 곡선으로 연결하였다. 남편과 오순도순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여 정성을 들여 만든 꽃밭이 제법 그럴 듯해졌다. 농막 앞에 파놓는 조그만 웅덩이에는 천판연이 아침이슬에 뽀얀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꽃잎이 너무 많아 힘에 겨운지 목을 가누지 못한다. 안타까운 마음에 보드라운 꽃잎을 입으로 솔솔 불어 펴 주었다. 이내 꽃은 환하게 웃으며 미소로 답하는 것만 같았다. 코끝을 스치는 천판연의 향기가 여느 연꽃보다 더 달고 진하게 다가왔다.


부서진 철제 의자를 손질하여 지지대 삼아 키운 새깃유홍초는 가녀린 잎으로 스스로 일어서지는 못하고, 열심히 소용돌이치며 뻗어나가는 생명력이 대견하다. 옆에서 활짝 웃고 있는 백일홍과 과꽃이 무리를 이뤄 화려한 꽃 궁전 같다. 건너편에는 여름꽃이 질 무렵 갈무리를 하는 큰꿩의비름이 밤하늘에 펼쳐지는 폭죽같이 아름답게 퍼져있다. 작은 알맹이들이 다닥다닥 붙은 꽃 뭉치가 가지런히 색깔이 바뀌면서 황홀감을 느끼게 해 준다. 번식력이 강하고 꽃 뭉치가 커서 분주(分株)하여 이웃과 정을 나누는 꽃이기도 하다.


정원의 길목에 심어 놓은 갈사초도 긴 머리를 한껏 풀어 제치며 멋스러움을 자랑한다. 갈색인 탓에 풀을 뽑으면서 죽은 줄 알고 몇 번이나 꽃밭에서 쫓아냈다. 자세히 보니 제법 운치 있고 고풍스러워 보였다.

쩌면 그 덕에 가을로 가는 길목이 제법 풍성하고 정감있게 느껴지는지도 모른다.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듯 개나리로 둘러싸인 울타리 안에는 다양한 종류의 꽃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잘난 척 뽐을 내면서 서로 엉키어 있다. 그러다 주말이 되면 멀리서 달려와 준 주인장의 손길에 가지런하고 다소곳해지면서 정갈함으로 품위를 지켜낸다. 떠날 때는 그동안 심고 가꾼 노고에 보답이라도 하듯 화사한 웃음과 함께 손을 흔들어 다음 주말을 기약한다.


기다리던 주말, 소홀했던 꽃들과 눈 맞춤하는 동안 지피식물로 심어 놓은 애기누운주름과 겹물망초가 발밑에 눌려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는 듯하여 얼른 까치발을 들었다. 어느새 햇살은 처마까지 비스듬히 퍼져있고 잠자리 떼는 하늘을 돌고 있다. 여유로움에 따뜻한 차 한 잔이 생각났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제대로 피지도 못하고 사그라드는 능소화에 눈길이 멈추었다. 농막의 외관을 덩굴식물로 가려보려고 심어 놓았는데 잎만 무성한 채 꽃은 몇 송이 피우지 못하고 조용히 움츠리고 있는 모습이 애잔했다. 문득 능소화의 슬픈 전설이 생각났다.


구중궁궐의 궁녀 소화가 임금님의 성은을 입어 빈이 되었지만, 그 이후로 한 번도 찾아오지 않는 임금을 기다리다가 상사병으로 죽었다. 얼마 뒤 소화가 죽은 곳에서 꽃이 피었는데 그 꽃을 능소화라고 한다. ‘명예라는 꽃말과 주황색의 화려함 뒤에 숨어 있는 슬픈 전설이 오늘따라 처연하기 그지없다.


오랜 기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처음으로 오롯한 혼자만의 여유로움을 가져보는 시간이다. 긴 호흡을 하면서 심연의 기억들을 떠올려 본다. 누가 쫓아오지 않아도 달려갔던 삶들, 보이지 않는 명예에 속절없이 묶여 있던 시간들, 지나고 나니 남세스러운 허망에 불과했다. 이제 모든 것을 날려 보내고 나 자신을 찾아 저 꽃들과의 향연에 동참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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