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나무 이야기

닉네임으로 만드는 삶!

by 바다나무

나의 닉네임은 “바다나무”이다. 컴퓨터가 일상으로 들어왔던 80년대, 컴맹을 탈출하는 첫 단추가 메일을 만들고 닉네임을 정하는 것이었다. 당시 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았던 미지의 세계인 컴퓨터 속에서의 주소와 이름이 수십 년이 지난 오늘까지 내 옆에서 나를 변함없이 지키고 있다. 주소는 가끔씩 D(Daum)에서 N(Naver)으로, 또는 상황에 따라 주어지는 주소로 바뀌지만 이름만큼은 특별한 변수가 없는 한 그대로 유지되었다. 나를 대변하는 제2의 고유명사가 되었다.


이제는 100세 시대라고 하니 좀 더 정신에 총총한 여유가 있다면 메타버스에 올라탈 아바타도 멋지게 꾸며 세상 밖의 또 다른 세상에 선보여 한 번쯤 가면무도회를 열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필요하다면 아바타는 성형의사나 코디네이터에게 부탁해 대여해 쓰는 것도 괜찮을 듯 하지만 퇴직을 하고 나니 정신이 소모되는 일은 그다지 하고 싶지 않다. 일단은 젊은이들의 전유물로 남겨두련다.


당시 갓 결혼하여 꿈 넘어 꿈을 꾸면서 이상에 부풀어 "바다 같은 아내"와 "나무 같은 남편"이 조화를 이루고 사는 멋진 무릉도원을 그렸다. 잔물결 이는 잔잔한 바다처럼 그저 모든 것을 포용할 것만 같은 넉넉함으로 남편을 포근히 감싸 안아주고 싶었다. 그리고 남편도 단단한 근육질과 튼튼한 뿌리를 가진 아름드리나무로 모진 비바람과 뜨거운 태양으로부터 나를 보호해 주길 바랐다. 이것이 “바다나무”라는 닉네임에 대한 내가 만든 설화(屑話)이다.

몇 년 전, 혹시 퇴직 후 생활경제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 다가구 주택을 매입하였다. 새롭게 신축한 건물이라 이름을 지어야만 했다. 남편은 손수 캘리그래피로 탁본을 떠서 바다나무라는 간판을 만들어 우리 집임을 자랑했다. 아파트와는 달리 건물주인이 되었다는 자부심으로 이곳에 입주하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바다와 나무가 되어 조화를 이루면서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건물을 관리하는 게 버거워지고 자질구레하게 신경 쓰이는 게 많아 처분하였다. 그리고 벽에 부착했던 패찰을 떼어 우리는 세컨드하우스인 농막에 가져다 걸었다.


건물에 방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도, 산길을 오르기 위해 예쁜 꽃밭이 있는 시골의 세컨드하우스를 지나가는 사람들도 간판을 보면서 이름이 예쁘다며 무슨 뜻인지를 묻곤 하였다. 나는 "바다 같은 아내, 나무 같은 남편이 사는 집"이라고 소개하며 빙그레 웃었다. 그들은 빈말인지 모르지만 주인과 이름과 꽃밭이 잘 어울린다고 하였다. 돌아보니 세월이라는 이름 속에서 바다나무는 이름값 하느라고 무던히도 애쓰면서 서로가 닮아진 것 같다.

살면서 바다와 나무가 잘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나무는 산에만 살고 바다에는 살지 않기에 아무리 맞추려고 해도 바다와 나무는 늘 평행선을 달린다고 생각하였다. 바다는 너울성 파도로 때로는 성냄을 삼키기도 했고, 나무는 폭풍우에 가지가 휘청 흔들려 버티려고 안간힘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거센 물결도, 거친 바람도 바다나무의 뿌리를 흔들 순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해외여행을 하면서 바다에 있는 나무를 본 적이 있었다. 바다 위에서 홀로 땅을 만들어 버티고 있는 나무도 있었고, 무리 지어 숲으로 만들어진 곳도 있었다. 맹그로브였다. 맹그로브는 삼투압을 견뎌내는 염생식물로 바다에서 자라는 신비의 나무이다. 물고기에게 영양분을 공급하고, 탄소를 저장하고 산소를 만드는 능력이 뛰어나다. 끊임없이 수액을 배출하여 바닷물을 깨끗이 만들어 줌으로써 해양생태계에서는 중요한 역할을 하는 나무다.


시간이 지나고 철이 들고나니 바다는 나무에게서 받기만 한 것 같다. 나무는 늘 바다 안에 머물며 멀리 가지 않고 든든함으로 지켜냈다. 해풍에 거칠어지고 휘어지기도 했지만 더없이 견고해지고 단단해졌다. 어느 순간나무에게서 측은지심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잠시 후면 무거운 어깨의 짐을 내려놓을 때가 되었다. 이제는 바다처럼 넓은 요를 깔아 나무를 쉬게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너무 오래 서 있게 했나 보다. 잔잔한 햇살 머문 마다가 되어주리라.


우리 집에는 고양이도 한 마리 있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눈을 가진 스코티시폴드 종이다. 아는 지인이 딸이 털에 대한 알레르기 반응이 심한 줄 모르고 입양했다가 도저히 키울 수 없다고 하여 새로운 주인을 찾다가 우리 집에 오게 되었다. 한때 키우던 강아지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던 기억이 오래도록 남아 동물을 키우는 것이 선뜻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갱년기 증상을 심하게 겪고 있던 나는 집안의 분위기를 바꾸어 보는 것도 좋을 듯싶어 반려동물을 키우게 되었다. 우리는 고양이 이름을 “바다”라고 지었다. 그리고 “바다”의 집사는 입양제의를 한 남편이 되었다.


5도 2촌 생활을 하며 주말에는 시골의 세컨드하우스인 농막에서 지낸다. 어느 날부터 작고 조그만 고양이가 주말이 되면 매번 정원에 나타났다. 아니 어쩌면 평일에도 찾아왔는데 우리가 그곳에 머물지 않아 못 본 건지도 모른다. 안쓰러운 마음에 우리는 집에 있는 “바다”고양이 사료를 나누어 주면서 “나무”라는 이름을 붙여주고 우리 집 식구로 등록했다. 시골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나무부터 찾았다. 어디선가 인기척 소리에 살그머니 나타나 주위를 맴돈다. 정원손질에 바쁜 남편 덕에 “나무” 의 집사는 내가 되었다.


오늘도 우리 집에 는함께 세월 부대끼며 살아온 아직은 젊은 황혼의 바다·나무와도시와 시골에서 같은 밥을 먹고사는 반려동물 바다·나무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함께 살아가고 있다. 모두 다리를 건너기 전까지 우리는 사랑해야 할 가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