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여유로우니 몸도 느긋하다. 언제 일어났는지 남편은 숙소 주변을 벌써 한 바퀴 산책하고 왔나 보다. 현관문 여는 소리에 잠이 깼다. 집을 떠난 한 달 살기는 그야말로 쉼이다. 집에서는 쉰다고 쉬어도 할 일들이 보였다. 식탁밑의 먼지가 소파의 나를 일으켰고, 얼룩진 빨랫감이 나를 세탁실로 안내했다. 어제 산책길에 무심코 본 팻말의 글귀가 생각난다. "무에 그리 바쁜가? 잠시 쉬어 가게나!"...
한림항 도선대합실로 갔다. 오늘은 비양도에 갈 계획이다. 간단한 인적사항을 기재하는 승선신고서를 작성하고 12시에 들어가는 배를 예약했다. 왕복권이라 2시 30분에 나오는 것으로 했다. 아름다운 어촌으로 선정된 비양도는 고즈넉한 시골풍경이 고스란히 살아있는 작고 예쁜 섬마을이다. 특히 이곳은 분화구에서 집단적으로 자생하여 군락지를 이루고 있는 비양나무가 서식하고 있는 곳이라 한다.
한림항에서 배로 15분 정도 소요되고, 섬을 도는 데는 걸어서 50분 정도 걸린다고 한다. 뱃고동소리와 함께 푸른 바다에 물살을 헤치고 배위로는 갈매기가 날고 있었다. 한유 하기 그지없다. 어제까지 바람이 불고 춥던 날씨가 오늘은 완연한 봄날씨로 다소 더운기가 있다. 모두들 겉옷을 벗어 허리에 질끈 동여매고 있다.
우리는 비양도에 도착해서 바다가 보이는 예쁜 카페로 우선 들어갔다. 차 한잔의 여유와 함께 음료를 마신 고객에게 무료로 자전거를 대여해 주기 때문이었다. 2층은 바다뷰가 한눈에 들어오는 "쉼 그대 머물다"라는 이름 그대로 누구나 쉴 수 있는 편한 카페다.
아직까지 1일 1 카페 투어는 만족하다. 언제부터인지 카페문화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우리 주변에 가까이 머물고 있음을 느낀다. 회식을 하고도 요즘은 노래방이나 호프집보다는 카페를 선호한다. 참으로 긍정적인 문화변화라는 생각이 든다.
자전거를 타고 섬을 돌았다. 도보보다는 20~30분 정도 덜 걸린다고 한다. 가다가 할망당, 코끼리 바위, 호니토, 펄랑못 등 중간중간 볼거리에서 사진을 찍기도 했다. 자전거에 익숙하지 않은 탓에 남편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나의 동정을 살폈다.
언젠가 딸들과 일본의 오키나와 여행을 하면서 함께 자전거 타기를 한 적이 있다. 앞에 남편이 가고 그 뒤에 작은딸, 나, 마지막에 큰딸이 따라왔다. 4명의 가족이 나란히 자전거를 타고 하는 여행도 나름 좋은 추억이 되었다. 혹여나로 인해 무언가 함께 할 때에 제약을 받는다면 미안해질 것 같아 흉내내기 정도라도 동참하려고 노력한다. 스키도, 자전거도, 골프도... 그러다 보니 전문가적인 재능은 하나도 없다. 늘 끄트머리에서 낙제만 면하고 있다.
한 시간 정도 섬을 돌고 자전거를 반납하고 비양봉 산꼭대기에 있는 등대를 향해 등산을 했다. 갑자기 바뀐 제주 날씨가 변덕스럽기 그지없다. 이제 온전히 이대로 봄이 자리를 차지하고 눌러앉으려나 보다. 정상으로 가는 가파른 산길의 대나무숲길이 인상적이며 신비롭기까지 하다. 비양도는 누구에게나 가고픔을 느끼게 해주는 아름다운 섬이라고 한다.
오늘도 어김없이 배꼽시계가 태엽을 푸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세시가 다 되어간다. 남편이 먹고 싶은 게 뭐냐며 몇 개의 메뉴를 제시한다. 오늘도 머릿속 맛집 프로그램을 펼쳐 보인다. 나이 탓인지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인 탓인지 조식뷔페를 먹는 날은 뭔가 진득한 토종음식이 생각난다. 오늘 저녁 메뉴는 만둣국이 당첨이다.
깔끔한 식당에 제주도 한우로 국물을 우려내어 만든 만둣국 맛집이다. 떡 만둣국을 시켰다. 메뉴판에 있는 만두전골은 당분간 안 먹기로 했다. 만두전골의 사연은 언젠가 브런치에 한번 올려볼까 한다. 어찌 되었든 식당도, 음식맛도 깔끔하다. 단지 특별한 식당 이름에 왜 남편만 "선생"이라고 했지? 하면서 괜한 트집을 잡아본다. 이건 순전히 나만의 쓸데없는 억지다. ㅎㅎ
※ 혹시 모를 여행자를 위해 다녀온 장소를 기록해 본다.(한림항. 비양도. "쉼 그대 머물다 " 카페. "면 뽑는 선생 만두 빚는 아내" 식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