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여행처럼 살고 싶다.
제주 살기 10.
제주바다에 밀물과 썰물이 드나들듯 나의 제주 살기에도 가족들이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스쳐갔다. 하나라도 더 보여주고 싶었던 일정이 다소 버거웠는지 잠시 빈증후군이 온 것 같이 허전하다. 남편도 장시간 운전과 스케줄 소화로 피곤한지 움직임이 더디다. 오늘은 서서히 움직여야겠다.
기대했던 새별오름의 제주들불축제가 건조한 날씨 탓에 갑자기 취소되었다. 가축방목을 위해 해묵은 풀을 없애고 해충을 구제하기 위해 새별오름에 불을 놓아 제주의 목축문화를 재현하는 커다란 문화축제였는데 다소 아쉽긴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안전이 최고이니 예민할 필요가 있다. 다른 행사는 그대로 추진되고 있으나 축제의 하이라이트가 빠져 관광객이 많이 줄었다. 우리도 들불축제에 가기로 했던 일정을 바꾸어 느지막이 숙소를 나와 주변 산책길에 올랐다.
돈내코탐방로 쪽으로 갔다. 자그마한 두 개의 물줄기가 사이좋게 내려오는 원앙폭포가 있는 곳이다. 관광객이 없어도 폭포는 외롭지 않을 듯 싶었다. 폭포는 내려와 비취색의 짙푸른 커다란 소(沼)를 만들어 놓았다. 기나긴 세월의 결과물로 깊이를 더해가고 있는 물웅덩이가 이제는 물줄기 두 개를 감싸 안은 듯했다. 하나가 된 소(沼)와 폭포가 깊은 골짜기의 울창한 숲과 어우러져 서로를 지켜내며 함께하고 있다. 마치 집처럼 아늑하고 평온하다.
돌아 나와 트레킹 코스 솔오름으로 향했다. 길게 뻗은 편백나무가 일품이다. 한 시간 정도 걷다 보니 에너지를 발산한 몸에게 고마움을 표해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은 중국음식을 맛보기로 했다. 예쁜 석곡들로 장식한 식당에서 짜장과 짬뽕, 탕수육을 시켜 수고한 몸에게 보상했다. 나도 한때 석곡을 키웠던 적이 있었다. 식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관심과 사랑을 주어야 하는데 게으른 탓에 방치했더니 모두 시들어 버리고 지금은 몇 점 남지 않았다. 갑자기 식당 앞의 석곡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든다.
배도 부르고 날씨도 더워 땀이 흐른 터라 잠시 숙소에 들러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갔다. 정원이 아름다운 카페에서 꽃향기를 맡으며 커피를 마실 생각이다. 이 카페는 정원에 관심이 많은 남편이 언젠가부터 찜해놓고 가보고 싶어 하던 카페였다. 넓은 통창으로 정원이 잘 보이도록 내부구조가 다소 특이하게 꾸며진 카페이다.
넓은 꽃밭이 너무 예뻤다. 갖가지 꽃과 나무가 " 하울의 움직이는 성" 인양 나를 동화의 나라로 끌고 들어갔다. 마치 우리 집 꽃밭인양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황홀감에 취해본다. 다양한 종류의 꽃과 나무는 남편의 핸드폰에 볼모로 잡혀 기후를 타지 않는 식물들은 언젠가 우리 집 정원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잠시 꽃의 왕국에서 공주가 되어 여기저기 설치되어 있는 포토존에서 우아한 자태로 뽐을 내어본다.
돌아오는 길에 쇠소깍에 들렀다.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투명한 물빛과, 노를 저어 카약과 조각배를 타는 관광객들의 모습은 무릉도원에서 신선놀음을 하는 것 같았다. 아름답다 못해 몽환적이기까지 하다. 몇 년 전 나는 이곳 쇠소깍에서부터 외돌개까지 올레길을 걸었다. 이 코스는 깊은 늪지와 멋진 계곡으로 이루어진 가장 아름다운 올레길 코스로도 유명하다. 보고 또 봐도 아름다운 곳이다.
어딜 봐도 아름다운 제주는 관광천국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벌써 제주 살기의 반이 지나간다. 이대로라면 그냥 머물러 살고 싶다. 일상을 여행처럼 이곳에서 살고 싶다. 그러나 때가 되면 돌아가야 하리라. 여유가 생기니 보이지 않는 것들도 보인다.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느껴진다. 갑자기 고은 시인의 단 석줄밖에 안 되는 담백한 시가 떠오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 혹시 모를 여행자를 위해 다녀온 장소를 기록해 본다.(원앙폭포. 솔오름. 아서원. VEKE 카페. 쇠소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