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우리는 현지인이 되었다.

제주 살기 9.

by 바다나무

여행의 즐거움은 시간을 초월한다. 3일의 시간이 번개처럼 지나간 것 같다. 숙소의 조식뷔페가 다소 어린이 위주로 마련된 것 같아 오늘은 해장국을 먹기로 했다. 나이 드신 분들에겐 그래도 아침 한 끼는 따뜻한 국물 있는 게 좋을 듯 싶었다. 더군다나 어제 해단의식을 거하게 치른 터라 해장국으로 뭉친 뱃속을 풀어주면 운한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


대를 이어 유지되는 해장국집을 찾아갔더니 휴무란다. 보통은 월요일 휴무가 많은 줄 알았는데 이곳은 그지도 않은가 보다. 반드시 네이버를 통해 확인하고 방문해야 할 듯싶었다. 어찌 되었든 가까운 식당에서 얼큰하고 뜨끈한 콩나물해장국으로 시끄러운 속을 시원하게 달래고 언니와 형부가 묵었던 방하나를 체크아웃했다.


비행기가 오후 3시 이후에 딸과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출발하는 것으로 예약해 두었다. 그동안 한 군데 정도는 관광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있다. 지난번에 갔다가 작품전시 준비관계로 관람하지 못한 현대미술관에 어떤 작품이 전시되었는지 보고 싶었다. 미술관에는 주 4.3 관련 미술제가 "기억의 파수, 경계의 호위"라는 이름으로 전시되어 학살과 항쟁의 역사를 알려주며, 이유 없이 죽어간 영혼들을 달래주고 있었다.


언니는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다. 미대를 가고 싶어 했으나 넉넉하지 못한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생활을 하였다. 거기에는 큰언니가 대학을 가게 되면 동생들이 대학을 가지 못한다는 전제가 알게 모르게 재되어 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맏딸은 살림밑천이라는 미명아래 희생이 강요되는 시기였다. 살아오는 동안 이 부분은 늘 큰언니에게 미안한 부분이었다.


결혼해 살면서 가정형편으로 대학진학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는 것을 안 형부는 언니의 모교에서 서류를 떼어 방통대원서를 제출하여 진학의 꿈을 이루게 해 주었다. 덕분에 미대는 아니어도 학사과정을 마 수 있었다. 지금은 틈틈이 유튜브나 문화센터 미술강좌를 통해 취미생활로 그림을 그리고 있다. 지난해에는 손수 그린 그림을 액자에 넣어 동생들에게 하나씩 선물도 하였다. 미술관 관람계획은 이런 언니를 위한 나의 작은 챙김이다.


돌아보면 형부의 외조는 극진했다.건 사랑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처갓집에도, 처제들에게도 잘했는지도 모른다. 옛말에 마누라가 예쁘면 처갓집 말뚝 보고도 절한다고 하지 않있던가. 형부를 알고 지내온 세월이 형부로 지낸 세월보다 훨씬 길었으니 그 성정을 누구보다 나는 잘 알고 있다. 상한 형부의 보살핌이 금까지 세 자매를 보듬어 주었으니 그저 감사할 따름이. 오늘의 여행이 작은 보답이 되길 바란다.


제주 현대미술관을 둘러보고 물방울 그림의 김창열 작가의 전시관도 둘러보았다. 우리는 이미 둘러본 곳이기는 하지만 볼 때마다 느낌은 새로웠다. 작가의 혼과 그림에서 보여주는 메시지들은 예술만이 가져다주는 삶의 또 다른 정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3일간의 어수선한 관광이 미술관 관람으로 차분히 일단락되는 느낌이다. 이번 제주여행이 가족들의 마음속에 영롱한 물방울처럼 맑고 깨끗한 빛을 발했으면 좋겠다.


점심은 딱새우 비빔밥을 먹기로 했다.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마지막 선택메뉴이다. 돔베고기도 추가로 시켰다. 식사를 마치고 많은 체인점을 가지고 있는 카페지만 특별히 제주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료가 있다는 바다가 보이는 스타벅스로 갔다. 제주 사려니 쑥길라떼, 제주 비자림 콜드브루... 등 제주형 이름이 붙은 음료를 우리는 젊은 감각의 딸 덕분에 마셔보게 되었다. 아니, 제주를 마셨다는게 더 맞는 말이다. 아주 달콤한...


어쩌면 딸의 갑작스러운 제주방문은 이번여행에 큰 이벤트가 되었다. 다소 묵직한 어른들의 여행분위기를 젊음으로 띄워주기도 했다. 즉석에서 출력되는 인생 네 컷 사진을 찍어보는 희극도 연출해주고, 유명 베이커리나 김밥등으로 여행 중 어른들이 선뜻 선호하지 않는 특별음식으로 별미를 맛볼 수 있게 해 주기도 했다. 카페에서의 센스 있는 커피주문과 시그니처 음식의 선택, 스타벅스에서의 별난 음료 맛보기 등은 이든 우리에게는 새로운 신세계였다. 미술관에서는 팸플릿을 보며 도슨트 역할까지 해 주었다. 고맙고 기특 예쁜 딸이었다.


금요일 오후라 도로가 조금씩 밀리는 것 같다. 관광지에도 여느 날보다 붐비고 있었다. 유채꽃축제, 들불축제로 인해 주말을 이용한 관광객이 육지에서 제주로 몰려들고 있다. 짧은 기간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가족들과의 즐거운 시간이었다. 다하지 못한 추억 쌓기는 다음기회로 남겨두고 우리는 아직 남은 제주 살기를 위해 곳에 남았다. 리고 큰언니와 형부, 우리 딸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어느새 우리는 제주 현지인이 되어 이곳에 머물고 있었고, 그들은 관광객이 되어 떠나갔다.


※ 혹시 모를 여행자를 위해 다녀온 장소를 기록해 본다.(제주현대미술관. 안녕협재씨. 협재해변. 스타벅스. 제주공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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