엉덩물계곡 유채꽃에 취하다.
제주 살기 11.
날이 희끄무레하다. 비가 온다는 일기예보는 있지만 아직은 오지 않는다. 혹여 몰라 실내로 여행지를 선택했다. 한창 꽃피고 있는 제주 한란전시관에 가보기로 했다. 전문적인 지식은 없지만 한때 난과 비슷한 석곡을 많이 키웠던 터라 가보고 싶었다. 제주에서만 군락을 이루고 있는 귀한 난이기에 이곳 아니면 접해볼 기회가 없을 것 같다. 인사이동 때마다 난을 선물로 받았지만 이듬해 다시 꽃을 보기란 늘 어려웠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꽃이 내겐 난이다.
전시관에 들어섰더니 난향이 은은하다. 추울 때 꽃이 핀다고 하여 "한란"이라고도 하며 주로 자생지가 서귀포쪽이다. 곧게 뻗은 이파리가 정갈하고 모자 쓴 이름 모를 투구화가 앙징맞다. 그저 눈으로 보고 느낄 뿐이다. 동양화에서 왜 사군자라 하여 높이 평했는지 알 것 같았다. 고결함과 청초함이 배어있어 귀해 보였다. 배양관까지 둘러보고 나왔더니 갑자기 소낙비가 내렸다. 남편은 웃옷을 벗어 머리에 쓰고 들어오라고 한다. 우산을 안기지고 왔기 때문에 얇은 점퍼로 우산을 만들어 쓰고 주차장까지 뛰어갈 모양이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 이 풍경이 낯설지 않다. 분명 데자뷔는 아닐진대...
제주날씨는 비가 오면서 바람이 많이 불어 삼다도 임을 증명하고 있다. 어찌 보면 이러한 날씨는 스스로 멈춤이 안 되는 사람에게 하늘이 주는 또 다른 쉼의 시간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숙소로 돌아왔다. 깨끗이 방이 청소되어 있고 새로운 생활용품인 수건과 물이 비치되어 있다. 며칠 안 되는 여행 중에만 누릴 수 있는 이 호사스러운 특권을 최대한 누려야겠다. 잠시 주어진 주부의 지위를 반납하고 노트북을 열어 오롯한 내 시간도 가져본다. 다녀온 여행지들이 기억에서 퇴색하기 전 붙잡아 본다. 말이 되는지, 글이 되는지도 모르는 채 브런치에 글을 썼다. 돌아가서 여유 있는 날 다시 몇 번의 퇴고를 거쳐야겠지만...
비가 멈췄다. 그저 눌러앉아 숙소에 있기엔 주어진 시간이 한정적이기에 유채꽃이 광활하게 흐드러진 엉덩물계곡으로 향했다. 이름조차 다소 어색한 이곳은 골짜기를 따라 유채꽃이 자생적으로 피어난 곳이다. 산방산이나 송악산 유채꽃에 비해 산발적이고 자유스럽다. 인위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이 펼쳐져 다소 산만스러워 거칠기까지 하나 지금까지 본 유채꽃밭 중 최고였다. 적어도 내가 느끼기엔. 언제부턴가 꽉 찬 인위적인 아름다움보다는 다소 빈듯한 어설픔이 있는 것들이 자연스럽고 정감 있어 좋았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주말이라 그런지 주차장에도 차가 꽉 찼다.
중문색달 해수욕장으로 갔다. 시원한 파도와 함께 서핑, 요트, 제트보트 등 해상레저를 즐길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한 곳이다. 큰 야자수와 함께 이국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해변이라 여름철에는 많은 피서객들이 몰릴 것 같다. 오늘은 파도가 높고 다소 스산한 느낌이다. 해변길을 잠시 산책하고 소소하지만 착하고 맛있는 먹거리를 제공하는 식당으로 가서 끼니를 해결했다. 해산물 비빔밥 전문점으로 음식이 깔끔하고 정갈하게 1인상으로 내 앞에 자리 잡았다.
식사를 하고 아직 다하지 못한 숙제해결을 위해 카페로 갔다. 아니, 숙제 같은 인생 축체처럼 살아 보려고 축제장으로 갔다. 오성급 호텔 주변에 자리 잡은 멋진 정원뷰를 가진 카페이다. 다닐 때마다 느끼지만 우리나라에 이렇게 멋진 카페들이 많다는 것에 대해 문화적 상승감을 느낀다. 갑자기 변한 사회문화 현상이다. 브런치 카페라 시그니처 메뉴인 베이글 샌드위치도 곁들여 본다. 역시 제주여행은 "놀멍 먹으멍"이다.
중간에 숙소에 들러 쉬었던 터라 조금 더 걷기로 했다. 해질 무렵의 바닷가 트레킹도 운치 있을 듯싶어 외돌개 올레길로 갔다. 외돌개는 화산이 폭발하여 분출된 용암지대에 파도의 침식작용으로 형성된 돌기둥이다. 바다에 나간 할아버지를 기다리다 돌이 됐다는 전설도, 소나무 사이에 살짝 붉은 기만 내비치다 사라져 간 일몰도 그리움과 아쉬움을 남겨 주었다. 저녁산책길은 고즈넉하다. 바다도 겨울을 몰아내려는 마지막 꽃샘추위라는 걸 아는지 잠잠히 포용해 주고 있다. 나무도 비 온 뒤의 진한 향기로 외로운 외돌개를 지키고 있다. 여기도 멋진 바다와 나무가 있다. 우리 바다나무처럼..
※혹시 모를 여행자를 위해 다녀온 장소를 기록해 본다.(제주 한란전시관. 엉덩물 계곡. 중문 색달해수욕장. 소소한 식당. 브런치카페 베메로. 외 돌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