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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조각이 피부에 박히면 혈관을 타고...

의학용어 색전증

어린 시절 저를 공포에 떨게 한 의학 미스터리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리조각이 피부에 들어가면 혈관을 타고 가서 심장을 찌르고 결국 고통 속에 죽게 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주사기에 조금이라도 공기가 들어가면 그 공기가 혈관을 타고 가서 고통 속에 죽게 한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유리조각이 혈관을 타고 돌아다닐 일은 없습니다. 유리는 밀도가 높고 뾰족해서 혈류에 잘 실리지 않으며, 대개 혈관을 손상시키고 그 자리에 멈출 것입니다. 작은 유리조각이 피부에 박히면 우리 몸은 이를 이물질로 인식해 염증 반응을 일으키며, 시간이 지나면 주변을 섬유조직이 둘러싸거나 바깥으로 밀어내려는 시도를 합니다. 자연스럽게 배출될 수도 있지만, 감염 위험이 있어 제거가 필요합니다. 아니!! 그런데, 유리조각은 이해가 가는데, 공기가 들어갔다고 죽을 수도 있을까요? 그래서 나는 주사를 맞을 때마다 간호사나 의사 선생님들이 공기를 확실히 제거하는지 불안에 떨며 매의 눈으로 관찰하고는 했습니다. 왜 그거 있지 않습니까? 주사기를 위로하고 톡톡 친 후 살짝 내용물을 찍하고 버리는 절차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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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전증


실제로 공기는 혈관을 막아서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는데, 이를 의학적으로 이를 공기색전증(air embolism)이라고 합니다. 특히 정맥주사의 경우 위험성은 커집니다. 비슷한 상황으로 잠수병(감압병, decompression sickness:DCS)이 있습니다. 고압 환경에서 질소가 혈액과 조직에 과도하게 용해되었다가 수면으로 급히 올라올 때 압력이 급격히 낮아지면서 기체가 기포 형태로 혈관과 조직 내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통증, 마비, 의식 변화 등을 유발하며 심하면 생명에 위협이 됩니다. 잠수병 역시 주사기를 통해 공기가 혈관에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기가 혈관 속에서 비정상적으로 존재하거나 이동해 순환을 방해하여 나타나는 공기색전증입니다.


혈관에 이물질이 막히는 모든 상황을 색전증(embolism)이라고 합니다. 색전증(Embolism)의 어원은 그리스어 'embolismos(ἐμβολισμός)'에서 나왔습니다. 'em(안으로)' + 'ballein(던지다)'의 합성어로, 문자 그대로 "안으로 던져 넣다" 또는 "끼워 넣다"라는 뜻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달력에 윤일이나 윤달을 끼워 넣는 것도 색전증(embolism)이라고 불렀습니다. 2월 29일이 4년마다 갑자기 나타나는 것처럼 말입니다. 뭔가 원래 있던 구조에 추가로 끼워 넣는 모든 것이 색전증이었던 셈입니다.


의학 속 색전증: 혈관 속 불청객


의학에서 색전증(Embolism)은 공기뿐 아니라 혈관 속에 본래 있으면 안 되는 물질이 끼어서 혈류를 막는 현상을 말합니다. 혈전(thrombus), 기포, 지방덩어리, 심지어 암세포까지... 이런 것들이 혈관 속을 떠다니다가 어디선가 막혀버리는 것입니다. 마치 고속도로를 달리던 차가 갑자기 나타난 바위에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원래 그 자리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 끼어들어서 정상적인 흐름을 방해하는 거입니다. 색전증(embolism)을 일으키는 물질을 색전(embolus)라고 합니다. 색전증을 일으키는 색전(embolus)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색전증 embolism
색전 embolus


- 혈전성 색전(Thrombotic Embolus): 가장 흔한 종류로, 다른 곳에서 생긴 혈전이 떨어져 나와 떠다니는 것입니다.

- 공기 색전(Air Embolus): 혈관 속에 공기방울이 들어간 것입니다. 앞서 이야기한 주사기로 인한 정맥색전, 잠수병 등이 해당합니다.

- 지방 색전(Fat Embolus): 심한 골절 등으로 뼛속의 지방조직이 혈관으로 들어간 경우입니다.


색전이 색전증을 일으키는 위치 또한 다양한데,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폐, 뇌, 심장 등입니다.

- 폐색전증(Pulmonary Embolism): 폐로 가는 색전입니다. 호흡을 방해합니다.

- 뇌색전증(Cerebral Embolism): 뇌로 향하는 위험한 여행자입니다. 뇌졸중(stroke)의 주범 중 하나입니다.

- 관상동맥 색전증(Coronary Embolism): 심장 혈관을 막는 심장파괴자입니다.


색전(Embolus) vs 혈전(Thrombus): 떠다니는 것 vs 붙어있는 것


여기서 중요한 건 색전(塞栓, Embolus)과 혈전(血栓, Thrombus)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 둘은 마치 혈관계의 '훼방꾼 쌍둥이' 같은 존재지만, 성격이 완전히 다릅니다.

색전은 혈관 속을 떠다니는 유랑민입니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져서 혈류를 타고 여행하다가 자신보다 작은 혈관에 끼어버립니다. 마치 서울에서 출발한 택배가 부산 골목길에서 막히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 혈전은 토박이 민폐러입니다. 혈관벽에 달라붙어서 그 자리에서 자라나면서 혈관을 막습니다. 마치 동네 어귀에 불법주차를 해놓고 계속 그 자리를 차지하는 철면피 같은 놈입니다. "나 원래 여기 사는 사람이야"라며 뻔뻔하게 버티는 토착 방해꾼이랄까요.

아래 그림에서 blood clot이 혈관 속에 쌓인 것이 혈전이고, 거기서 떨어져 나온 것이 색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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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속의 색전증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시작하는 주기도문을 외우다 보면, 끝부분에서 뭔가 이상한 걸 느낀 적이 있을 것입니다. "대개 이 시련의 때에서 구하소서" 다음에 갑자기:

"주님, 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자비로이 평화를 주소서. 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죄에서 언제나 자유롭게 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사, 복된 희망과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 아멘."

이 기도문이 바로 '엠볼리즘(Embolism)'이라 불리는 부분입니다. 마치 원래 레시피에 없던 재료가 갑자기 끼어든 것 같지 않습니까? 실제로 그렇습니다. 엠볼리즘은 원래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에는 없던 부분으로, 나중에 교회가 "이걸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보자"라며 추가한 것입니다.

4세기경 교회 지도자들은 주기도문이 "그리고 악에서 구하소서"로 끝나는 게 뭔가 아쉽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치 영화가 갑자기 끝나버린 것 같은 느낌? 그래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기도문을 끼워 넣고, 또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로 시작하는 영광송(Doxology)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는 유대교 전통에서 기도를 영광송으로 마무리하는 관습을 따른 것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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