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권도 같이 시작한 친구들 검은 띠 딸 때, 난 파란 띠 차고 초등학생과 대련했다. 나이 들어 아내와 함께 배운 탱고는 개인 레슨까지 따로 받았건만, 상대방 발을 밟지 않는 것이 유일한 목표였고, 그마저도 자주 실패했다. 골프는 친구들 등살에 필드에 나갔다가 다음부터는 그 친구들이 나를 부르지 않는 수준이다. 늘 배움이 늦은 편이다. 그래서 내가 꾸준히 하는 것이라곤 그 흔한 달리기도 아닌 산책뿐이다
오늘도 음악을 들으며 즐겁게 산책한다. 어벙덤벙, 엉성한 걸음으로. 그런데, 에어팟에서 들리던 노랫소리가 갑자기 뚝, 걸음도 멈추어 선다. 이런이런, 또 깜빡 에어팟 충전을 잊었구나. 투덜거리며 귀에서 에어팟을 빼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순간 귀전을 간질이는 낯선 소리.
사그락, 사그락, 스스슥, 스스슥
캘리포니아의 따뜻한 오후, 커다란 야자수 잎들이 바람에 서로 부대끼며 파도 소리를 낸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를 표현하는 특별한 말, 스써러스(Susurrus). 바람, 물결, 나뭇잎 등이 내는 잔잔한 소리를 표현한 소릿말이다. '스써러스', 발음해 보면 참 예쁜 소리가 난다.
차 한 대 없는 적막한 골목길에 잠시 서서 소리를 듣는다.
바람에 나뭇잎들이 부대끼는 소리. 그리고, 익숙하게 느껴지는 편안함.
스써러스, 스써러스,
스르락, 스르락...
다시 걷는다.
하루 종일 이 뙤약볕 아래서 뭔 짓인지 모르겠다. 오월은 숫자상 봄이라지만, 낮에는 여름이다. 게다가 이 무신경하고 냄새나는 남자아이들 틈에서 부대끼는 것은 영 내 취향이 아니다. 가뜩이나 점심 먹고 부른 배는 사지를 나른하게 만드는 오후, 이 탑이 무슨 왕 때 세워졌고, 저 건축물은 무슨 양식이고, 언제 불탔다가 복원되었으며 하는 이야기는 그저 바람에 흘러간다. 이 교양 없는 아이들은 뭐가 좋다고 들어가지 말라는 곳까지 들어가서 사진을 찍고 법석대고 있다.
슬그머니 뒤처졌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한쪽 구석, 돌담 옆에 뿌리를 내린 커다란 나무 아래 혼자 앉았다. 플라타너스였을까. 손바닥만 한 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서로 부대끼는 소리를 냈다. 스르락, 스르락. 돌 위는 차가웠고, 그늘은 깊었고, 그 소리는 반복되었다. 나는 그만 까무룩 잠이 들었다. 잠결에도 스르락, 스르락, 그 소리만은 들렸던 것 같다. 아주 멀리서, 누군가 나지막이 부르는 것처럼.
얼마나 잤을까. 깨어보니 사방이 조용했다. 일행도, 선생님도, 버스도 없었다. 얼마나 존재감이 없었으면 내가 없는지도 모르고 버스가 출발했을까. 억울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런데 솔직히 말하면, 조금 홀가분하기도 했다.
혼자 한 시간을 걸어 숙소로 돌아오면서, 아무도 없는 경주 골목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처마 끝의 곡선, 오래된 돌담, 저녁이 오기 전 만물이 가라앉는 빛. 무리 속에 억지로 끼어 발을 맞췄다면 결코 보지 못했을 풍경이었다. 나를 두고 떠난 버스에 대한 억울함보다, 나만의 고요를 찾았다는 충만감이 더 컸다.
스르락, 스르락,
스써러스, 스써러스...
지붕이 없는 자동차 한 대가 위풍당당 '부르우웅' 엔진 소리를 내며 내 옆을 쌩 지나간다.
모래 바람을 일으키며 골목을 돌아 사라지고, '부르우웅' 소리도 꼬리를 내리며 뒤를 쫓아 흩어진다.
다시 소리마저 텅 빈 골목길,
야자수 잎들이 바람에 몸을 비빈다.
한국의 플라타너스는 스르락, 스르락.
미국의 야자수는 혀를 굴려 스써러스, 스써러스.
니들이 뭐라고 부르건 나뭇잎은 바람에 부대끼며 파도소리를 내고,
내 뭉친 어깨에선 스르르 힘이 빠져나간다.
스르르...
늦으면 어때, 천천히 뒤따라가면 되지.
susurrus
/suˈsʌrəs/
라틴어 susurrus에서 유래. ‘속삭임’, ‘바스락거림’, ‘잔잔한 웅성거림’을 뜻함. 바람이 잎을 스치는 소리, 멀리서 번지는 물결 소리, 낮게 깔린 목소리처럼 또렷하진 않지만 지속적으로 감각을 감싸는 미세한 음향. 소리라기보다 분위기에 가까운 청각적 잔향, 혹은 세계가 아주 조용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드러내는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