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초에는 보통 학생들과 자기소개를 한다. 내가 먼저 하는 경우가 많은데, 경력이나 연구 결과 등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이야기도 곁들인다. 취미나 좋아하는 영화, 애완동물,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 그런데 좋아하는 가수가 빌리 아일리시나 블랙핑크라고 하면, 학생들이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그럴 때면 나는 이렇게 되묻곤 한다. "난 뭐 심수봉이나 나훈아 좋아할 줄 알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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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하는 이슈가 있으면 메모했다가 학생들과 이야기도 하고, 새로 시작한 드라마 이야기도 한다. 강의 슬라이드엔 개구리 페페가 주먹질하는 밈도 넣고, 강아지가 방귀를 뀌는 움짤도 넣고 내 딴에는 재밌게 강의를 하려는 노력이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십 대였던 아들은 질색을 했다. 제발 애들 쓰는 말 쓰지 말라고. 이렇게 젊은 척하는 사람들을 영포티라고 하는데, 학생들이 제일 싫어하는 틀딱들이라고 팩폭을 날렸다. 사내놈들은 돌려 말할 줄 모른다.
젊었을 때 나는 더 나이 들어 보이려고 한자를 즐겨 썼고, 뿔테안경을 쓰고 정장 재킷을 입고 강단에 섰다.
사십대 중반이 되면서 안경을 벗었다. 재킷 대신 밝은 색 셔츠를 입었다. 아들의 핀잔을 뒤로하고 인터넷 밈을 클리핑 했고, 유행어를 수첩에 적어 두었다.
이제 나는 어느새 오십 후반이 되었다. 여전히 나는 같은 짓을 한다. 이제는 핀잔을 줄 아들도 커서 집에 없으니 거리낄 것이 없다. 내게는 최신이지만 그들에게는 철 지난 농담을 하고, 개구리 페페가 아직도 슬라이드에 남아 있고, 셔츠의 색은 이제 형광색으로 더 요란스러워졌다.
그런데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다.
심지어 "교수님 귀여워요."라는 학생도 있다.
뭐... 뭐라고?
처음으로 버스에서 노약자석 자리 양보를 받으면 이런 기분일까?
40대의 '영포티'가 젊은 세대에게 불쾌함을 주는 이유는, 그가 아직 기성세대의 권력을 쥐고서 젊음의 영역까지 침범하려 한다는 위화감 때문이다. 그러나 50대 후반이 되어 듣는 '귀여워요'는 다르다. 그것은 기성세대로서의 위압감이나 남성성이 완전히 거세된, 철저히 무해한 '할아버지'의 영역으로 편입되었음을 알리는 서늘한 선고다. 흔히 자연과학에서 역치를 뜻하는 스레숄드(Threshold)는 원래 문지방을 뜻한다. 거실 마루와 안방의 경계선. 나는 언제 그 문지방을 넘었는지도 몰랐다. 젊어 보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아저씨와, 그 역겨운 노력이 귀여워지는 할아버지의 경계를.
나는 이제 할아버지가 되었고, 나의 젊은 척은 면죄부를 얻었다.
그 서늘한 선고를 들은 순간, 나는 다음 슬라이드로 넘기려던 프레젠터 버튼 위에서 잠시 손가락을 멈추었다.
감히 나에게 귀엽다고 말한 학생은 각오하길 바란다.
자네 성적은 무조건 A+다.
낯선 아이돌의 이름을 외우고 유행어를 수첩에 꾹꾹 눌러 적던 나의 촌스러운 노력들은, 결코 영원히 늙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 것이 아니었다. 그저 학생들과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고 싶고, 같은 세상을 함께 보고 싶었던 늙은 어른의 서툴지만 애틋한 짝사랑을, 문지방을 넘어선 지금에야 편안한 마음으로 고백해 본다.
Threshold
/θreʃ.həʊld/
noun, the strip of wood or stone at the bottom of a doorway
— also: the point at which something changes
역치: 어떤 현상을 일으키게 하기 위하여 계(系)에 가해야 하는 물리량의 최소치.
내가 배우자를 툭툭 건드리다 강도를 늘려가면 어느 시점에서 짜증을 내는데 그 지점의 강도가 역치다.
작가의 노트
1. 도입부에 틀딱이니 페페니 팩폭이니 하는 단어들을 억지로 우겨넣은 듯한 느낌이 들지 않았나요? 젊은 척을 직접 묘사하기보다, 문장자체를 어색하게 만들어서 학생들이 느낀 위화감을 독자들이 직접 느낄 수 있도록 메타적인 시도를 해보았습니다.
2. 원래 '크린지(cringe)'를 표제어로 하려고 했던 글입니다. 본래 두려움이나 고통에 압도되어 몸을 잔뜩 웅크린다는 뜻의 고대어에서 출발한 이 단어는, 오늘날 타인의 어설픈 행동을 차마 눈 뜨고 보지 못해 내 손발이 다 오그라드는 지독한 수치심을 뜻하게 되었습니다. 아들의 눈에 비친 내가 딱 그 단어 뒤에 아버지를 붙인 '크린지 대드(cringe dad)'였겠지요. "아빠! 쪽팔려, 제발 그만 좀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