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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Feb 06. 2024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모르겠다가도 너무 잘 알겠는 마음

거의 격추되고, 겨우 몇 대만

  “……국민 여러분, 훈련 공습경보를 해제합니다…… 현재시각 14시 30분 현재 우리 영공에 나타났던 적기들은 용감한 우리 공군에 의해 거의 격추되고, 겨우 몇 대만 북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이제 안심하시고 생업에 종사하시기 바랍니다……”

민방위 훈련 날이면, 나는
이 글을 쓴 사람이 누군지 슬그머니 궁금해지곤 했다
우리 영공을 침범한 적기들이 전부 몇 대였는지는 모르지만
어차피 연습이고 각본인데,
용감한 우리 공군이 모조리 떨어뜨렸다고 하지 않고
거의 다 격추되었다고 쓴 사람
몇 대는 북으로
돌려보내준 사람

리얼리티를 아는 사람
리얼리티를 반성할 줄 아는 사람

누군가는 이렇게 쓰라고 지시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공군의 위협사격만으로도 혼비백산
모조리 꽁무니를 빼고
북으로 달아났다고

하지만
아무리 가상이고 훈련이라도
그렇게 되면 너무 시시해진다고
그렇다고 모조리 다 떨어뜨리지는 않고
몇 대는 북으로 돌려보낸 사람
겨우 몇 대는
집으로
돌아가게 놓아둔 사람

1. 거의 격추되고, 겨우 몇 대만

마음의 결이 아주아주 촘촘한 사람들이 있다. 남들은 하나로 뭉뚱그리는 것도 세세하게 나눌 줄 아는 사람. 나는 시 속 민방위 훈련 글을 쓴 사람이 리얼리티를 아는 사람이기보다 마음테가 좀 더 빼곡한 사람이 생각한다. 싸움이라는 것에 진정한 승패는 없는 걸 아는 사람, 어차피 연습이고 각본이어도 어느 한 쪽도 완전히 몰살시킬 수는 없는 사람, 침범한 적이어도 그들에게도 기다리는 가족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 그래서 마음이 간다. 나보다 현실을 잘 알아서가 아니다. 나보다 더 사람들을 마음에 둘 줄 알아서 그 시야를 닮고 싶어서.



장편(掌篇)

전화기를 귀에 빠짝 붙이고 내 곁을 지나던 여자가
우뚝
멈춰 섰다

“……17호실?
으응,
알았어

그래
울지
않을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운다 짐승처럼 운다
17호실에…… 가면
울지 않으려고
백주대로에서 통곡을 한다

이 광경을
김종삼 시인이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길을 건너려다 말고

2. 장편

울지 않으려고 울어본 일이 있다. 대부분의 슬픔은 언제 맺혔다 언제 마르는지도 모르게 왔다 가는 아침 이슬 같은데, 가끔식은 예고하고 오는 슬픔이 있다. 건물 완공식도 아니고 뭘 그렇게 거나하게 예고씩이나 하고 오시는지. 마중까지 나갈 생각은 없었는데, 아플 줄 알면서도 내딛는 걸음이 있다. 여전히 나는 모른다는 이유로 무신경하게 던지는 돌팔매질만큼이나 다치라고 말하는 뾰족한 말부리에 자주 넘어지고 헤맨다. 그냥 가던 길 가주라. 뭘 또 그렇게, 열심히까지 싫어하고 그르냐..



근황

불온한 생각도 아직은 더러 있는데
꺼내놓을 용기가 없다.
대부분 옛사람 옛글이 시키는 대로
다소곳이
상부의 명령과 지시에
고분고분

고향에 보내는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3. 근황

입밖으로 내뱉고 나서야 알게 되는 마음이 부지기수다. 술술 말해놓고 나서 이게 아닌데 싶어서 ‘아차’ 싶을 때도 허다하다. 걱정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 반, 괜찮다고 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 반의 반, 하나부터 열까지 다 말할 자신이 없어서 귀찮은 마음 반의 반의 반, 실은 나도 나를 모르겠는 마음 반의 반의 반의 반,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어떤 마음들이 한데 모여 편지를 쓴다.

그래서 나도, 꽤나 자주, 편지에는 그냥 잘 지낸다고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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