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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May 19. 2022

5. 표정이 말해주는 것

 동네 마트에 다녀오는 길, 주차장에서 작은 다툼이 났다. 하필이면 j가 어려워하는 일자 주차 자리에 주차를 하게 되었는데, 옆에 벽이 있어 J는 내가 못 내릴 거 같다고 말했다. 나는 앞으로 살짝 차를 움직이면 벽이 끝나는 지점이니 충분히 내릴 수 있을 거라 주장했고, J는 내 말대로 했지만 아슬아슬하게 차 문이 벽 끝에 걸려 결국 내릴 수 없었다. 그때 J가 주차를 멈추고 한숨을 쉬더니 잔뜩 짜증이 난 표정으로 "차 뺄 테니 너 먼저 내려"라고 말했다. 이 작은 표정 하나에서 우리의 주말 첫 다툼이 시작됐다. 나는 그냥 앞으로 빼줄 테니 먼저 내리라고 좋게 이야기하면 될걸 한숨+짜증을 콤보로 내는 J에게 기분이 나빠진 상태였다. J입장에서는 아무리 봐도 못 내릴 거 같은데 내가 내릴 수 있다고 우겼고, 결국 못 내리는 상황이 발생한 게 '짜증이 난 건 아니지만' 이해가 안 됐다고 했다. 아니, 그 표정이 짜증을 낸 표정이 아니라고? 누가 봐도 짜증 낸 얼굴인데 그렇지 않았다는 J의 말이 내 화를 한층 더 돋웠다.


 여느 오래된 커플이 그러하듯 시간이 지나며 자연스럽게 화해했지만, 예전부터 우리의 다툼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되었다. 유난히 다른 사람의 표정과 말을 주의 깊게 살피고, 그 사람의 기분 상태를 예민하게 관찰하는 나는 J의 표정에 하나하나 의미를 부여했다. 'J가 지금 화났나? 서운한가? 행복한가? 불편한가?' 스스로를 참 피곤하게 만드는 습관이지만 30년간 그렇게 살아왔으니 쉽게 바뀌지 않는다.


 반면 J는 다른 사람의 기분이나 상태를 무심하게 바라보는 편이고 본인 또한 거의 무표정일 때가 많다. 게다가 어릴 때 자전거를 타다 계단에서 굴러 눈썹 위에 스크래치 같은 진한 흉터가 있다. 심지어 호랑이 눈썹이니 가만히 있어도 화가 난 것처럼 보인다. J는 "어릴 때부터 원래 표정이 이랬어. 그래서 초등학생 때는 동네 형들이 너 표정이 왜 그러냐면서 시비 걸리는 일도 많았지"라고 한다. 내 입장에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다. 동네 형들한테 시비가 걸릴 정도인 데다 나와의 연애시절 내내 "표정이 왜 그래? 화났어?"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을 정도면 그 표정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느끼고 바꾸려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닌가? J입장에서는 자긴 그냥 아무 생각 없고 평온한 상태인데도 표정이 원래 사나워 보이는 걸 어떡하냐는 거다.


 사람들을 만나보면 표정에서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나처럼 얼굴에 감정이 다 드러나는 사람은 상대적으로 파악하기가 쉽다. 지금 이 사람이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슬픈지가 마치 감정표현이 다 적혀있는 대본처럼 드러나니까. 반면 포커페이스를 잘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는데, 이 사람들은 항상 온화한 얼굴을 하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 표정이 변하지 않기에 애초에 얼굴에서 읽을 수 있는 정보가 많지 않다. 그래서 나처럼 타인의 기분에 민감한 사람은 약간 긴장하고 대화를 나누며 그 사람을 알아보려 하게 된다.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케이스, J처럼 타고난 신체적 특징 때문에 항상 무표정이거나 화내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은 가장 안 좋은 위치에 놓이기 마련이다. "저 사람 화났나 봐" 또는 "쟤 오늘 기분 안 좋대?"라는 부정적 선입견을 바닥에 깔고 시작하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니 내가 J를 처음 만났던 스무 살 때도 나는 J를 보고 "쟤는 오늘 기분 나쁜 일이 있나 보네. 화난 얼굴이야"라고 생각하고 다가갈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현대인의 필수 능력 중 하나를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것'이라 꼽는 사람들이 있다. 험난한 세상, 누구에게도 트집 잡힐 일을 만들지 않고 무던하게 섞여 살아가기 위해선 내 마음과 감정을 숨겨두는 것이 유리하니까. 그래서 잘 울고 웃던 어린 시절에 비해 세월이 흐를수록 무표정한 얼굴을 하는 어른으로 자라게 된다. 기뻐도 기쁘지 않은 척, 슬퍼도 슬프지 않은 척, 화가 나도 화나지 않은 척. 무채색의 가면을 쓰고 감정을 최대한 절제하는 삶이 어른스럽고 성숙한 태도로 평가받는 세상이라니. 적어도 내겐 너무 비극적이다.


좋으면 좋다, 슬프면 슬프다 자유롭게 표현하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었다.

 다람쥐나 늑대 같은 동물들은 몸짓이나 울음으로 서로와 소통을 한다. 하지만 눈썹과 눈, 볼과 입꼬리 등 얼굴의 모든 근육을 이용해 감정을 표현하고 소통하는 것은 사람밖에 없다. 그렇기에 '표정'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능력 중 하나라 생각한다. 화가 나면 미간을 찡그리고, 기쁘면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슬프면 눈을 내려 울고, 서운하면 눈을 흘기는 그 모든 다채로운 표현이 결국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를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조미료가 되어줄 것이다.

 그리고 그 표현은 타인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변화를 함께 가져온다. 내 감정과 상태에 솔직하게 공감하고 표현하는 과정은 삭막한 저수지에 물을 채워 넣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바람이 불면 물이 출렁이고 흔들리겠지만, 그 안에 물고기도 살게 되고 주변에 나무와 꽃도 풍성하게 자라게 된다. 그 후엔 다시 메마른 저수지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절대 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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