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경훈 Aug 12. 2022

준비되기 전까지, 절대로 발톱을 보이지 말라.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인 줄 알면서도..

준비되기 전까지, 절대로 발톱을 보이지 말라.


그룹 본사에 기획업무를 보고 있는 정 부장을 보았다.


우리 회사 대표이사가 중국 발령 관련하여 나를 보내는 것이 어떨지를 물었다고 한다.

중국법인 총경리(사장)는 돌아오기로 확정이 되었단다. 현재 임원 중에는 보내야 할 적당한 사람이 없는 상태다. 대표이사는 우리 회사에선 그나마 기술과 영업이 동시에 되는 사람이 경훈이뿐이라는 얘기를 했단다.

정 부장이 물었다.


"박 부장 의견은 어때?"


나는 순간 멈칫했다. 그 건에 대해선 긴 시간 생각도 많이 해봤고, 정답도 정해져 있다. 말했듯, 나는 당연히 중국에 갈 마음이 없다. 그런데,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신중함이 필요하다. 아직 거기까진 준비를 못했다.


싫다고 하면, 완전히 버려질 것이다. 대표이사와 E아치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토사구팽에 대한 일말의 미안함도 깨끗이 씻어지리라. 기회를 줬는데, 본인이 거부했다고 하면 끝이니까. 그들은 끝까지 후배를 챙겼던 사람이 될 것이다. 나는 능력도 의욕도 없으면서 편한 길만 가려는 골칫덩이로 남겨질 테다.


그 사람들.. 이런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자넨 기회를 줬어" (난 매기가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시간이다. 내 앞날을 어느 쪽으로든 결정하고, 그에 맞춰 제대로 준비하기 위한 시간.


그때까진 어리숙하게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인 척 최대한 느긋해 보여야 한다. 나를 둘러싼 답답해 보이는 '불완전성의 세태'에는 의도적 우유부단이 깔려 있다. 내가 좀 더 제대로 된 판단과 그림을 그리는 데까진,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스스로가 먼저 정리하기 전에 다른 상황이 개입되면 곤란하다.


의도적 무질서


외부로부터 어떤 자극이 들어오면, 내가 깔아놓은 의도적 무질서함이 어느 쪽으로든 급속히 정리될 것이다. 그땐 준비가 안된 사람으로서의 당혹감과 미숙함이 외부로 여실히 드러나리라. 동시에 회사에서의 내 존재의 가치도 무너지는 속도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질문에 어느 쪽으로 답하든 내 속내가 변질되고 왜곡될 것이다. 마치 내가 확실한 의견을 낸 듯 전해지면, 그 후엔 생각보다 빨리 다른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말이다.


"글쎄.. 잘 모르겠네.."

"갈 의향이 있기는 한 거야?"

"음.. 중국이라.. 다른 임원 중엔 보낼 사람이 없는 건가..?"


정 부장은 그룹 본사 기획실에 있지만, 사실 아무런 권한이 없다. 거기에선 직급이 높은 편도 아니다. 하지만 눈과 귀가 있고, 특히 입이 살아있다. 오너 일가가 주관하는 대부분의 회의에 진행 담당자로 참석한다. 회장단 회의까지.. 정 부장이 우리 회사 출신이기 때문에 우리 관련된 사항은 분명 의견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런 땐 정확한 팩트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질문을 받았거나, 입을 열게 될 때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 그도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싶을 테니까. 뭔가 조금이라도 알면, 아는 체를 해야 한다. 그런 말들이 쌓여 기획실답게 '정보력과 판단력'이 좋은 사람이란 믿음을 줄 것이다. 아니 정확하게는 정 부장 스스로는 그렇다고 믿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 대한 그의 관심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가 대표이사나 오너 일가에게 내 중국 발령 건에 대한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으면 했다. 그 여지를 없애려면, 그가 의견을 쉽게 정리할 만한 명확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다. 틀릴 확률이 높으면,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진 못하리라. 말의 진위가 부정확한 사람은 신뢰도가 떨어지게 되니까. 애매한 것은 스스로가 걸러 말하지 않으리.



사실 나는 매일매일 전쟁 중이다.

회사에서 버틸 것인지, 말 것인지 결정을 보류한 채 양쪽을 다 시도해 보고 있다.


소위 말하는 '간을 보고 있는 중'이다.


인생 45년 동안 익혀온 온갖 개인기를 동원하여, 갖가지 시도를 해보는 것이다. 한번 결정하면 돌아올 수 없으니, 그만큼 중요하다.


한쪽은 유배지에서 제대로 버텨서 '재기를 노릴 것인지'다.

다른 쪽은 본격적으로 '인생 3막, 새 출발을 시도해 볼 것인지'다.


인생 3막에 대한 내 평생의 꿈은 잊지 않았다. 자본소득을 갖은 자산가의 꿈 말이다. 다만, 준비가 덜되어 망설여 왔을 뿐이다. 아직 좀 덜 됐지만, 앞당겨 시도해도 가능할 일인지 간을 보고 있는 중이다.


내게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이 것이다.

물 위에 우아하고 느긋하게 휴식을 즐기는 백조의 흉내를 내고 있다. 아무 욕심도 생각도 없는 한량처럼 보이려 애쓰는 중이다.

하지만, 발 밑으로는 죽어라 발을 구르고 있다. 그것이 노출되지 않도록 최대한 반대로 행동한다.



빗발치는 총알에도 하품 짓는 리액션을 한다. 그러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확실해 지기 전까지, 절대로 발톱을 보이지 말라."





솔직한 것과 사람에 대한 예의가 없는 것의 차이



정 부장 얘기를 들은 날 이후에는 더 많은 고민이 되었다.

혹시 이번 연말 인사발령에 예고도 없이 임원 승진과 중국 발령을 동시에 내는 일이 생기면 어쩌지..


나와 조율도 없이 중국 발령을 내버리면 명령을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거부하는 것은 곧바로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상황으로 정리될 것이다. 잘 못하다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올해를 못 넘기고 퇴사처리가 되어버릴 수도 있다.


걱정이 되었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몰라, 얼마간 심장을 졸이며 보냈다.



그러던 중, 연말 그룹 임원 승진인사가 생각보다 빨리 발표되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임원 승진자 명단에 없었다. 우리 회사는 임원 T/O가 부족해서 승진자가 없었단다.


중국으로 보내질까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론 임원 승진을 본능적으로 기대했던 모양이다. 사람인지라 기운이 빠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한 가지 특이 사항이라면 E아치보다 늦게 상무가 된 고 상무가 전무로 승진하였다.


자신이 우리 회사 상무 중에는 가장 직급이 높다고 자랑하던 E아치의 모습이 떠올랐다.

한편, 후배들을 승진에서 떨어뜨린 후 그 당사자들에게 늘상 하던 말도 생각났다. '승진,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그의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였다.

본인의 일에도 그렇게 생각할지 말이다. 승진을 못한 것보다 경쟁에서 밀리는 것이 더 속상한 것이란 걸 느꼈을까?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승진하고 못하는 것은 길게 보면 아무것 아니에요. 그리고 솔직히 섭섭해할 자격도 없잖아요. 승진한 사람들하고 실적이 비교가 안 되는데요, 뭘. 다음 주면 연구소 맡은 지 벌써 5년 차인데, 솔직히 그동안 해 놓은 실적이 아무것도 없잖아요.”


얼마 전 유사 연차 동료 중 나 혼자 임원 승진에 떨어졌을 때, 그가 내게 했었던 말과 같다.

그에게 그때 녹음했던 그의 말을 고스란히 들려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했다.


상대가 상처를 받거나 기분 나쁠 사안에 대해서, 그가 어떤 생각과 행동을 보이는지 잘 안다.


솔직하게 말하는 것을 용감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상처를 감추지 못하도록 더욱 파헤치는 것이, 남들은 잘 못하는 더욱 용감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에 대한 예의보다는 다른 것에 관심이 많은 듯하다. 스스로를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어깨에 힘을 주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렇게 냉정하고 솔직하게 말할 줄도 아는 사람이야. 이런 용감한 말은 나밖에 못 할 거야."


왜 다른 사람들이 형식적으로라도 위로의 말을 건네는 일에 공을 들이는지, 그 사람들은 정말 모르는 것인가?

고개를 저으며, 잠시 동안 혼자 생각에 잠겨 본다.




자신을 잡아먹을 호랑이인 줄 알면서도..



그러던 어느 날,

임형에게서 잘 지내느냐며 메시지가 왔다.


그는 보전업무에 능통한 기술자였다. 다양한 재능이 있고 부지런한 성격이지만, 재능에 비하여 크게 인정을 받진 못하였다.


10년 전, 제조팀장을 하다 담당 임원의 눈밖에 나 밀려났다. 당시엔 관리직 사원을 현장 근무에 투입시키기도 했다. 특히 주말이나 점심시간, 잔업시간에 라인을 작업자를 대신해서 돌리는 문화가 있었다. 인건비 한 푼 들이지 않고 생산량을 더 늘리는 마법 같은 방법이다. 소위 '현장 땜빵'으로 부르던, 이 정책에 반대를 하다 눈밖에 난 것이다.


그 뒤론 다른 공장 제조 팀원으로 쫓겨 갔다가 중국 공장으로 발령이 났었다. 그리고 4~5년 장기간의 중국 근무를 마치고 재작년에 돌아왔다. 그것도 본사로 오지는 못하고 자회사로 발령이 났다. 그러다 갑자기 올해 초 본사로 재발령 났다. 당진공장 보전 담당자로 복귀했다.


나는 단번에 그가 연락한 이유가 있을 걸로 생각했다. 그에게도 퇴직 관련된 무슨 일이 일어났거나, 관련된 고민이 있어서 일 것이다. 메시지를 보자마자, 바로 전화를 걸어 통화를 했다.


오랜만에 통화하였음에도 서로 그간의 안부는 짧게만 물었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일로 바로 넘어갔다.


우선 내가 먼저 그간의 일을 속사포처럼 쏟아냈다. 그동안 억울하고 답답하였다고 말했다. 속 시원히 말하고 싶었던 나의 이야기들을 하소연하듯 말했다.



그와는 경력이나 직급도 비슷하고 대화도 잘 통하던 사이였다. 그냥 속에 있는 말을 퍼붓자 속이 풀리는 듯했다. 한 참 동안 내 이야기를 한 후에, 임형이 얼마 전 잘린 전형 이야기를 꺼냈다.


임형도 비슷한 고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임형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모두 말하라며 그의 말에 집중했다.

그리곤, 그에게 들은 내용에 흠칫 놀랐다.


그가 올 초 자회사에서 당진으로 돌아오게 된 것에는 사정이 있었다. 회사에 당장 보전 전문가가 급히 필요한 상황이었다. 원래 있던 담당자가 퇴사했기 때문이다. 그는 전부터 본사로 돌아오길 바랐기 때문에 좋은 기회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그렇지만 그가 온 지 불과 6개월 만에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단다. 그의 덕에 공장은 빠르게 안정이 됐다. 그는 후배로 키울 신입사원도 수소문해서 뽑았다. 한동안 푹 빠져 함께 일하고 가르쳤다. 임형 스스로도 제 역할을 잘하고 있는 듯해서 힘이 났단다.


그런데, 지금은 이상한 입장이 됐단다. 그는 직급은 부장이지만, 보전업무만 담당하고 있다. 제조팀 예하의 팀원일 뿐이고, 말단 사원 업무를 함께하고 있다.


처음엔 부장이 허드레 일을 하고 있는 것을 한탄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씁쓸해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그가 말했다.


"나는 몇 개월 안에 잡아 먹힐 거야."

"무슨 소리야? 누구한테 잡아 먹힌단 말이야.."

"우리 신입사원."



나는 그 얘기를 다 듣기도 전에 충격을 먹었다. 신나게 중요한 일들을 가르치고,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이젠 더 가르칠 것도 없단다. 그러고 나서야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단다.


사람들이 본인을 찾는 일이 별로 없단다. 편하게 신입사원에게 시키면 되니까, 점점 임형에게까지 말하지 않게 됐나 보다. 제조팀장도 한참 선배인 임형에게 말하는 게 불편했을 것이다.


반면에, 선배이자 임원인 공장장은 임형이 노는 꼴은 못 보겠는지 다른 일을 시켰다. 거의 불가능한 일. 그가 해낼 거라고 기대도 하지 않으면서, 두리뭉실하게 오더를 주곤 압박을 한단다.


그렇게 되고 나서야 직감적으로 깨달았단다. 자신이 얼마 못 견딜 것이라고..

그도 그럴 것이 같은 일을 하는 사원과 연봉이 두 배 넘게 차이가 나는 상황이다. 그는 회사에서 그냥 그대로 놔둘 것 같지 않단다. 그러면서 후회를 했다. 자회사에 그대로 있었어야 했다고 말이다.


사실 자회사에선 그런대로 튼튼하게 자리를 잡아 일하고 있었다. 작지만, 파견 공장의 총괄 관리자였으니까.

본사에서 당장 일꾼이 필요하니, 우리 공장 경험이 많은 그를 꼬셔 온 것이다. 그의 피해의식을 자극했을 것이다. 그는 본사에서 밀려났고 다시는 못 돌아갈 것이란 말을 하곤 했었다.


따지고 보면, 당장 임시로라도 구멍을 메워줄 사람이 필요했을 뿐이다. 새 직원을 뽑아 제 역할을 할 때까지 말이다. 그는 자회사로 다시 갈 여력도 이제는 남아있지 않단다.


자신이 묻힐 무덤을 자신의 손으로 판 것이다.



그는 자신을 이용하고 버릴 준비를 하는 회사 선배들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지칠 대로 지쳤기 때문에 별다른 저항을 하진 못했다. 그냥 목줄을 쥔 사람들이 시키는 대로 끌려다니며, 그들의 선의에 기대를 걸뿐이다.


이미 말라버려 그 안에 흔적도 없는 사라진, 그 망할 '선의'에 말이다.




권고사직의 공포는 전염이 된다.



이번에 전형의 권고사직이 집행되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수면 위로 동시에 올라왔다.

직원들도 모두들 다음 차례에 대해 수군거리면서 회사 전체가 어수선해졌다. 그런 분위기가 확산되자, 상당수가 자신도 안전치 못하다고 생각했다.


권고사직의 공포가 급속도로 퍼져나갔다.


그 전염병은 기가 막히게도 임형을 발견하고 몸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임형은 이미 그전부터 무기력에 빠져 감염에 취약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임형뿐만은 아니다. 아이러니한 부분은 같은 상황에 노출되어도 사람마다 증상이 다르다.

자신의 컨디션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는 너무도 쉽게 깊숙한 감염으로 번아웃이 왔지만, 어떤 이는 감염되고도 무증상이다. 심지어는 노출됐음에도 전염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 그 기준도 오롯이 개인이 처한 상황과 육체적, 정신적 취약 상태에 의한다.


전염병과 똑같지 않은가?


신기하다는 생각을 했다.

권고사직이 불러온 공포가 전염병보다도 훨씬 넓게, 멀리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이 놈은 노출된다는 의미가 무서울 정도다. 전염병은 노출의 의미가 신체 접촉의 의미로 좁혀진다. 하지만, 이 놈은 보고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SNS나 전화만으로도 쉽고 빠르게 전염이 된다. 직접 접촉하지 않아도 순식간이다. 흩어져 있는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가슴속 한구석을 강력히 파고들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허참.. 알고 보니 권고사직이 전염병이었네.. 코로나19보다 더 강력한.."





같은 직급과 유니폼,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누구일까?



임형이 근래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이제 직장 생활 지긋지긋하단다. 도저히 참기 힘들다고 했다. 솔직히 그만두라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좋겠단다. 전형 정도로만 위로금을 챙겨주면 그냥 여기서 접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그 말에 지극히 공감한다고 대꾸했다.


임형도 내년에 50세가 된다. 그도 아들 둘이 있는데, 벌써 대 2, 고2 학생들로 미국 유학 중인 상황이다. 유학 비용 관련된 부분도 전엔 많이 들었지만, 지금은 운 좋게 지원 혜택을 받고 있단다. 앞으론 추가로 돈 들어갈 일이 별로 없다고 했다.


그리고 퇴직 후 먹고 살 문제도 걱정이 없단다. 보전업무 특성상 전문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는 여러 가지 다양한 국가자격증도 가지고 있다. 그 자격증만 가지고도, 어디 가서 뭘 해도 먹고사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계속 말하다 보니 그의 처지는 전형과는 많이 달랐다. 물론 내 상황과도 많이 달랐다. 권고사직 이후의 계획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임형 정도면 굉장히 양호하다. 50대가 넘어 회사에서 잘린 사람치고는 그 준비상태가 대단한 수준이다.


나는 내 코가 석자인 주제에, 다 준비된 사람을 두고 괜한 걱정을 했다고 말했다.

우리 집도 첫째가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제 시작이라 앞으로 돈 들어갈 일이 걱정이다. 임형이 너무 부럽다고 말이다.


그러자 임형은 내게 마지막 위로의 말을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


"박 부장은 항상 운이 좋은 사람이잖아. 어떻게든 잘 될 거야.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전화를 끊고는 한참 생각에 잠겼다.

회사에서의 우리는 아등바등 똑같은 인생을 살고 있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20년 세월이 지난 후 회사를 벗어날 때가 와서야 알았다. 저마다 각자의 인생이 모두 달라져 있었고앞으론 더 많이 달라질 것이다. 생각이 많아졌다.


사실 '권고사직받은 사람들의 말로'는 예측이 불가능하다. 나락으로 빠지는 사람도 있지만, 전화위복으로 더 성공하게 되는 사람도 있다. 회사 안에선 똑같은 직급에 똑같은 유니폼을 입고 살아왔지만, 그 이후는 완전히 달라진다.



권고사직의 순간까지는 아직 알 수가 없다. 어차피 인생 3막은 또 다른 판이기 때문이다. 지켜볼 일이다.


그 사람이 진짜 누구인지 말이다.



(이 글들 전체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이 꽤 많았다. 사실 누군가에겐 예민한 부분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내가 가장 신경 썼던 부분은 정확한 사실만 기록하는 것이었다. 명백한 사실과 사건, 관련자들의 의견, 내 생각을 구분해서 있었던 일만 적기로 다짐했다. 그들 모두가 보더라도 과한 억측은 없을 걸로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임형의 얘기는 속내가 복잡하다. 그가 아직도 같은 자리에서 열심히 눈치를 보며 살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화)가 완성이 되면, 그에게 보여주며 물을 생각이다. 그가 원한다면 당연히 삭제할 것이다.)




등잔 밑이 안전하다는 착각



그날 하루 종일, 머릿속을 떠도는 임형의 말이 있었다.

권고사직 명단이 이미 작성돼 있다는 말도 돌고 있단다. 루머일 수도 있다. 무시하려 했지만, 그 부분이 계속 거슬렸다.



사실 임형과 나는 입장이 좀 다르다. 그는 나름대로 생각의 정리를 마친 듯했다. 이미 상당한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준비할 게 없어 보였다. 오히려 공식적인 제안을 받고 협상을 통해 위로금을 받고 그만두는 쪽이 훨씬 좋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준비가 안되어 있다. 어떻게든 버텨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회사에 살아남을 마음도 있다. 정확하게는 결정을 못했다.


혹자는 미련을 왜 아직도 못 버렸냐고 할 테지만, 아직까지 충분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버티면서 실적을 내며 존재감을 계속 내비치면 된다. 분명 시간이 지나면 조직이 다시 바뀔 것이다. 그렇다면 보란 듯이 재기에 성공해서 무너졌던 자존심과 체면을 다시 세울 것이다. 거기까진 확신이 있다.


다만, 딱 한 가지만 명확하면 된다. 권고사직의 노란 봉투만 받지 않으면 된다.(진짜 노란 봉투는 아니다. IMF 시절 아침에 오면 이곳저곳 책상 위에 올려져 있었다는 그 노란 봉투는 이젠 없다.)



내게는 노란봉투라기 보단 '권고사직의 탄'이 더 맞을 것 같다. 그 '탄'만 맞지 않으면 된다.


'권고사직의 탄'


영화 『타자 2』에도 등장한 점수를 모두 설계 해놓은 고스톱 화투 짝을 '탄'이라고 한단다. 극 중 주인공이 이 탄에 맞고 거의 노예가 돼버리는 장면도 있다. 내게 권고사직의 탄을 만들어 들이밀면, 무슨 용을 써도 벗어나진 못하리라.


하지만, 내게도 믿는 바가 있다.

나는 등잔 밑에 들어와 있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생각 중이니 말이다.



내가 결정의 시간을 좀 길게 갖고 있는 이유이다. 인생에 가장 중차대한 순간을 조급한 나머지 대충 결정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곳이 등잔 밑이란 생각이 들자, 오히려 내겐 기회가 되리란 생각을 직감적으로 한 것이다. 때문에 좀 더 시간을 갖고 꼼꼼히 접근하고 있다.


모두들 예상했던 대대적인 숙청의 피바람이 불어온다고 해도 내가 피해있는 여기 등잔 밑은 다를 것이다.

본사의 대표이사가 칼을 휘둘러도 막아줄 방패막이 있다. 다름 아닌 연구소 총괄사장이다.


그는 비록 명시적인 인사권을 갖진 않았지만, R&D에 관한 일이라면 다르다. 각사를 총괄해서 시시콜콜 보고받고 지시하는 중이다. 인원도 통제하고 관리하는 걸 좋아한다. 특히, 직속 조직인 미래사업연구소라면 두말할 나위 없다. 누군가 건든다면 본인을 무시하는 일로 생각할 것이 뻔하다.

앞서 내 좌천 발령 때도 먼저 그의 재가를 받느라 쇼를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본사 대표이사와 연구소 사장은 사이가 정말 안 좋다. 과거에 여러 차례 크게 부딪힌 적이 있다. 지금은 서로 불편한 나머지, 상대와 관련된 일에는 근처에도 잘 가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어떤 피바람이 불어도, 이곳은 확실히 안전한 곳이라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시간을 벌면서, 다음 스텝을 준비하는 것이 내 전략이다.

남들은 모르겠지만, 내가 조급한 마음 대신 한껏 여유 있는 척 자존심을 지킬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등잔 밑이 어두워 신경 쓰지 않을 것이란 것은 내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의 원천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그 원천은 내 머릿속 희망 회로가 만들어낸 허상일 뿐이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틀렸음을 알 수 있는 너무도 명백한 사건이 일어났다.


(계속..)



이전 16화 직장판, 『비열한 거리』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